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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봄 Nov 18. 2020

평범하지만 평균은 아닙니다. #05

살갑다는 이름으로 01

살가운 사이는 당신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하는 것 아닌가. 여기서 ‘사이’라는 것은 당신과 나의 미묘한 간극을 말한다. 


그 간극이 만들어내는 무례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랐다. 용기가 없어 면상에 대고 따지지도 못했고 익숙해지다 보니 또 시작이려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도 했었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쉬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미스 노, 이리 와봐 박 차장 사진 봤어? 고추가 얼마나 큰지!”

27세의 미혼인 나에게 남의 자식 성기의 크기는 궁금하지도 않을뿐더러 가서 구경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단지 아이의 발가벗은 모습을 보라는 말을 앞뒤 자르고 박 차장의 그것을 보라는 것처럼 불러대는 사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가서 그 자리에서 하하 호호해야 했을까?

그로부터 얼마 후 신입 직원이 들어와 회식을 하는데 아무렇지 않게 여직원 놀리기는 은연중에 시작되었다. 여직원이 둘인데 한 명은 과장님의 부인이었다. 식사를 하는 회식자리인지라 술이 빠지지도 않았다. 사장님은 신입직원에게 연거푸 술을 권하며 껄껄 웃어댓다. 나는 불안한 눈으로 천천히 마시라고 눈짓을 했는데, 이것을 눈치를 챈 것인지. 


“미스 노가 얼마나 걱정을 하는지 그 큰 가슴을 부여잡고 어쩔 줄을 모르네?”

다 좋은데 거기서 그 큰 가슴은 왜 들먹이는지? 맥락 없이 들이닥친 내 가슴 공방은 모두의 웃음으로 마무리되었다. 

영업직이었던 나는 서울과 이천의 반도체 회사들을 상대로 일을 했었다. 회의며 접대며 혼자 고군분투했었는데, 다들 여자(?)가 담당자로 있어서 신기하고 좋다고 했다. 역시나 이 곳에서도 두 귀를 의심하는 말들은 종종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쌍둥이의 아빠인 거래처 과장은 결혼 예정도 없는 나에게

“쌍둥이를 만들려면 좌로 두 번 우로 두 번을 해야 하지!” 

남편이 밖에 나가 젊은 여성 앞에서 자신들의 부부생활을 희화하는 것을 알고 있을까?


이직한 회사의 사장은 여느 해 보다 이른 더위에 에어컨을 틀어주며 

“집에서 더워서 어떻게 있어?”

“더우니까 홀딱 벗고 있어?”

내가 홀딱 벗든 할딱 벗든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닌데 저질스럽기 그지없는 농담에 나도 모르게 썩은 표정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 후론 다행히 그런 류의 농담은 없었다.


경력직으로 들어온 이사는 은근슬쩍 어깨며 옆구리에 손을 대었다. 서른 살 가을, 퇴사를 통보하며 성희롱을 참을 수 없다고 하자 오히려 당황스러워하며 나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그렇게 느꼈다면 정말 미안해요. 내가 너무 속상해서 집사람하고 딸 하고도 이야기를 했어요. “

“나도 딸 키우는 데 절대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딸 같아서 라는 레퍼토리는 너무 흔하지 않은가! 뭐가 그렇게 당당해서 가족과 이야기를 했을까? 자기의 변명을 늘어놓는 시간이었을까?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자기는 그만큼 떳떳하고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변명을 면담 시간 내내 들어야 했다. 


야한 농담 앞에서 못 알아듣는 듯 순진한 척하는 나를 놀려먹기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난 생각보다 많은 것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그들의 의도 또한 파악하고 있었다. 나처럼 눈치가 빨라 의도를 알아 치욕을 느끼는 게 나을까, 아니면 의도 파악을 못하고 그들에게 희열을 주는 순진한 마음이 좋을까? 어떤 것에도 정답은 없다. 정답일 필요가 없다. 아직도 여성을 그런 장난감 정도로 생각하는 남자들이 문제니까.

더러운 농담을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며 혼자만의 희열을 느낀다면 이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변태’와 뭐가 다를까? 


농담이란 서로 듣고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일방적인 이야기들을 짓궂은 농담이라고  치부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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