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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Jul 27. 2020

<중세 유럽 봉건제와 기독교 이야기>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4” 中

<중세 유럽 봉건제와 기독교 이야기>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4” 中

                                                 해 헌 (海 軒)

오늘은 미술의 역사를 알기 쉽게 설명을 해놓은 입문서와 같은 책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저자인 양정무교수는 서울대학교 고고미술학과를 졸업하고 미술사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이자 한국
예술연구소 소장으로 있습니다.

그는 ‘인문학의 꽃’으로 불리는 미술사를 우리 사회에 알리는 데 관심
이 많다고 합니다. 다양한 대중강연을 하고 있고, 저술활동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1편 책에서 인류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한 이야기
를 해보았고, 오늘은 유럽의 중세미술인 로마네스크 미술을 살펴보기 전 중세
유럽에 대한 기초 지식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번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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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의 유럽

많은 분들이 유럽 하면 풍요로운 세계를 떠올릴 겁니다. 그러나 천 년 전의
유럽은 전혀 달랐습니다. 당시 유럽은 문명과는 거리가 멀었고 개발이 덜 된
곳이었습니다.
당시의 문명 세계는 유럽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았던 비잔티움제국
이었습니다. 1000년 경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는 50만 명에 육박했던 반면
유럽 내에는 인구가 만 명이 넘는 도시조차 없었거든요.

비잔티움 제국 외에도 떠오르는 신흥 세력이었던 이슬람도 유럽에게는 큰 위협
이었습니다. 8세기 초 스페인 지역을 장악한 이슬람 세력은 점차 프랑스 내륙
깊숙이 밀고 올라가려는 욕망을 보였습니다. 1000년 경 이슬람 세력의 중심지
였던 스페인 코르도바의 인구도 약 50만 명이었다고 하죠.
그러니까 천 년 전의 유럽은 전통적 강대국인 비잔티움 제국과 신흥 강대국인
이슬람 제국에 포위되어 가까스로 이들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던 겁니다.

★ 유럽의 대반전, 샤를마뉴의 등장

이제 본격적으로 역사의 대반전이 일어나는 시기인 중세의 인물을 소개할
건데요, 서기 1000년보다 조금 앞서 등장하는 이 사람은 ‘유럽의 아버지’라고도
불립니다. 바로 샤를마뉴(742-814)입니다. 샤를마뉴는 혼돈과 무질서가 한없이
이어지던 유럽에 안정과 번영의 씨앗을 뿌린 최초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800년경 수십 차례의 전투를 치르며 영토를 확장했고 고대 로마제국에 견줄
만한 거대한 제국을 이뤄냈습니다.

영토를 정복하는 것도 힘들지만 이를 유지하고 다스리는 일은 더 힘든 일이었습니다.
곳곳에서 수시로 반란이 일어났고 샤를마뉴는 이를 제압하기 위해 항상 전쟁에
임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두 가지 해결책을 생각해냅니다.

★ 중세 유럽을 유지시킨 두 가지 축

그 두 가지는 바로 “봉건제”와 “기독교 신앙”이었습니다. 봉건제가 사회 전반을
체계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형태, 즉 하드웨어라면 기독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한 소프트웨어의 역할을 한 셈입니다. 물론 이 둘은 샤를마뉴가
처음 고안한 것은 아니지만 그를 통해 봉건제와 기독교는 유럽에 완전히 정착했고
유럽은 이때부터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도 어느 정도 안정됩니다.

먼저 봉건제를 본다면, 봉건제는 이 시기의 제국을 통치하는 데 꽤 효과적이었습니다.
그 이전의 사회 구조가 느슨한 편이었는데, 봉건제는 각 개인에게 계급에 따른
역할을 부여해서 사회 질서를 잡아나가는 구조였지요.
피라미드 구조와 비슷한데, 맨 위에 왕이 있고 그 밑에 영주, 영주 밑에 기사,
기사 밑에 농노가 존재했죠. 원리는 간단합니다. 서로가 계약을 맺어 아래에 위치한
쪽은 복종을 맹세하고, 위쪽은 그 복종의 대가로 땅을 내려주는 동시에 외부의
위협에서 보호해줍니다.

왕이 일괄적으로 통치하기에는 영토가 너무나 광활해서 결국 왕 자신이 머무르는
지역만 직접 지배하고 먼 지역은 신하들이 통치하도록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하들은 샤를마뉴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백작이나 공작 같은 작위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지역 영주들의 힘이 너무 커서 왕에게 충성을 맹세는 했지만 자신의
봉토 내에서는 왕처럼 행세했고, 원칙적으로 세습이 불가한 봉토를 이런저런
방법으로 세습하며 힘을 키웠습니다. 그 힘은 왕권을 위협할 정도였지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꺼낸 카드가 바로 마음을 지배하는 소프트웨어, 즉
종교였습니다. 샤를마뉴와 그 뒤를 이은 프랑크의 왕들은 신하와 백성들이
기독교를 믿게 함으로써 자신의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합니다.
일단 사나운 야만인들이 기독교를 통해 신앙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면서 더
합리적인 통치가 가능해졌습니다. 무력뿐만 아니라 신앙심까지 갖춘 정의로운
기사가 등장하며 중세 기사의 낭만적인 무용담도 나오게 되고요.
기독교를 대표하는 교황이 직접 씌워주는 왕관은 신이 내린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여겼고 결국 왕은 영주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권위를
갖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때부터 유럽에서 왕위에 오르려면 교황의 허락이 필요했고,
교황은 왕을 국가 지도자로 인정하는 권위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보면 황제와 교황은 서로 ‘윈-윈 게임’을 한 셈이었는데, 교황은
황제에게 통치의 권위와 명분을 제공하고 황제는 교황에게 비잔티움
제국이나 이민족의 침입을 막아낼 군사적 힘을 제공했습니다.

