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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Nov 25. 2020

<고려이야기 – 고려청자, 아라비아상인>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中

<고려이야기 – 고려청자, 아라비아상인>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中

                                         해헌(海軒)

오늘은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읽기 쉽고 재미있게 설명을 해주고 있는 책을
한번 더 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저자인 최용범(1968~) 작가는 서울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를 졸업
하였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습니다. 월간 <사회평론길>에서 취재 기자로
일하다가, 2000년 <월간중앙>에 <역사인물 가상인터뷰>를 연재하면서 역사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고 합니다. 이미 50만의 독자가 선택한 한국사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를 비롯, <역사인물 인터뷰>, <하룻밤에 읽는 고려사>, <만약에 한국사>,
<난세에 간신이 춤춘다> 등 다수의 책을 집필했습니다.

지난 번은 삼별초에 대한 이야기였고, 오늘은 고려청자와 아라비아상인과의 대외
무역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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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청자, 아름다움의 비밀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복원하기 위해 현대의 도예가들과 과학자들이 온갖
노력을 했음에도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중국의 서양식 표기 ‘차이나,China’는 진(秦)나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차이나는 도자기란 뜻도 가지고 있다. 유럽에 수출된 당과 송의 자기가 워낙
뛰어나 아예 나라 이름이 도자기를 가리키는 말이 된 것이다.
그런 도자기의 나라였던 송에서도 고려청자만은 중국의 청자보다 더한 명품
이라고 평가했다.

송의 태평노인은 <수중금(水中錦)>에서 “건주의 차, 촉의 비단, 정요 백자,
절강의 차, 고려비색 등은 천하의 제일로, 다른 곳에서는 따라하려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라고 기록하여, 천하제일 명품 열 가지 중에서
고려청자를 꼽았다. 태평노인 말고도 같은 시기, 고려에 왔던 서긍의 고려
견문기 <고려도경>에서도 고려청자의 우수성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다. 영국의 동양도자기 전문가인 윌리엄 하니는
“고려도자기는 독창적일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지금까지 만든 것 가운데
가장 우아하며 꾸밈새 없는 도자기이다. 그것은 도자기가 갖는 모든 미덕을
갖추고 있다. 사실 이 고려도자기는 중국인조차 거의 도달하지 못했던
높은 경지에 이르고 있다.”며 최상급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청자는 원료 혼합에서 반죽, 성형, 초벌구이, 유약 바르기, 재벌구이 등
24단계 70일 간의 제작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고려청자는 이런 제작
과정을 다양하게 변화해,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아무 장식
없는 순청자에 돋을새김을 하는 양각청자, 반대로 꽃이나 풀을 새겨 넣는
음각청자, 유약을 바르기 전 붓에 철분 안료를 묻혀 무늬를 입히는 철화청자
등등 무늬를 새기는 데 가능한 방법을 다 동원했다. 형태에서도 벽면을 뚫어
모양을 만드는 투각, 사람이나 동물의 형태를 본떠 만드는 상형, 등의
여러 가지 방법을 썼다. 흙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동원한 셈이다.

이런 기법적인 실험이 최고의 결과를 보인 것은 12세기 후반의 상감기법이다.
청자상감은 그릇의 표면에 새김칼로 무늬를 파고, 파놓은 부분에 백토나
흑토를 메워 넣은 후 청자유약을 발라 구운 것이다. 이렇게 구운 청자상감은
푸른 바탕에 검붉은 색이 은은하게 비치는 신비의 색감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제작 과정을 안다고 해서 고려청자를 복원할 수는 없다. 과학자들이
최신기술을 동원해 복원을 하였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이종호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은 “도예공이 청자 색깔이 나오지 않자 몸을
던졌다는 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청자 가마에서 인신공양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상감청자에는 이전의 고려청자에 없었던 인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인신공양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목숨을 건 각고의 실험 끝에
신비한 색이 나왔던 것이다.

★ 한국이 코리아로 불리게 된 이유

고려는 대외교역을 활발히 했던 통일신라의 뒤를 이어 무역 활동이 성한
나라였다. 더욱이 고려의 창업자 왕건은 원래 무역에 종사하던 개성상인의
후예라, 개경을 건설하면서 수도 중심에 대규모 상가를 건설하기도 했다.
정부는 상업과 대외교역에 힘을 실어 주었다. 자, 말, 저울 등 도량형의
규격을 통일하고, 숙종 때는 해동중보, 삼한통보, 해동통보나 은병과 같은
금속화폐를 유통시키기도 했다.

