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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Sep 23. 2020

<유럽 인문 산책>

“느리게 걷고 깊게 사유하는 길”

<유럽 인문 산책>
“느리게 걷고 깊게 사유하는 길”

                                           해헌(海軒)  

오늘은 여행을 통해 인문학적 사유와 성찰을 하는 국문학자의 여행기를 한번
보려고 합니다.

저자인 윤재웅교수는 현재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이며, 학술서
<미당 서정주>, 평론서 <문학 비평의 규범과 탈 규범>, 소설 <판게아의 지도>,
동화 <들썩들썩 채소 학교> 등을 집필했고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를 엮었으며 편저로는 <미당 서정주 전집>이 있습니다.

유럽에서 만나는 작가의 서정과 감성을 한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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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의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유럽 이곳저곳을 걷고 싶었습니다. 푸른 하늘,
맑은 공기, 부드러운 언덕과 진초록 밀밭 길, 민들레와 유채꽃이 춤추는 들판을
지나는 동안 풍경이 음악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온갖 사물이 저마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일 뿐만 아니라 서로 어울려 화음을 낸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부엔 까미노! 좋은 길! 이방의 사람들을 만나 다정하게 교감하기도 했지요.
개와 고양이, 바람과 강물의 이야기를 문장으로 옮겨보는 건 또 다른 즐거움
이었습니다. 천국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란 걸 느꼈을 때의 조용한 기쁨을
잊지 못합니다.
느끼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일이 잘 어우러져야 한다는 걸 깨치게 되었습니다.
의식주가 삶의 물질적 기반이라면 느낌과 생각과 표현은 정신의 디자인이
아니겠는지요. 표현하지 않았다면 살아날 수 없었던 감각과 기억과 상상력은
제게 큰 기쁨입니다. 감각의 새로운 꽃들이 피어나고 문장들이 나비처럼 날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생각의 한 매듭을 맺게 되었습니다. 여행의 경험과
기록은 공간에 대한 단순한 관찰이 아닙니다. 감각과 지각이 만나 오래와
새로가 포옹하는 삶의 새로운 탄생입니다.

걸으면서 새로 태어나는 기분, 거듭난다는 느낌. 제 걷기의 인문학이 이렇게
말을 걸어오곤 했습니다. 쉬운 말과 단순한 행동이 삶의 소중한 가치임을
발견한 것도 이번 여행의 축복입니다. 이웃에게 다정하자! 제 삶의 결론은
이 한 마디면 충분합니다. 나누고 베풀 수 있다면 아낄 일이 무엇입니까.

★ 유리 피라미드와 다시 태어난 루브르

루브르 박물관은 프랑스문화의 꽃이자 유럽문화의 자존심입니다. 12세기 후반에
작은 요새로 출발했으나 역대 왕들이 증개축을 해서 오늘날 소장 미술품 40만
점에 이르는 세계 최대 박물관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기원전 19세기 바빌론
에 세워진 완본 비석인 <함무라비 법전>, 고대 이집트 문명의 대표작 <커다란
스핑크스>,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조각으로 평가받는 <밀로의 비너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루브르에 대해 말한다면 저는 루브르의 정체성에 새로운 감각을 도입한 특별한
기념물에 주목합니다. 박물관 중앙 광장의 빈 터에 세워진 파괴적 혁신의 상징.
1981년 중국계 미국 건축가 I.M.페이가 디자인한 피라미드입니다. 중세풍의
고색창연한 ㄷ 자형 박물관 건물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기념물이지요.
광장 자체가 고전과 현대, 돌과 유리와 물이 결합한 새로운 디자인이 된 겁니다.
상식과 관습을 파괴하는 충격적인 배치입니다.
그 아래 지하 광장은 박물관 입구. 피라미드를 통해 프랑스 최고 박물관의 심장부
로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페이의 설계안이 발표되자 프랑스 전체가 발칵 뒤집힙니다. 여론은 경악과 전율로
들끓습니다. 여론을 움직이는 프레임은 ‘루브르를 망친다!’. 광장에는 연일 반대
시위가 벌어집니다. 미테랑 대통령은 대형 국책사업 그랑 프로제 가운데 하나인
그랑 루브르를 밀어부칩니다.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바꾸지 못하면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다. 문화사업이야말로 개혁의 모든 것이다.”라는 것이 미테랑 대통령의
정치철학이었으니까요. 8조원을 들여서 9개의 거대 건축물을 성공리에 완성한
대통령. 그는 건축가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최대한 존중했습니다.

1989년 루브르 중앙 광장에 유리 피라미드가 완공되자 그 효과가 입증되기
시작했습니다. ‘루브르를 망친다’가 ‘루브르가 다시 태어난다’로 바뀝니다.
박물관 입장을 위해 길게 줄을 서야 했던 방문객들은 이제 유리 피라미드 아래
지하 광장으로 들어가 대기하는 이색 체험을 합니다. 채광 좋은 넓은 공간
덕분에 지하라는 느낌도 없습니다. 매표소는 물론 레스토랑, 서점, 강당 등
관람객을 위한 공간이 넉넉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지상에 돋은 유리 피라미드 아래에 투명한 역피라미드 구조물이 고드름처럼 달려
있네요. 일순, 공간 전체에 긴장감이 생깁니다. 관람객들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기하학적 불균형을 몸소 체험할 수 있지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보고 느낍니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 문화유산의 재창조, 수학의 역동적
아름다움을.

