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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Sep 13. 2016

<우리는 왜 정의를 기대하는가>

김대식의 <빅퀘스천> 중


<우리는 왜 정의를 기대하는가> 김대식

김대식의 “빅퀘스천” 中

       


                 강 일 송        


     

오늘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뇌과학자 중 한 명인 KAIST 김대식 교수의

<빅퀘스천>중 하나의 주제를 더 선정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지난 번에 두 가지 주제를 이미 말씀드린 적 있었습니다. “인간은 무엇을

책임질 수 있는가”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였지요.

     

오늘은 “정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우리 시대에 “정의”

라는 가치만큼 사회적 공감과 논의가 많이 이루어지는 주제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최근 수년 간 정의에 대한 관심이 높았었습니다.

특히 마이크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그 붐을 이끌었습니다.

     

오늘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지적 거인인 김대식 교수의

정의에 대한 견해를 들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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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겨우’ 10만 부 팔린 마이크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서

는 100만 부 이상이 팔렸다. 샌델은 한국에서 그 어디에서보다 많은

강사료를 받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강연을 하고 다녔다.

이유야 어쨌든 ‘경제 민주화’, ‘재벌 때리기’, ‘빈부격차’가 주요 헤드라인인

한국 사회에서 ‘정의’는 여전히 중요한 이슈다.

     

2008년 <슬럼독 밀리어네어>라는 영화가 인기를 끌었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뭄바이 쓰레기장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보며 불쌍해

하거나 분노하거나 우울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들 무엇에 화가

난 것일까?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쓰레기장에 산다면?  애초에 우주 그

자체가 쓰레기장이라면? 쓰레기장에 산다는 사실에 화낼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은하수 한구석에 처박혀 평생 지구라는 돌덩어리와 중력의 힘에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분노하게 만들지 않듯 말이다.

쓰레기장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이유는 어딘가 수영장에서 물놀이하고

있을 부촌 아파트의 다른 아이들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중한 무엇을 빼앗은 사람에게 분노하고 정의를 요구한다. 어렵게

장만한 집이나 차를 훔친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 우리에게 정의이며,

단 하나뿐인 목숨을 빼앗은 자에게 정의라는 이름으로 그의 목숨을 요구하

기도 한다. ‘눈에는 눈’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의 설득력은 여기서 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에게 무한의 목숨이 있다면 어떨까? 나를 살해한

사람과도 마치 나의 수많은 머리카락 한 가닥을 뽑은 사람에게 대하듯

즐겁게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지각 능력이 없는 존재들만 있다면 ‘정의로운 세상’은 무의미하다.

돌맹이와 지렁이 사이에는 ‘정의’라는 단어가 필요 없다.  우주에 나 혼자

존재하거나 존재하는 모두가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면, 역시

‘정의’는 무의미해진다.

정의는 인지, 감정, 기억을 가진 사람들끼리 한정된 무엇을 나눌 때 느끼는

분배 패턴의 정당성이지 나누는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럼 어떻게 나누는 것이 정의로울까?  생산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n분의 1로 나누거나, 각자 필요한 만큼 가져갈 수 있도록 한다고

생각해보자.  토머스 모어(Thomas More)의 <유토피아>에서나 볼 수

있는 이런 이상적 패턴을 마르크스는 경제학으로 뒷받침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더 열심히 일하려는 인센티브가 희미해지고, 내가

소유한 재능과 노동력을 통해 생산한 것들을 노력을 투자하지도 않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나누어야 하는 짜증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프루동(Proudhon,1809-1865)처럼

어차피 ‘개인 소유’란 불가능한 개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내가 소유한 재능은 부모에게 물려받거나, 교육을

통해 얻었거나, 책에서 얻은 것이다.  다른 사회 구성원들이 매번 연관된

덕분에 나의 재능과 노동력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사용하는

기계나 땅 역시 독립적으로 무에서 창조한 것이 아니다. 사회의 도움을

받아 생산되는 그 무엇도 특정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다.

그 누구도 사회로부터 100% 독립적인 소유를 주장할 수 없다는 그의

생각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개인의 ‘모든 재능과 시간’이 사회 구성원

들의 동일한 공헌을 통해 가능해진다는 주장 역시 일방적인 생각이다.

     

한편 자유론자 노직(Robert nozick,1938-2002)은 개인의 절대적인 소유

를 주장했다. 노직은 정의와 분배 패턴의 상호관계 자체를 부정한다.

노직에 따르면 합법적으로 얻은 자원에 내 재능과 시간을 투자해 생산한

결과물은 내가 온전히 소유하거나 시장에서 정당한 가격을 받고 교환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목적을 위해서라도 동의 없이 나라에서 가져가는

세금은 개인의 재능과 시간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정부에서 가져간 만큼의 재능과 시간을 나는 사회에 무료로 헌납하는

것이고, 동의 없는 재능과 시간의 헌납은 노예나 하는 짓이므로 모든

세금은 결국 ‘노예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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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우리나라는 그 어떤 나라보다

평등, 공평에 대한 의식이 높은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을 봐도 그러하지요.

당연히 그런 풍토에서는 ‘정의’에 대한 관심이 높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정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 그 바닥부터 흔드는 말들을 내놓습니다.

예를 든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 쓰레기장에 사는 아이들을 보고 보통은 분노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쓰레기장에 산다면, 애초에 우리가 사는 지구가 쓰레기

장이라 한다면 분노가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비교할 대상이 있기에 우리는 정의를

이야기한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쓰레기장에 살아서 생기는 분노보다, 무한히 큰 우주에서 한쪽으로 밀려 있는

은하수에서 거기에서도 주변부의 지극히 작은 돌덩어리 별 지구에서 중력이라는 인력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잠시 존재하다 떠나는 사실에 몇 배나 더 분노해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만일 우리의 목숨이 머리카락수만큼 많다고 한다면 살인죄는 아주 가벼운 경범죄에

지나지 않겠지요?

결국 정의는 한정된 자원을 분배할 때 느끼는 정당성 그 자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자원을 n분의 1로 나누는 것이 정당한가, 필요한 만큼 더 가져가는

것이 정당한가.  여기에서 개인들의 경험과 사고의 방식에 따른 차이가 발생합니다.

어떤 이는 노력한 사람과 노력하지 않은 사람이 똑같이 나누어 가진다면 절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경제나 사회의 향상은 기대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또 어떤 이는 분배가 공평히 하여서 얻는 사회나 조직의 안정성의

확보의 이익이 그 부작용보다 크다고 합니다.

     

개인소유를 극단적으로 금해야 한다는 사회주이자 프루동과 세금까지도 착취이며

개인의 소유를 무한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노직의 주장을 소개합니다.

이 두 가지 시각은 오랜 세월을 이어서 대립하고 경쟁해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정책은 어느 쪽이든지 큰 문제

가 역사적으로 발생해 왔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사회는 참 다면적이고 다양한 군상이

모여 있는 집단입니다.  하나의 사상이나 제도가 모든 인류를 다 만족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자본주의도 수정자본주의를 통해 그 오류를 보완하려고

하고,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시장의 기능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정의’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은, 역으로 그 구성원들이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사회의 발전 단계상 기본적인 먹고사는 의식주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되고 다음 단계의 욕구가 부상했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오늘 이 내용이 “정의”에 대한 완벽한 모든 것을 전해주지 못할지라도

스스로 ‘정의’에 대한 화두를 던져보고 함께 생각하고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갖게 했다면 큰 의미가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추석이 다가왔습니다.

즐거운 명절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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