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인문 인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헌 서재 Sep 07. 2016

<한국적 인간, 호모 코레아니쿠스>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中

<한국적 인간, 호모 코레아니쿠스> 진중권

--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中


                        강 일 송


오늘은 우리들 자신, 즉 ‘한국인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는 글을 한 번 보려고 합니다.

역사, 정치, 사회, 종교 등의 다각적 시각으로 본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

여러 학자들이 주제를 정해 책을 썼습니다.


오늘은 그중, 진중권 교수의 글이 흥미로워 논해 보고자 합니다.

저자는 익히 알고 있듯이, 서울대에서 미학 학사 및 석사를 받은 후 독일의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미학과 언어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한 번 보겠습니다.


------------------------------------------------


한국인이란 무엇인가, 사실 이 질문 굉장히 어렵습니다.

보통 한국인에게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크게 두 가지 문제에 부딪칩니다.

하나는 “자화자찬”이고 또 하나는 “자기비하”입니다.


먼저 한국인은 우리의 우수성에 대해서 스스로 설파하기를 좋아합니다.

집단적, 민족적 나르시시즘이 강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선진국들과 스스로를 비교하다 보면 한국이 답답해 보일 때가 많고

이때 자기비하적 담론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서구인들은 제3세계 사람들은 같은 인간이기보다는 미개하고 원시적인 동물로

인식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와 함께 서구인들로부터 야만인 취급을 받은

일본인들은 굉장히 열등의식을 갖게 된 후, 이를 보상받기 위해 폭력적으로

급속하게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루게 되고, 자신들 또한 서구인들 입장이

되어 그것을 조선인들에게 투사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이 바라본 조선인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1910년대 이미 서구의 산업화를 마친 일본과 달리 당시 조선은 농경사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 눈에는 더럽거나 게으른 존재로 비춰졌습니다.

아직 농경사회에 머물러 있던 조선인들을 근대화하기 위해 갖춰야 할 두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위생관념”이고 더 중요한 또 하나는 “시간관념”

입니다.


농경사회에서 시간관념은 자연과 더불어 흘러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서두른다고

해서 파종 시기나 수확 시기를 앞당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요.

하지만 산업사회에서는 인간이 움직이는 시간에 따라 생산물의 양이 늘어납니다.

즉, 농경사회는 자연적 속도에 맞춰져 있고, 산업사회는 인공적 속도에 맞춰져

있습니다.  일본의 공장에 취직한 조선인 노동자는 제때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시간관념이 없다 보니 해가 뜨면 그제서야 출근을 했지요. 밭에 김을 매러 나가듯.

하지만 지각을 하면 임금의 절반을 깎겠다는 규칙을 만들자 정시에 출근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신체를 인공적으로 뜯어 맞추는 것을 생체공학이라고 합니다.

산업화 사회에는 산업화에 맞는 신체를 가져야 하고, 자본주의가 작동하려면

인간의 신체를 강제로 개조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산업화가 시작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로 볼 수 있습니다.

박정희는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김일성은 사회주의적 근대화를 진행했습니다.

1950-1960년대 들어 남북한은 본격적인 경쟁을 하는데 이때 양쪽 다 모두

산업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농경적 신체가 산업적 신체로 변화합니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산업화가 민간의 영역에서 일어나기 보다 상당히

군사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남북 다 1960년대에 기계적 신체를 가진

유일한 집단은 군인밖에 없었습니다.  기계와 접촉한 유일한 경험을 갖고 있고

군대는 사회에서 가장 앞선 사회였습니다.

남북한 모두 산업화에 군사 문화를 적극 활용하게 됩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군대식으로 “앞으로 나란히”를 하고 줄을 섭니다.

북한이 매스게임에 강한 이유도 정보화 사회의 진입에 실패하고 과잉으로

기계화된 신체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산업화는 자본주의적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자본주의적 산업화는 철저히

시장 주도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어느 정도 자본주의가 진행되어야 가능합니다.