개성 부근 예성강변의 벽란도가 바로 고려의 대외무역이 이루어진 국제
무역항이었다. 개성상인들은 주로 송나라 상인들과 거래했다.
송 상인들은 물건을 싣고 벽란도에 도착하면 먼저 왕에게 물건을 바쳤다.
그러면 왕이 일종의 답례품으로 물품을 주었다. 이를 ‘사헌무역’이라고 한다.
왕실과 거래가 끝나면 송 상인들은 개경의 시장에 내놓았다. 그리고 송으로
가져가 팔 물건들을 샀다.
이들이 가져온 물건은 비단, 차, 약재, 서적, 악기가 대종을 이루었다.
이외에도 향로, 향목, 칠기, 남방의 과일, 물소뿔, 상아, 비취, 마노, 수종,
호박과 같은 이국적인 물품도 있었다. 이런 물품들은 대개 귀족층이 소비했
는데, 재상가에서는 공작이나 앵무새까지 사들여 키웠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이들이 고려에서 사들인 것은 삼베와 인삼, 모시 같은 고려의 특산물이었다.
특히 인삼은 뛰어난 약효를 인정받아 앞을 다퉈 사들인 물품으로 많은 이문을
남겼다. 이외에도 종이, 먹, 연적, 돗자리, 부채, 나전칠기 등의 수공예품도
사들였다.

요, 금, 원, 일본 등의 상인들도 벽란도에서 무역활동을 했다. 특기할 만한 상인
으로는 대식국의 상인들이었다. 1024년(현종 15년)에 왔던 대식국 상인이란 바로
아라비아 상인을 말하는데, 이들은 1040년에도 와서 향료, 수은, 몰약을 바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서역과의 이러한 지속적 교류를 통해 우리나라는
‘코리아’란 이름으로 서방에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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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한국사 중에서 고려의 고려청자와 우리나라가 코리아라고 불리게
된 연유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았습니다.

먼저 고려청자에 대해서 보면, 사실 모든 도자기의 원형은 중국이었고 중국의
도자기는 수백 년간 유럽으로 수출되어 유럽 왕족이나 귀족의 애호를 받았지요.
독일의 마이센 가마에서 유럽 최초의 자기가 탄생되었는데 연금술사 뵈트거가
만들어내었고, 이후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현재도 마이센 자기는
명품에 속한다고 합니다.

어찌하였든 중국의 자기는 엄청난 존재였는데, 이를 유일하게 넘어선 자기가
고려청자였습니다.   물론 고려가 처음부터 청자를 만들었다기 보다는 송나라
기술이 먼저 도입이 되었고, 이후 이를 개량하여 최고의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지
요.  현대 기술로도 이를 온전히 재현하기는 힘들다고 하고, '인'이 포함된
것으로 미루어 인신공양도 추측하긴 하지만 정설은 아닙니다. 어쨌든
목숨을 걸 정도로 각고의 노력이 포함된 것은 맞습니다.

두번째는 고려의 무역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개성상인의 피를 이어받은 고려
태조 왕건은 무역을 장려하였고, 송나라, 거란, 일본 등과도 교류를 하였고
심지어 아라비아 상인인 대식국 상인들까지도 있었습니다.
이 당시 이슬람 상인은 아시아에서 유럽까지 넓은 지역을 아우르고 있었고,
이후 세계 최강의 몽골군과 함께 공생하는 사이였지요.
고려를 오고가던 이슬람 상인에 의해 우리 국호가 '코리아'로 알려졌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더 역사를 거슬러가서 과거의 유적을 보면 이미 기원전 2세기부터 동남아시아,
남중국, 동중국, 한반도, 일본을 잇는 해상 실크로드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그 당시 고대 사회의 고가의 해상교역품이었던 유리구슬이 무역을 통해
교류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AD 2-3세기의 마한 고분에서 인도,태평양 유리
구슬이 수만 점이나 다량으로 출토가 되었고 이를 통해 과거의 무역 역사를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합니다.

역사 이야기는 이처럼 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데,  유럽의 르네상스를 일으키고
유럽의 근대 경제를 발전하는데 큰 역할을 한 이슬람 상인들이 이미 우리의
고려에까지 진출하여 교류를 하였다는 사실은 역사공부의 재미를 느끼게
해줍니다.

다음에는 다른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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