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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Sep 12. 2016

<역사의 가혹한 반복, 왕자의 난>

시사에 훤해지는 역사 中

<역사의 가혹한 반복, 왕자의 난>  남경태
- 시사에 훤해지는 역사 中

                          강 일 송

오늘은 역사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양이나 동양 구분 없이 왕조에서는 혈통이 중요합니다.  역성혁명이 아닌
이상 왕위는 대체로 장자 위주로 내려오는 것이 전통이었지요.
하지만 권력 앞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법이라, 왕위를 놓고, 부자간, 형제간,
삼촌과 조카간 등의 골육상쟁이 역사에는 무수히 많습니다.

오늘은 동서양 막론하고 벌어진 역사의 분쟁들 중, 왕자의 난과 관계하여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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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과 경제에서 혈통을 중시하는 경향은 서양 사회보다 동양 사회가 훨씬
강하다.  북한의 정치적 혈통 전수와 남한의 대기업 혈통 전수를 본다면
알 수가 있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사실 국가든 기업이든 지배자
라면 동,서양을 불문하고 누구나 혈통적인 지위 세습을 절실하게 원할 것이다.
험한 세상에 피붙이만큼 믿을 수 있는 후계자가 또 어디 있겠는가?

서양에서는 혈통이 큰 역할을 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었다. 왕이라 해도 일부
일처제가 엄격히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한 명뿐이므로 아들을 낳지
못하면 혈통 계승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팍스 로마나를 이끈 로마제국의
5현제가 양자 상속제로 왕위를 계승시킨 것이 대표적인 사례지만, 중세에도
교회법에 따라 일부일처제를 철저히 지켜야 했다. 

그에 비해 동양왕조는 합법적으로 축첩이 가능했으므로 가문의 혈통이 끊기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렇다면 동양의 왕조는 서양의 왕조에 비해 권력 계승이
안정적이었을까? 언뜻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여겨지지만 여기에는 큰
부작용이 있다. 계승권자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혈통이 끊기는 것
보다 더 심하게 권력 안정을 해치는 요소가 된다. 
서양의 역사에서 보기 드문 왕자의 난이 동양의 역사에서 잦았던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왕자의 난은 대개 새 왕조의 건국자가 죽은 직후에 벌어진다. 
건국자는 강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종신토록 절대 권력을 유지하지만, 문제는 
그가 죽고 난 이후이다. 맏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대개 맏아들쯤 되면 자기 아버지가 나라를 세울 때 장성한 아들
로서, 늘 보조 역할을 하였다. 더구나 개국 공신들 중에는 왕자가 되기 이전부터
아저씨나 삼촌처럼 섬겼던 아버지의 부하들이 수두룩하다.  이 상태에서 카리스마
는 생겨나기도 어렵고 있다 해도 정치적 의도로 무시되기 십상이다.

우리 역사에서 왕자의 난은 고려 초와 조선 초에 있었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건국 과정에서 지방 호족들과 정치적 통혼을 많이 한 탓에
스무 명이 넘는 왕자들을 남겼다.  왕자들의 힘은 곧 외가들의 힘이었다.
왕건이 죽자 일단 서열에 따라 맏아들 왕무(혜종)가 왕위에 오르지만, 고려 건국
전 결혼했던 어머니 집안은 세력이 약했다.  늘 권력 불안에 시달렸던 혜종이
3년을 채우지 못하고 서른 세 살로 병사하자(암살의 가능성도 다분하다.) 그의
어린 아들들은 왕위계승에서 당연히 배제된다.  
그 대신 왕건의 다른 아들들, 그중에서도 당대의 유력 가문이었던 광주 세력과
충주 세력 간에 권력 쟁탈전이 벌어졌고 여기서 충주 세력이 승리를 거둔다.
이후 이 가문의 형제지간인 정종과 광종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고려의 왕통은
안정을 찾아간다.

그런가 하면, 조선 초 왕자의 난은 아예 초장부터 피비린내 나는 살육극으로
진행된다.  태조 이성계는 장성한 여섯 아들의 권력다툼을 피해 그 아들들을
배제하고 둘째 아내에게서 얻은 어린 두 아들 중 맏이를 세자로 책봉하는
무리수를 둔다.  여기에는 조선 건국의 총 감독이자 자신의 브레인이었던
정도전의 권고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정도전은 사대부가 실권을 쥐는
유교 왕국을 꿈꾸었으니까.  

