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대한민국 대표 인문학자들이 들려주는 인문학 명강의 – 서양고전 편을 한 번 보려고 합니다. 2만 명이 열광한 서양고전 최고의 강의로 플라톤아카데미의 ‘서양고전’ 강의를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오늘 저자인 이진우(1956~)교수는 연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학사, 아우스부르크대학교 대학원 철학 석박사를 했으며, 계명대학교 철학과 교수, 계명대학교 총장을 역임하고 포항공과 대학교 인문사회학부 석좌교수로 재직중입니다. 한국니체학회 회장을 하는 등 철학자 중 니체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니체는 매우 위험한 철학자입니다. 한번 중독되면 헤어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반전(反轉)의 철학자이며 동시에 전복(顚覆)의 철학자입니다. 사람들이 니체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체계적이고 이론적이지 않은 철학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모두 삶을 갈구합니다. 그리고 삶의 욕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니체는 “삶에의 의지, 나는 그곳에서 항상 권력에의 의지를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이 또한 반전입니다. 니체는 이처럼 모든 사람이 입에 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 낱말을 기꺼이 입에 올립니다. 대부분 이성을 이야기하고 평화를 이야기할 때 니체는 감히 권력이라는 말을 합니다. 니체에 관한 명제들, 사상들은 권력의 관점에서 읽히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권력 의지의 대서사시, 신의 죽음, 영혼 회귀, 초인 등에 대해서 늘 이야기하지요.
★ 권력을 다룬 철학자
니체는 인간이 삶에서 가장 큰 결실을 수확하는 비결은 바로 “위험하게 사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 가능한 한 편하게 살기를 바라는 인간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지만,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살아가면서 가장 위험하게 느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권력’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성현들은 늘 ‘권력에 집착하지 말라.’, ‘권력을 탐하지 말라.’ 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니체는 말합니다. “권력이 없다면 창조도 없다.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면 권력을 필요로 한다. 아메바부터 시작해 고등 동물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은 권력에의 의지다.”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권력은 왜 위험할까요? 역사학자이자 문화사가였던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권력은 그 자체로 악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모든 것이 권력으로 운용되고 관리되고 통제된다는 인식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영국의 역사철학자 액턴 경은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권력은 부정적인 것이고 파괴적인 것이며 우리가 회피해야 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는 기존의 생각을 니체는 완전히 뒤집어 놓습니다. 권력은 파괴적이 아니라 생산적이며, 나쁜 것이 아니라 삶에 기여할 수 있는 좋은 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말입니다. 이처럼 니체는 모든 것을 뒤집어 생각하는 철학자였습니다.
★ 차라투스트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니체는 1844년, 독일의 뢰켄에서 태어났습니다. 마르크스, 프로이트와 같은 혁명적인 사상가들이 등장한 시기이기도 한데, 니체의 아버지는 목사였습니다. 니체는 아버지를 무척 존경하였는데 겨우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그는 스물 다섯 살에 바젤대학교 고전문헌학과 교수로 되었는데, 독일 대학교 역사상 최연소 교수였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자신의 사상을 차라투스 트라라는 인물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니체가 조로아스터라는 이방인의 입을 빌려 자신의 사상을 전달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상징적이며 비유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의 입을 빌려서가 아니라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방인의 시각으로 우리의 문제를 한번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 Zaratusatra’는 페르시아어로 ‘조로아스터, Zoroaster’를 뜻합니다. 조로아스터는 기원전 2000년, 또는 1000년경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한 사람입니다. 조로아스터는 선악의 신이 양극으로 나뉘어 싸우다가 최후의 심판을 통해 궁극적 으로 선이 이긴다고 주장한 사람입니다. 선악을 이원론적으로 본 최초의 종교 지도자인 셈이지요. 그런데 니체는 궁극적으로 이것을 뒤집으려고 합니다. 그는 “선악이 있느냐, 선이라는 것은 악한 것을 견뎌 내지 못하는 약자들이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선악을 구별하는 조로아스터교를 끌어들인 다음 신의 죽음, 즉 선악을 구별하는 절대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제함으로써 선악의 구별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선악이 구별되기 이전의 삶,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들여다보자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늘 저 사람은 선한 사람이고 저 사람은 악한 사람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선악 구별하기 이전의 모습,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바라보면 어떤 진리를 깨닫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권력’이라는 것입니다. 이제껏 우리가 배척했던 것, 입에 올리기만 하면 사회로부터 배제당하고 억압당해 왔던 그 ‘권력’이라는 단어가 세상의 원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 실존의 예술
지성사와 문명사적 관점에서 볼 때 19세기는 1801년이 아니라 1832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832년은 바로 헤겔이 죽은 해입니다. 철학을 절대자, 절대 정신의 관점에서 집대성한 헤겔의 죽음으로 인해 철학의 체계는 더 이상 개선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지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이성을 믿게 되었다는 것은 인간을 뛰어넘는 절대자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시대에 신은 일종의 분위기로만 존재하게 되는게, 그런 상황에 대해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사상을 뿌리째 뽑아버린 것처럼 보였던 니체가 ‘최고의 권력자는 사랑을 가진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가질 수 있는 사람에 대해 ‘영원 회귀, Amor Fati’를 주장합니다. ‘영원 회귀’는 말 그대로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영원 회귀는 다시 말해 “너는 현재 살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온 생을 다시 한 번, 아니 수없이 몇 번이고 되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허무주의 시대에 허무주의적인 사상을 가장 극단적인 가설로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영원 회귀 사상이 던지는 의미는 결국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을 가벼이 여기고 5년 뒤, 10년 뒤에 제대로 살겠 다고 말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맞이하는 것은 죽음뿐입니다.
