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ecado May 11. 2024

쓰임이 있는 예쁜 칼이 돼라

     정월대보름 날 아침, 사내는 산달에 임박한 아내를 위해 사과를 깎았다. 유독 입덧이 심했던 탓에 딸이라 확신했던 아내는 예쁜 딸을 낳고 싶다며 제철 과일인 딸기와 귤도 마다한 채 사과만 찾았다. 사내 역시 딸이라는 확신에 차서 가장 여성스럽고 세련된 느낌의 이름을 지어서는 사과를 깎을 때마다 뱃속의 태아를 향해 다정하게 호명했다. 부부에게 새 생명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던 평화로운 오후였다. 

     날이 무뎠던 낡은 과도를 잡고서 사과의 껍질을 예쁘게 도려내려고 애를 쓸수록 칼등에 꾹 눌린 사내의 엄지손가락 지문이 오목하게 파이면서 굵고 깊은 선이 생겼다. 이런 고생보다 못마땅했던 것은 잔뜩 긁히고 뭉개진 과육을 접시에 올려 아내에게 건네는 일이었다. 

     아내를 보기 민망했던 사내는 부엌에 가서 숫돌을 꺼내 과도를 갈던 중 그만 손을 베고 말았다. 흡사 조선시대에 만든 은장도처럼 생긴 낡은 과도였다. 지난 세월 얼마나 갈아서 써왔는지 얇아질 대로 얇아진 칼날을 보니 이제는 보내줄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사내는 이참에 새 과도를 사야겠다며, 장모님께 아내를 부탁하고 외출에 나섰다. 


     사내는 가볍고 날렵한 새 과도와 예쁜 사과들을 골라 봉투에 담아 시장을 나오는 길에 공중전화 부스를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멈췄다. 문득 아내가 걱정되었다. 주머니에서 꺼낸 동전을 주입해 다이얼을 돌려 집으로 전화를 걸었으나 아무도 받질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분만 지정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꽤 오랜 신호음만 듣다가 마침내 병원 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사내는 초조함에 목소리를 떨면서 혹시 자신의 아내가 병원에 왔는지 알 수 있냐며 이름을 알려줬다. 잠시 기다려보라는 직원의 말에 사내는 수화기를 귀에서 떼지 못한 채 다른 한 손으로 손수건을 꺼내 연신 이마의 땀을 닦았다. 서늘한 2월의 공기도 사내의 긴장을 식힐 수 없었다. 동전을 계속 주입하며 또다시 한참을 기다린 끝에 직원이 "지금 보호자 바꿔드릴게요."라고 말했다. 수화기 너머로 뭔가 덜거덕 거리는 잡음이 들렸다. 수화기를 건네받은 장모님께서는 인사도 없이 대뜸 “아들일세! 순산했네!”라고 외치셨다. 놀란 사내는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과도를 사는 일이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아내의 곁을 비웠을까. 사내는 자책으로 부아가 치밀었다. 워낙 몸이 약한 아내여서, 이미 한 번 유산했던 아픔도 겪었던 아내여서 출산의 순간에는 반드시 옆에 있어주려고 어렵게 휴가까지 냈는데, 하필 자신이 부재한 틈에 혼자 산통을 겪었을 아내를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날따라 차는 어찌나 막히던지 늘어진 비디오테이프가 천천히 재생되는 것처럼 세상이 온통 느리게 돌아가는 느낌마저 들었다. 


     가까스로 병원에 도착한 사내는 아내가 건강하게 출산한 것부터 확인하고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내의 표정에는 불안과 두려움에 미안함까지 가득했다. 

     "괜찮네. 자네가 없는 사이에 진통이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산모도 아기도 모두 건강하니까 천만다행일세."라며 장모님은 사내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했다. 사내는 장모님과 함께 신생아실로 향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신생아실 유리창 안쪽에서 커튼이 열렸다. 이름표를 발목에 감은 채 곤히 잠든 2세를 마주한 사내는 그저 신기해서 생소한 감정과 기쁨이 교차했다. 

     "아이고. 세상에. 자네가 나가고 바로 진통이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대로 양수가 터질까 봐 조마조마해서 집에서 내가 애를 받아야 하나 별 생각이 다 들었네. 마침 콜택시가 도착해서 택시기사님이랑 내가 겨우 산모를 옮겨 병원에 왔는데 그제야 양수가 터졌지. 아기가 기다려준 거야."라며 장모님께서는 했던 말을 수없이 반복해 말씀하시며 기쁨을 이야기하셨다. 

      경이로움에 한참을 아무 말 못 하며 기쁨으로 흐느끼던 사내에게 "그런데 산다던 과도는 좋은 걸로 골랐나? 왜 빈손인가?”라고 장모님께서 물으셨고, 사내는 혼비백산했던 나머지 공중전화 부스에 과도와 사과를 모두 두고 온 사실을 그제야 알았단다. 


     훗날 이 에피소드를 두고 외조모께서는 내가 태어나던 날을 회상하실 때마다 “네 아비가 칼 대신 너를 얻었으니, 너는 칼 같은 사람으로 살겠다. 쓰임이 있는 예쁜 칼이 돼라.”라고 늘 말씀하셨다. 

     인생은 존재의 모호성을 끊임없이 확인하던 지난한 과정이었고매번 극심한 혼란을 느낄 때마다 이 담화의 현취를 떠올리며 그 의중을 파악하고 실제 삶에 적용하려 부단히 애를 써왔다. 오랜 시간 곱씹어 깨달은 바, 칼의 의미는 단순히 엽구나 융구, 잡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갈구하는 이상을 위하여 그 무엇이든 탐구의 소재로 가공할 수 있는 인지의 날 끝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인지의 날 끝이 무디지 않고 예리해야만 올바른 가치관과 명료한 세계관이 내면에서 바로 서고, 소유한 모든 지식들이 순차적으로 재배열되기 시작하면 비로소 막힘없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말이다. 






사진: Pecado 

글: Pecado 

작가의 이전글 내가 여기에 나타난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