남한의 자본주의 산업화는 일본의 차관 도입, 베트남 참전, 서독 광부 파견 등

국가 주도 방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진정한 의미의 근대화는 경제적 근대화와 더불어 정치적 근대화가 동시에 이루어

져야 하는데, 정치적 근대화는 실패하고 반쪽짜리 근대화를 이룹니다.

남북한 모두 지배 계층이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실제로 정치적 근대화를

보류한 셈입니다.


1980년대 전두환정권이 들어섰는데, 굉장히 폭압적인 동시에 통금시간 해제나

대학 내 자율화를 시행한 독특한 정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국가 주도 경제가

무너지고 시장 주도 경제 체제로 변화를 합니다.

1990년대 이후에는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갑니다.  국가와 달리 시장은 저항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기업에 대한 저항은 곧 실직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한국은 정보화 사회로 넘어갑니다.  노동인구의 절반 이상이 정보 분야에

종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전에는 신체가 힘들었다면 이제는 마음이 힘든

시대, 즉 감정 노동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산업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넘어간다는 것은 선진국 경제로의 전환을 의미

합니다. 그런데 선진국의 특징은 경제성장률이 하향 곡선을 그린다는 점이며

실제로 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은 1-2% 안팎입니다. 고도성장에서 저성장으로

바뀌는 것이지요.


현 정권이 주장하고 있는 것은 창조 경제입니다. 창조 경제를 위해서는 아래

에서 위로 창의력을 끌어올려주는 구조의 시스템이 구축이 되어야 하는데,

정부에서 지원해 줄테니 대학에서 스티브잡스형 인간을 만들어 보라는 형식이

지금의 형식입니다.

안타깝게도 창조 경제를 표방하면서 산업화 시대의 방식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것이지요.


선진국의 문턱에 진입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변화는 자율적인 시민사회를

통한 경제발전의 지향이며, 자율적인 창조 경제를 위한 사회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의 정서구조에 대해 정리해 본다면

1) 국가주의

2) 시장 만능주의

3) 위계질서

4) 과잉감정

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우리가 세계적으로 디지털 시대의 선구자적 역할을

해온 것처럼, 그런 잠재력을 되살릴 수 있는 사회적 구조와 인성적 구조를

구축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오늘은 우리 스스로가 누구인지 질문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러 방면의 학자들이 답을 하는 식으로 구성된 책이었는데,

진중권교수의 글이 선명하게 들리는군요.


우리가 우리 스스로 한국인을 판단할 때, "자화자찬"과 "자기비하"의 둘로

나뉜다는 저자의 말은 명료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주변의 평에 민감합니다.

예를 들어, 이대호가 홈런을 2개 친 날엔, 어김없이 인기검색어에

"이대호 홈런 일본 반응" 이런 내용이 올라옵니다.

우리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하고 칭찬하면 되는데, 굳이 다른 나라 그것도

일본의 반응을 봐야 속이 풀립니다.


서구인의 입장에서 제 3세계의 사람들을 보는 시각에 대한 글도 분명한

데요, 산업화가 안된 우리의 자연에 입각한 시간관념이 인공적 시간에

맞춰진 산업화 사회의 시각으로 보면 미개하게 느껴졌다 합니다.

남북한의 산업화 경쟁에서 군대문화가 주도를 하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도

무릎을 치게 합니다.

국가 주도의 산업화, 근대화에서 군대문화의 인간형이 가장 적합하였다

싶네요. 그러고 보면 박정희대통령, 박태준포철회장 등이 보여준 리더십은

전형적인 군대적 리더십입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무대뽀 정신" 등이 우리 사회를 이끌었던 정신 문화

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로는 이렇게 빠른 근대화

와 경제발전을 이루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고, 우리 사회가 선진국형의 성숙한 사회가

되었기에 그러한 정신문화가 바뀌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상부에서 하부로 명령하듯 내려오는 전달문화가 아니라 하부에서 상부로

소통이 되는 문화, 자율과 공감, 배려와 소통이 중심이 되는 문화가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필요하고 때가 무르익어야 변화가 됩니다.

이제는 빨리빨리의 문화가 아닌,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고 멀리 보면서

함께 가는 문화가 우리 사회에 필요하리라 생각을 하면서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 통섭(統攝)에 대하여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