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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Sep 07. 2016

< 통섭(統攝)에 대하여 >

< 통섭(統攝)에 대하여 >


                          강 일 송


오늘은 통섭(統攝)에 대하여 한번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요즘 통섭에 대한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에서 많이 들립니다.

특히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사회 전반에 펼쳐지면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학문의 교통, 융합 되는 시대의 흐름에

비추어 통섭이란 용어가 부각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통섭에 대한 학자를 들자면

최재천교수가 있지요. 서울대 동물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

생물학과에서 석사, 박사를 하고 서울대교수를 거쳐 이화여대

석좌교수로 있는 분입니다.

자연과학자이지만 어릴 때부터 문학에 대한 소질과 꿈을 가졌던

그는 인문과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저술로 여러 베스트셀러를

가지고 있습니다.


통섭이란 말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영국의 19세기 자연철학자

윌리엄 휴얼(Wiliam Whewell, 1794-1866)이 처음 언급한

“Consilience"에서 비롯되었다 합니다.  라틴어에서 유래된 이 용어는

“jumping together" 즉 ”더불어 넘나듬“으로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에서

이 말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를 놓고 여러 학자들이 고심을 하다가

“통섭”, “통일”, “통합”, “일치”, “합치” 중 통섭으로 확정했다고 합니다.


통섭은 “큰 줄기”라는 뜻으 통(統)과 “잡다”의 섭(攝)“이 합쳐져 생긴

말로 “큰 줄기를 잡다”라고 의미를 지닙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 분야의 한 우물만 파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학문과의

벽을 허물고 큰 줄기를 알고 학문을 하자는 것이겠지요.


물론 비판적인 학자들도 있습니다.

요즘 대세인 철학자인 강신주박사는 통섭에 대해서 비판적인데, 일단

통섭이라는 용어보다는 “융합”이 본래의 의미가 가깝다는 것이고,

또한 진보적인 인문학자인 그의 입장에서는 통섭을 이야기하는 쪽이

주로 자연과학자들이고, 그들의 입장이 자연과학의 견해에 부합하는

인문학적 영역만 취한다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저의 견해는 원어의 뜻과 정확히 일치함 보다는

큰 의미로서 다가간다면, “큰 줄기를 잡다”의 통섭이 상당히 제대로

된 번역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최재천 교수는 “통섭적 인생”을 우리한테 권하고 있는데, 삶의 태도로서

첫째, “받는 만큼 돌려주는” 자연의 법칙대로 살자입니다. 우리가 겸허히

이 지구위의 자연의 한 존재로서 그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진정

아름다운 삶이라 그는 말합니다.

둘째는, “피카소”처럼 사는 태도라고 합니다. 피카소는 엄청난 다작을 통해

서 성공한 삶을 꾸려왔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시도하면 보면

언젠가는 자신만의 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겁니다.


자연과학자는 인문학을, 인문학자는 자연과학을 스스로 공부하고 이해도를

높인다면, 진리는 결국 통하는 법이므로, 자기 분야에서도 한계에 부딪힌

상황을 타개하고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좌우 날개의 균형이 중요하고, 보수와 진보의 균형, 인문과 자연과학의 균형

이 다 한가지이겠지요.


스스로를 한계짓고 그 안에 성을 쌓고 매몰되는 것이 우리 인생 삶에 있어서

가장 안타까운 일중 하나가 아닐까요?

이 시대의 통섭이라는 말이 하나의 흐름으로 흘러가는 것은, 이러한 자각이

사회내부에서 스스로 일어나서 생겨났을 것이고, 그 흐름에 한번 발맞추어

보는 것도 삶을 살아내는 하나의 재미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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