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헌 서재 Aug 23. 2016

<하버드 고전수업, 역사❶> 윌리엄 앨런 닐슨

-- 열린 인문학 강의 中

오늘은 전 세계에서 100년간 읽힌 고전 공부의 입문서인 책을 한 권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반 교양인들을 위해 하버드 교수진들의 강의를 모은 인문학책으로 “하버드 고전” 총서 50권을 만들었고, 이 중 명강의를 모은 책입니다.

저자는 “하버드 고전” 편집 총 책임자인 윌리엄 앨런 닐슨(1869-1946) 교수입니다. 이 책은 100년간 전 세계에서 애독서로 읽혀왔다고 합니다. 그중 오늘은 역사 파트의 내용을 한 번 보겠습니다.

100년 전에 쓰인 글들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으시면 도움이 되시리라 생각이 듭니다.






<열린 인문학 강의>, 윌리엄 앨런 닐슨 지음, 유유.


. 역사의 실질적인 범위는 약 3천 년에 이르는데, 지금부터 기원전 1000년까지인 셈이지요. 그 범위를 넘어서면 고고학의 파편으로 추정해야 합니다. 아주 오래전에 이집트와 유프라테스 강 유역, 그 밖의 다른 지역에서 상당한 규모의 군주정이 융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고대 문명들의 흔적을 후대에 전한 것은 이들 자신이 아니라 떠돌아 다니던 아리안계 부족들이었는데, 당시에는 교육받지 못해 무지하고 세상에도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이 부족들은 볼가 강과 드네프르 강, 다뉴브 강 유역의 대평원들을 지나 마침내 발칸 반도와 이탈리아 반도까지 이르렀지요. 바다에 가로막혀 더 전진할 수 없었던 그들은 그곳에 정주했고, 오랜 세월이 지나 도시들을 형성했는데, 그중에서 아테네와 로마는 훗날 최고의 명성을 누리게 됩니다.

어둠을 뚫고 나온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셈족에 속하는 유대인은 호메로스의 작품에 필적할 만한 것들을 창조하고 있었습니다. 지중해와 서구의 역사를 한 번 따라가 보겠습니다.


◉ 그리스의 리더십

처음에는 나일과 유프라테스라는 거대한 강이, 나중에는 서쪽으로 대서양까지 뻗어 있는 거대한 지중해가 상업과 사치, 문명의 통로였습니다. 티레, 포카이아, 카르타고, 마살리아에서 초기 상업을 주도했는데, 이 도시의 상인들은 전투적인 아리안족에게 동서양의 물품뿐 아니라 언어, 즉 알파벳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리스인은 알파벳으로 서구 문명 전체에 깊은 흔적을 남긴 탁월한 문학을 창작했습니다. 그들은 초기 전설들을 호메로스 서사시의 우아한 운문으로 엮어냈고,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의 음울하고 통절한 비극으로 그려냈습니다. 역사 영역에서 투키디데스는 위대한 걸작을 썼고, 헤로도토스는 더없이 유쾌한 이야기를 썼지요. 철학영역에서 그리스인은 가장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가 저물 무렵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제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대에 그리스는 활력을 잃고 쇠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지중해부터 인도에 이르는 거대한 그리스 제국을 세웠지요. 그의 사후에 이 제국은 여러 군주국, 즉 동방의 그리스 왕국들로 분열되는데 가장 오래 살아남은 것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입니다.


◉ 로마의 지배

이후 아리안족의 좀 더 서쪽 갈래에 속하는 로마인이 서서히 패권을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기원전 200년경에 카르타고 세력을 무너뜨리고 지중해 서부를 장악했으며, 그런 다음 갑작스레 지중해 동부로 손을 뻗쳤습니다. 그 뒤 로마는 2백 년도 지나지 않아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 이집트를 정복했고, 지중해는 로마의 호수가 되었습니다.

로마라는 도시의 기원은 기원전 1000년까지 소급되고, 공화국의 전설과 역사에 대한 사실들은 기원전 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로마인은 그리스의 문명과 언어를 접한 후에야 문학적 표현을 발견했습니다. 로마인의 언어에는 그리스어의 융통성과 조화로움이 없었고, 어휘도 풍부하지 않았을뿐 아니라 추상적인 용어도 없었습니다. 로마인의 언어는 간명하고 장중했기 때문에 법률가와 행정가의 의사 전달 수단에 더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외국 정복과 그리스 문명의 영향 아래서 그들의 문학을 빠르게 발달시켰습니다.

비대해진 로마공화국이 제국주의 국가로 전환되던 바로 그때, 라틴어와 그리스어는 지중해 세계의 양대 공용어였습니다. 그리스의 대학이었던 아테네와 페르가몬, 알렉산드리아는 지성주의의 여러 흐름을 좌우했고, 황금기 그리스 대가들에게서 파생된 비평과 철학에 탁월성을 부여했습니다.


◉ 유대인의 기여

유대인의 역할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고대에 벌어진 사회적, 정치적 성격을 되짚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의 시대에는 국가라고 해봐야 규모가 작았고 대개 도시이거나 도시의 집합체였습니다. 전쟁은 그치지 않았고 이때 노예제도 함께 생겼습니다. 점차 전쟁의 규모는 커졌고 횟수도 많아졌습니다.