실존을 다룬 카툰을 한번 보세요. 첫 번째 그림에서 한 사람이 “야, 세상에는 신이 없잖아, 우리의 실존이라는 건 아무런 목적도 없어.”라고 하자 옆의 모자 쓴 친구가 말합니다. “야, 그렇지. 정말 그래. 네 말이 정말 맞아. 우리는 우리의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허무와 공허함 속의 한가운데 있어.” 두 번째 그림입니다. 모자 쓴 친구가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너 그런데 왜 나무는 올라가고 그래? 그래 봤자 아무 의미도 없는데?” 하고 묻자 세 번째 그림의 모자 쓴 친구가 대답합니다. “야, 인생은 모험이야! 너도 올라 와! 나 다람쥐 한 마리 발견했다!” 이것이 삶이라는 것입니다.
니체는 우리가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의 어린아이는 자신의 삶을 하나의 유희로 받아들이며 이 무거운 짐, 영원히 반복되고 끊임없이 되돌아가는 삶, 아무런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가벼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합니다. 배경이 없습니다.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끊임없는 긍정의 힘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니까. 여러분은 내면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모순과 갈등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십니까. 이것이 니체의 질문 입니다. 다음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니체의 명제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이 글처럼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은 서양고전 시리즈를 담은 책을 함께 보았고, 그 첫 번째로 위대한 철학자 니체에 관한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저자는 이진우 교수로 계명대학교 총장을 역임하고 한국니체학회 회장을 하는 등 철학자 이자 교육자이며 니체에 관심이 높은 학자였습니다. 대체로 니체는 과격할 정도로 파격적인 주장을 한 철학자라고 알려져 있고, 저자의 말대로 이에 비례하여 매력이 대단하여 따르는 이들이 많은 철학자입니다.
니체는 ‘권력 의지’, ‘영혼 회귀’, ‘초인’, ‘신의 죽음’ 등을 주로 이야기하였고 그의 주장은 호불호가 뚜렷하여 파란을 많이 일으켰습니다. 전통적인 기독교 세계인 서양에서 감히 ‘신은 죽었다.’고 주장을 하고, 함부로 입에 올리기 힘든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과감하게 합니다. ‘신의 죽음’을 이야기한 그는 의외로 목사의 아들이었고, 영민하여 최연소 교수가 되었지요.
그의 대표작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를 말하는데, 선악이라는 이원적인 사고를 가진 최초의 종교의 창시자였습니다. 선악의 구분, 죽음 후 최후의 심판 등은 기독교의 프레임인데, 조로아스터교가 먼저 생겼던 종교임을 본다면 학자들은 기독교의 세계관이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았 다고 하지요. 니체는 조로아스터를 현대에 불러들임으로써 현재의 세계관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방인의 시각으로 보자고 합니다. 또한 어린아이의 시각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어린아이는 이 힘든 세상을 하나의 유희로 바라보고 선입관 없이 세상을 천진하게 수용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긍정의 세계관을 가지는 것이 어린아이인데, 지금 현대인이 이런 어린아이들의 순수한 긍정성을 필요로 한다고 하지요.
저자가 가장 좋아한다는 니체의 명제는 오늘의 주제에 가까운데, “네가 다시 태어나기를 영원히 바랄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라.” 즉, 후회하지 않는 현재, 지금, 이 시간을 살아라는 충고입니다.
그 어려운 니체의 이야기가 저자의 설명을 통해 조금은 쉬워진 듯 합니다. 제가 다시 짧게 더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면, 이 세상의 부조리와 고통 등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더 긍정적이고, 아모르 파티의 의미처럼 현재의 “운명을 사랑”할 수 있다면 더 나은 삶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