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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Jul 02. 2020

<에드가 드가(Degas)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짧은 교양수업”中

<에드가 드가(Degas)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짧은 교양수업”中

                                           해 헌 (海 軒)

오늘은 역사의 탄생으로부터 문화의 흐름까지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고 이를 1일
1페이지씩 정리해서 교양을 전해주는 책을 연이어 보려고 합니다.

저자는 데이비드 S. 키더와 노아 D. 오펜하임의 공동 저자인데, 데이비드 키더는
다양한 기업을 설립한 CEO이고 대학과 기업에서 활발한 강연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펜하임은 하버드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후 FOX, MTV 등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고 저술가 및 각본가로 활동 중이라 합니다.

오늘도 그 파트들 중 <미술>에 관한 내용을 해볼까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위대한 작곡가인 비발디, 모차르트, 슈베르트, 슈만, 클라라, 브람스 등 음악가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 번 하였고 오늘은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이자 조각가인
에드가 드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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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가의 삶

에드가 드가(1834-1917)는 인상주의 운동과 연상되는 가장 유명한 미술가 중
한 명이다. 회화 화가, 데생 화가, 조각가, 사진사, 수집가 등등 그를 부르는
명칭이 많지만 드가는 발레리나를 그린 그림으로 특히 유명하다.

드가는 파리의 전형적인 부르주아 계급 출신이다. 그의 이름 중 ‘일레르’는
대혁명 때 이탈리아 나폴리로 가서 은행가로 성공한 조부에게서 딴 것이고,
‘제르맹’은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목화 사업으로 큰 돈을 번 외조부에게서 딴
것이다. 드가가 1834년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집안이 소유한 나폴리
은행의 파리 지점을 맡고 있었다. 최고의 고등학교 리세 루이 르 그랑 재학
중에 박물관에 갔다가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853년 집안의 권유로
소르본의 법학부에 등록했으나 곧 그만두고 루이 라모트의 제자로 에콜 데
보자르에서 그림을 배웠다. 그의 스승은 앵그르의 제자로 고전적인 미술 교육을
시켰고, 드가는 앵그르적인 선과 전통적인 드로잉을 충실하게 학습했다.

미술작품들을 수집한 것을 제외하면 드가의 생활은 금욕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검소했고, 직업에 있어서는 철두철미하고 성실했다. 수업기의 그는 루브르에 있는
거장의 작품을 거의 다 모사했으며 3년간 머물렀던 이탈리아에서는 7백점이 넘는
미술 작품을 베껴 그렸다.

당대의 많은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드가는 사진술 발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카메라를 실험했고, 종종 작품을 위한 사전 조사에 카메라를 이용했다.
또 일본 판화에도 영향을 받았다. 1861년 사실주의 화가 쿠스타브 쿠르베와
에두아르 마네를 만나 그들에게서 영감을 얻은 후로 드가는 파리의 일상적인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 무용수들과 발레하는 모습을 그린 드가

초기의 화풍은 고전적으로 <보나의 초상>, <꽃을 든 여인>, <이오부인> 등의
초상화에서 시작했으나, 차츰 무용, 극장 등의 근대적 민중 생활의 묘사를 주로
하였다.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객관성으로 대상을 포착하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개발했는데 특히 보는 각도를 바꾸어 가면서 정확한 데생과 풍부한 색감을 표현
하였다.

발레하는 무희를 모델로 한 작품이 많아 ‘무용의 화가’로도 불린다. 주요 작품으로
<댄스 교습소>, <국화 옆의 여인> 등이 있다. 당시 드가의 이런 소재 선택은 꽤
파격적인데, 당시만 해도 무용수들의 처우는 매춘부보다 약간 나은 수준이라 할
정도의 하층민이었기 때문이다. 드가는 무용수들의 모습을 모델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용수들의 처우 개선에도 직접 노력하는 등 깊은 관심을 보였다.

드가는 인상파 전시회에 일곱 번 출품하며 인상주의를 지지했지만 ‘인상주의’라는
말을 싫어해서 스스로 사실주의 화가 또는 자연주의 화가라고 불렀다.
1880년부터 1893년까지 드가는 가장 활동적인 시기를 보냈다. 다양한 매체를
실험하면서 보다 유동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파스텔에 템페라나 구아슈 기법을
결합했다. 유명 작가 에밀 졸라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적 관점에 영향을 받아
동정적인 시선에서 노동자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파스텔이나 판화에도 많은 수작을 남겼을 뿐 아니라 만년에 시력이 극도로
떨어진 뒤에 손댄 조각에까지 더없는 걸작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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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인상주의 화가의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는 에드가 드가의 이야기를 함께
보았습니다.  드가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주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그림을
배웠는데, 가정이 그렇게 밝은 곳은 아니었나봅니다.  그는 여성을 혐오하고
평생 독신으로 지내게 되는데, 말년에는 집안의 경제가 무너져 생계를 위해서도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는 마네, 모네, 르누아르, 모리조 등과 교류를 하며 인상파 전시회 8회 중 7회
작품을 전시했으나 자신은 인상파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고 하지요.
그는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 같이 일본의 판화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아 파격적인
구도 등을 실험하고, 후기에는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냅니다.
즉, 주인공을 화면의 구석에 위치시킨다든지, 화면의 끝에 넣어 잘린 모양으로
나오게 한다든지, 우연한 각도로 포착을 하는 구도를 잘했다고 합니다.

드가는 무용의 화가라고 불릴 만큼 많은 발레리나를 그렸는데, 그당시 발레리나는
가난하고 어려운 집의 소녀들이 많이 하였고 하층민의 삶을 살아갔다고 합니다.
그는 그런 소녀들의 그림을 그리는 등 일상생활의 그림을 잘 그렸고 그들의 애환
을 잘 표현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초기에 앵그르의 제자였던 스승을 만나 수없이 데생하고, 루브르
박물관의 작품들 중 유명한 것은 거의 모사를 하였으며 이탈리아에 가서도
명작을 모사하는 등 기초가 탄탄하게 다진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대충 그린 듯한 그림, 유치원생이 그린 듯한 그림의 피카소 그림도 사실은 수많은
기본기가 갖추어진 뒤에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모든 예술은 가장
기초부터 다 익힌 후에 자신만의 변용과 스타일이 나온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드가의 아름다운 발레리나 작품을 보면서 오늘도 아름다운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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