그러나 야심가였던 다섯째 아들 방원은 그 참에 정도전을 제거하고 이복동생
인 세자마저 살해한다. 이에 환멸을 느낀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나자 방원은
일단 형제들 중 서열이 맨 위였던 방과에게 왕위를 계승시킨 뒤 그 뒤를
이어받아 결국 왕위를 차자하고야 만다. 

중국의 왕조도 마찬가지다.  진시황이 죽자 승상이 태자를 죽이고 다른 왕자
를 즉위하게 한 사건,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이 죽자 여태후가 집권해 11년
동안 두 왕을 갈아치우고 자기 동생을 즉위하게 한 사건이 예고편이라면,
당나라 초기 왕자의 난은 본편이다. 
당의 건국자 이연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동안에 둘째 아들 이세민이
형과 아우를 죽이고 왕위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으니 그 점에서 700년
뒤에 등장하는 조선 이성계의 한참 선배다. 

14세기 초 명나라 초기에도 역사의 시계추는 어김없이 되풀이된다.  명의 
건국자인 주원장은 무엇보다 개국 초기에 왕권의 안정이 절실했다.
그래서 철저하게 장자 계승을 관철하기 위해 맏아들을 태자로 삼고 나머지
아들들을 모두 변방으로 내쫓았다.  하지만 태자가 자신보다 먼저 죽는 것은
그의 계산에 없었다.  주원장이 죽자 일단 손자가 건문제로 제위를 계승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멀리 베이징으로 밀려나 있던 삼촌 주체가 반란을 일으켜
조카의 제위를 찬탈했다.  그가 바로 영락제인데,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차지한 조선의 세조의 50년 선배에 해당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렇게 왕자의 난에서 승리해 야망을 달성한 권력자들이
하나같인 집권 후에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고려의 충주원군(광종), 조선의 이방원(태종), 당나라의 이세민(태종), 명나라의
주체(영락제)는 모두 아버지가 세운 나라를 반석에 앉혔으며 제 2의 건국을
완성했다. 

당태종은 “정관의 치”로 역사에 널리 알려졌고, 명 영락제는 남해 원정을
전개했으며 중앙권력을 안정시켰다. 또 고려 광종은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를
시행했으며, 조선의 태종은 중앙과 지방의 행정제도를 완비하고 호패법과
신문고 같은 제도를 도입했다.

왕자의 난은 역사 속의 사건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에도 되풀이되고 있다.
북한 정권은 3대째 세습되고 있고, 삼성과 현대, LG, SK 같은 남한의 재벌
기업들은 왕자의 난을 겪었거나 앞두고 있다.  혈통을 중시하는 낡은
전통이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도 왕자의 난은 언제든 재점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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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역사이야기 중 왕조의 혈통 전수와 왕자의 난 위주로 해 보았습니다.
역사는 늘 흥미진진합니다.  특히 왕자의 난을 비롯한 왕권 창출과 그 전개
과정은 TV사극의 단골주제입니다.  최근에도 이방원과 정도전에 대한 
드라마가 있은 걸로 압니다.

서양은 왕이라도 일부일처제가 유지되어(사실 형식은 그렇지 내용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공식적으로 혈통이 연결되지 않아 여러 군데서 찾아 조카나
먼 친척이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동양은 오히려 왕자들이 수십 명씩 되어 경쟁이 심각해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았지요.
물론 강화도에서 농사짓던 철종이나, 철종이 후사가 없자 왕위에 오른 고종
같은 왕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건국자인 아버지에 이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위를 얻은 
왕들은 카리스마가 있고 능력이 뛰어나 나라를 탄탄한 기반위에 올려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십 명 왕자들 중 경쟁심이 뛰어나고 야망이 크며 형제
들까지 제거할 정도의 대담함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당나라 태종, 명나라 영락제, 고려의 광종, 조선의 태종 등이 본문에 예로서
나오고, 여기에는 빠졌지만 청나라 태종(홍타이지) 또한 건국자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에 이어 몽골을 정복하고 조선을 침공하여
인조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안깁니다.

북한은 정치적으로 3대째 세습을 하고 있고, 남한은 재벌들이 3대째 세습을
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리고 혈통세습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는 한 언제든 왕자의 난은 재현가능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시끄러웠던 롯데의 장,차남의 대립도 왕자의 난과 유사한
의미라고 보면 될것 같네요.

역사는 늘 흥미진진합니다.  수천 년 전의 역사가 현대에 와서도 그대로
반복이 됩니다.  그래서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고, 현재와 미래를 말해주는
거울과도 같나봅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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