사회 불평등은 고대 세계를 정의하는 근본 개념입니다. 처음부터 그리스 도시는 혈통 좋은 소수 세습 계급이 통치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사회적 위계 질서는 이들로부터 맨 아래의 노예층까지로 짜여 있었고, 전쟁은 노예층을 토대로 이루어졌으며, 승리한 자들이 패배한 자들을 손에 넣었습니다. 로마는 그리스 군주국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는데, 이 전쟁은 거대한 보물찾기였고 노예몰이 사업이었습니다. 로마는 거대한 지중해 국가를 건설했으나 로마가 세운 문명에는 공허한 형식주의만 있고, 종교도 영혼도 없었습니다. 이 결함을 치유한 것이 유대인이었습니다.

경제가 번영하는 시기에는 자연스럽게 유물론과 쾌락주의가 나타났습니다. 종교는 형식적이었고 최악의 경우에는 퇴폐적이기까지 했으며 윤리적인 요소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로마 제국 동부의 도시에서 유대 상인들은 영적 믿음, 진지함, 도덕성을 겸비한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로마인을 개종시킨 바울은 넓은 시야와 선교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지요. 알렉산드리아의 사상이 기독교라는 주형에 부어짐으로써 이 새로운 종교에 독특한 교리 체계가 만들어집니다.

로마제국은 점차 허술해져 갔습니다. 전쟁은 용병의 차지가 되었고, 물질주의와 불경함, 비겁함이 유행하게 됩니다. 이제 로마 제국의 체제로는 방대한 조직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었습니다. 무능한 황제가 줄을 이었고 황제의 왕관은 전리품처럼 수많은 경쟁자들에 의해 나누어졌습니다.


◉ 로마의 기독교화

서기 312년 그러한 투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로 개종하게 됩니다. 실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어찌하였든, 그의 행보가 정치적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교 숭배가 대다수 민중을 사로잡고 있었지만, 행정가와 상인, 지위와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를 많이 믿게 되자 그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하여 오랜 투쟁과 박해를 받은 끝에 기독교는 돌연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배타적이었고 그러한 기독교의 수장은 황제였습니다. 모든 시민은 기독교에 순응할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하지만 민중은 고대의 신, 고대 사원, 고대 의식에 집착했습니다. 단번에 이런 구습을 쓸어버리는 것은 불가능했지요. 타협이 이루어졌습니다. 사제와 사원, 의식, 조각상은 잔존했지만 기독교의 관념이 그안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 로마의 몰락

빠르게 몰락하는 제국인 로마에, 이미 숨결을 불어 넣기엔 늦은 시기에 기독교가 로마에서 공인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만들면서 이 도시를 절반은 로마적으로, 나머지 절반은 그리스적으로 만듭니다. 불길한 조짐은 국경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유턴족인 계속 압박을 가했고 게르만족이 라인강과 다뉴브강 안을 무력 으로 강탈해 갔습니다. 드디어 375년에는 게르만족 대이동이 있었고 410년에는 서고트족이 로마를 약탈했습니다.

게르만인은 거칠고 전투적이었지요. 섬세하고 평화적이었던 라틴인은 정복의 폭풍이 휩쓸 때 수도원에서 안전을 도모했습니다. 라틴 성직자들은 쉽게 믿는 단순한 게르만인의 성향과 미신을 알아채고는 그들 앞에 기독교의 숭고한 이상과 윤리를 내놓았습니다. 라틴 성직자들은 종교를 통해 게르만인을 사로잡았고 그들 자신이 게르만 왕국들의 행정가, 법률가,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뚜렷한 변화를 겪은 로마 문명은 기독교와 튜턴 정신을 주된 요소로 가진 혼합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이익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물질적으로는 막대한 부가 파괴되거나 흩어졌고, 제국의 소통 체계가 무너졌습니다. 상인들은 더 이상 지중해에서 안전을 보장받지 못했습니다. 로마의 대로들은 파괴되고 국경선에서 과거의 교류 경로들이 막혔습니다.





오늘은 하버드 인문학 교수들의 특강 중 서양 역사에 관한 내용을 살펴 보았습니다. 100년 전에 쓰여진 글이고, 이후에도 역사의 서술에 변화가 있고 고증이 더 된 부분들이 많아서 현대에 바라본 역사의 시각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을 감안해서 보아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서양에서 볼 때 그 당시 오리엔트였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가 인류 문명의 기원을 이루었고, 이후 떠돌던 아리안족들이 이를 이어받아 그리스, 로마 문명을 이룩합니다. 서양 문명의 두 축인 그리스로마문명과 기독교 문명 중 그리스로마 문명은 이렇게 시작이 되었고, 그 다음 유대인들이 등장합니다.

로마가 절정을 향해 전성기를 누릴 때, 그들은 로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로마가 쾌락과 물질주의, 퇴폐주의에 물들 때, 그들은 새로운 질서와 윤리의식, 체계를 로마에 부여합니다. 결국 행정가와 상인, 유력한 세력들이 기독교를 믿게 되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받아 들여서 새로운 통치기반으로 삼게 됩니다.

하지만 해는 기우는 법, 지지 않을 태양처럼 번성하던 로마도 저물기 시작합니다. 용병으로 활동하던 게르만인들이 황제에 오르기까지 하고 훈족의 압박에 밀린 게르만인들이 남서진하면서 결국 서로마제국은 멸망을 합니다. 비잔틴 제국인 동로마제국은 1000년을 더 존속되지만, 이전의 로마와는 전혀 다른 제국이 되지요.

이후에는 전에 한번 말씀드린 책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의 내용이 이어지게 됩니다.

다음에 2편을 한번 더 이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철기와 말(馬)의 제국> 다니엘 R 헤드릭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