★ 풍경도 사람도 음악이 되는 곳, 비야마요르 밀밭 길

스페인 시골길은 아름답습니다. 하늘 푸른 봄 아침, 새소리 햇빛 속에 부서지기
시작할 때 진초록 밀밭 길을 걷습니다. 풍경도 음악인가 봅니다. 멀리에 가까이에,
노랑 유채 꽃동산이 화음을 넣습니다. 슬쩍슬쩍 바람이 붑니다. 강약 중강약
밀들이 춤추고 유채가 박수칩니다.

나는 온몸으로 들판의 음악을 마시고 향기로 전해오는 식물의 편지도 읽습니다.
첫 문장이 씨눈 터질 듯 꼬물거립니다. 부엔 까미노! ‘좋은 길’이라는 뜻이지요.
마주치는 사람마다 상냥하게 나누는 인사말입니다. 천천히, 천천히, 편지 향기를
음미합니다. 누구에게든 첫인사는 씨눈 터지듯, 그 사람 마음에 씨눈 터지게
하면 좋겠습니다.

에스테야에서 로스 아르코스까지 가는 길입니다. 4킬로미터도 더 돼 보이는
장대한 병풍바위. 용서의 언덕에서 아스라이 보였던 기다란 바위 절벽들이 아침
햇살에 깨끗하게 빛납니다. 두근거리는 가슴, 오랜만입니다.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으면 늙는 거라고 괴테는 말했다지요.

밀밭 교향악은 계속됩니다. 사방천리 초록 바다입니다. 바늘구멍만큼의 빈틈도
없이 천지에 꽉 들어찬 찬연한 햇살. 산과 들, 나무와 풀, 꽃과 벌. 나비의 날개짓
사이마다 허투루 빠져나갈 길 도무지 없는 하늘의 밝은 술. 오, 저토록 완전한
충만! 천지의 에로스가 천천히 일렁입니다. 바람이 불고 밀밭이 흔들리고 햇살이
꽉 들어찬 초록 들판을 걸어 저는 풍경의 음악 속을 연애하듯 지나는 중입니다.

★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은 흐르고

봄날이 갑니다. 엊그제 꽃 피더니 오늘 꽃이 집니다.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시인 김영랑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이렇게 노래하지요. 짧은 봄을 애처로워
합니다. 가는 봄날을 저는 파리에서 마지막으로 봅니다. 미라보 다리는 파리의
아름다운 다리들 중에서도 이별의 시심이 가득한 다리입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흘러간다.
괴로움 뒤에 오는 기쁨을
나는 기억하고 있나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은 흐르고> 중에서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인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는 미라보 다리
위에 서서 이렇게 노래했지요.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진 아픔을 가눌 길
없어서 속으로 혼자 소리친 것입니다. 흐르는 강물은 가버린 사랑을
가슴에 심습니다. 남겨진 시인은 다리와 하나 되어 흐르는 강물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예술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 예술이 우리를 대신해서 희로애락을
표현해주기 때문이 아닐까요? 똑같은 경험을 해보지 않더라도 수긍할 수
있는 법입니다. 세기의 명시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은 흐르고>를
읊조리고 있으면 연인과 헤어진 시인의 애틋한 심정을 자기 일처럼 느끼게
되지요. 이것이 예술을 사랑하고 향유하는 진정한 이유가 아닐까요?

만나고 헤어지는 일은 인생사의 다반사. 스물일곱 살 청년 기욤 아폴리네르는
세 살 연하인 마리 로랑생을 전시장에서 만납니다. 그녀는 시와 그림을 사랑한
젊은 예술가였습니다. 피카소가 그 둘을 소개하지요. 두 사람은 사랑을 불꽃
처럼 하지만 5년을 넘기지 못하고 헤어집니다. 하지만 기욤도 마리도 서로에게
잊히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아폴리네르가 죽은 뒤 로랑생은 38년을 더 살다 가지요. 아폴리네르의 <선물>
이라는 시를 가슴에 품고 영원히 잠듭니다.
우리는 누구나 아폴리네르이고 로랑생입니다. 어긋나는 사람이 더 가슴 아프고
오래 가지 않던가요? 하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어떤 자리에서든 어느 내생에서든
우리는 다시 만날 테지요. 바람 붑니다. 하롱하롱 꽃이 집니다.
다리 위의 행인은 이제 작별을 고합니다. 파리여,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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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국문학자의 아름다운 유럽 여행기였습니다. 한 편의 시 같기도 하고 아름
다운 산문 같은 그의 글은 첨언이 필요하지 않네요.

가슴을 열고 스페인 시골길의 밀밭 오케스트라의 향연을 느껴보시고,
미라보 다리 위에 마음으로 서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지나왔던 인생을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은 흐르고
우리의 마음 속의 추억의 강도 함께 흐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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