★ 공포에 빠진 1000년 경의 유럽

샤를마뉴 때의 봉건제와 기독교를 통해 기틀이 잡히기 시작한 유럽 사회는
1000년을 앞두고 서서히 공포에 빠져듭니다. 이는 1000년에 세상이 멸망
한다는 성경의 ‘최후의 심판’ 이야기 때문이었지요.
당시 유럽 사람들은 교회가 가르친 대로 최후의 심판이 1000년에 오는 줄
알고 공황상태에 빠졌었지만 걱정과는 달리 세계는 멀쩡했습니다.
사람들은 허탈해 하면서도 안도했습니다.

또한 중세사람들은 이제 당장의 내일이 아니라 다가올 천 년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사회가 안정되면서 건설 붐이 일어났지요. 도시마다 오래
되고 낡은 교회를 허물고 크고 멋진 교회를 새로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또 다른 유행이 생겨납니다. 그것은 여행의 붐이었는데, 이는 성지순례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중세 기독교인들은 천국에 가려면 죽기 전에 일생 동안 저지른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성지 순례는 확실한 참회 방법 중 하나였죠.
그래서 죽기 전에 꼭 한번 성지를 다녀와야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습니다.
성지 순례는 요즘으로 치면 중세인의 ‘버킷 리스트’였던 거네요.
그들은 최후 심판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이 인간에게 한번 더 참회할
기회를 주었다는 증거라고 믿었습니다. 신이 준 새로운 기회에 감사하면서
새 천 년의 시작과 함께 성지 순례를 떠나는 사람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지요.

★ 성지 순례의 유행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 최고의 성지는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기독교인
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성지죠. 하지만 대부분의 중세인에게 예루살렘까지
가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발달한 것도
아니니 더욱 어려웠죠. 또한 당시의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었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기독교 순례객을 막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환대하지도 않았죠.

이 때문에 대안이 될 만한 다른 성지들이 인기 순례지로 부상합니다.
주로 위대한 성인이 묻힌 곳이 대안이 되었어요. 예를 들어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베드로 성인의 유해가 묻힌 로마, 마가 복음의 저자로
알려진 마르코 성인의 유해가 모셔진 베네치아 등이 순례지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리고 좀 더 서쪽으로 가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있었죠. 이곳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야고보 성인의 유골이 발견되면서 새로운
순례지로 주목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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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뛰어난 스토리텔러이자 명강사인 한예종의 양정무교수의 책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중 중세유럽의 미술을 설명하기 위한 바탕 지식을 위해
중세 유럽의 상황, 샤를마뉴의 등장, 봉건제와 기독교의 채택, 그리고
최후의 심판의 공포가 엄습했던 1000년의 스토리, 이후의 성지 순례의 유행
등에 관하여 배우게 되었네요.

현대는 스토리텔링의 시대이고, 스토리텔러가 가장 각광받는 인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양교수는 뛰어난 스토리텔러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예종의 한 과정에서 양정무교수의 강의를 직접 듣기도
하였고, 최근에는 방송에 출연하여 대중에게 그의 역량을 각인시키기도
하였지요.

오늘은 중세의 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그 바탕의 지식을 알려주고 있었는데,
먼저 중세의 유럽은 보잘 것 없는 시골과도 같은 나라였다고 하지요.
이때의 강대국은 비잔티움 제국, 이슬람 제국, 그리고 동양에는 중국이 훨씬 더
문화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앞선 선진국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럽의 아버지라 불리는 샤를마뉴의 등장으로 유럽은 통일을 하게 되고
봉건제와 기독교, 즉 뛰어나고 효과적인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동시에 장착을
한 후 유럽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기독교의 천 년 무렵의 ‘최후의 심판’은 특히 중세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공포와
불안을 안겨주었습니다. 우리가 2000년이 되었을 때도 겪었던, 휴거 파동,
사이비종교의 종말론 등을 생각한다면 그 당시는 이보다 몇 십배는 더 큰
혼란이 있었으리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최후의 심판은 없었고, 이를 신의 가호, 한번 더 기회를 주는
은총으로 생각한 후 중세에는 성지 순례의 붐이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대표적인 성지순례 행사인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여전히 인기를 누리는 것을 보면 아직도 그 당시의 성지순례 버킷 리스트 행진은
진행형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중세미술의 한 형태인 “로마네스크 미술”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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