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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Sep 17. 2016

<중세 4대 발명의 엇갈린 운명>

시사에 훤해지는 역사, 中


<중세 4대 발명의 엇갈린 운명>
-- 시사에 훤해지는 역사 中

                        강 일 송

오늘은 “모든 시사의 배후에는 역사가 있다”라고 말하는 저자의 책을
한 번 보려고 합니다.

저자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였고, 역사와 철학 등에 대한 여러
책을 썼고, 번역에 힘쓰고도 있다 합니다.
지금도 신문을 자주 장식하는 대표적인 분쟁지역인 팔레스타인과 발칸
지역의 “시사적 현안”도 그 근원을 찾다보면 결국 “역사”에 맞닥뜨리게
되니, 시사와 역사의 관계는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중세 4대 발명과 관련된 내용을 한 번 보겠습니다.
내용이 방대하여 이 책은 몇 번 나누어 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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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와 호랑이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누구나 어릴 때 한 번은 품어
봤을 의문을 역사에 대입해 보자. 과거에 동양과 서양이 한 판 붙었다면
과연 어디가 이겼을까?  유치한 의문이지만 적어도 사자와 호랑이의
싸움보다는 명확하다.

일단 직접적인 싸움이라면 군사력이 중요한데, 화기가 주력 무기로 자리
잡게 되는 15-16세기 이전까지, 서양은 동양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병력의 차이가 컸다.  
고대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는 4만 명에 불과했고, 17세기 30년 전쟁에서
활약한 발렌슈타인의 군대는 겨우 5만 명이었다.
그에 비해 7세기에 고구려 원정에 나선 수나라 병사는 150만 명의 병력에
함선 3천 척의 어마어마한 군대였으며, 13세기 몽골군대도 20만 명에
달했다.

군사력을 뒷받침하는 경제력도 마찬가지다. 우선 경제력의 근간인 인구의
차이가 확연했다. 14-15세기 유럽의 총인구는 약 3천만 명이었던 반면
동양은 중국의 인구만 해도 그 두 배였다.
봉건제 유럽의 장원에서 2포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3포제가 개발되었을
무렵 중국에서는 펌프를 이용해 고지대의 논에 물을 댔고 모내기 농법과
전보다 빨리 익는 신품종 벼가 개발되었다.

군사력이나 경제력보다 더 중요하고 큰 차이는 문화 부문이다.
중국의 4대 발명품이라고 알려진 종이, 인쇄술, 화약, 나침반은 모두 유럽
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  확실한 정설은 없으나 일반적으로 아라비아를
통해 유럽으로 전해졌으리라 추측한다.
하지만 동양은 그것들을 발명하기만 했을 뿐 널리 사용하지는 못했다.

화약은 10세기에 중국에서 처음 발명되었을 때, 불꽃놀이나 폭죽의 용도로
사용되었지만 점차 발달하면서 무기로서의 용도로 쓰이게 되자 점차
화약 제조법을 비밀로 규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결국 실크로드를 통해 아라비아로 전해졌고, 14세기 초에 아랍인들은
화약을 활에 재어 발사하는 화살총을 만들었고, 이 기술이 유럽에 전해지면서
총포와 대포가 개발되기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이 사용한 조총은 바로 포르투갈 상인들에게서 전수받은
신무기였으니, 말하자면 동양에서 개발된 화약이 지구를 돌아 동양의 목줄을
겨누게 된 셈이다.

동양과 서양의 이러한 역전 과정을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종이와 인쇄
술이다.  종이가 도입되기 전 유럽에서는 양피지를 사용했는데, 양이나 송아지
가죽을 무두질해 만드는 양피지는 재료도 비싸고 가공도 무척 힘들었다.
인쇄술이 없던 시절 중세의 수도원에서는 값비싼 양피지로 성서와 고전 문헌
들을 필사했다. 12-13세기의 북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에서 최초의 대학들이
생겨나는데, 당시의 “명문대학”을 결정지은 요소는 학교 시설이나 유명한
교수가 아니라 얼마나 귀한 책을 많이 소장하고 있느냐 였다.

그러나 중국의 제지술이 아라비아를 통해 유럽으로 전해지자 사정은 달라졌다.
나무나 천을 물에 불리고 끓여 펄프를 만든 뒤 불순물을 걸러내고 잘 말리면
종이가 된다.  여기다가 인쇄술이 더해지면서 유럽은 역사적 격변을 겪는다.

유럽의 중세 1천 년을 그리스도교의 시대라고 하지만, 당시 교인들의 대부분은
함량미달이었다.  성서를 읽는 것은 고사하고 손으로 만져본 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값이 비싸기도 하거니와 라틴어로 되어 있는 성서는 사제와 학자
외에는 읽을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 중세의 교회는 최고의 권력을 누린 것이다.
사람들은 사제들이 읽어주고 해석해 주는 것에 전적으로 의지했기에 교회는
성서를 독점했고 신앙을 독점했다.

종이와 인쇄술이 나오자 유럽 전역에서 200여 개의 출판사와 인쇄소가 생겨
났고 성서를 발간했다. 그리고 유럽 각국에서 자국어로 번역을 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각국어로 번역하는 것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하여 성서를 최초로
영어로 번역한 틴들은 1536년 처형되었다.
종교개혁을 촉발한 마르틴 루터가 작센에 숨어 지내면서 한 일도 바로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성서를 누구나 읽게 되면서 종교개혁은 성공하였고 성직자의 권력은 추락하기
시작했다.

동양에서 앞서서 종이와 인쇄술을 발명하고 사용했으면서도 동양에서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동양에서는 기본적으로 책의 관념 자체가 달랐다.  지식을 보급하는 매체가
아니라 지식을 보관하는 용도였다.
특히 역사서는 일반 민중이 봐서는 안 되는 금서였다. 역사는 천리를 읽는 학문
이므로 함부로 알려 해서는 안 되었다.

고려와 조선은 실록을 비롯한 역사서를 사고(史庫)에 특별히 보관했으며, 17세기
청나라 강희제는 <사고전서>라는 방대한 백과사전을 편찬했음에도 민간에 보급
하기는커녕 총 7질을 찍어서 지식을 보존하는 용도로만 이용하였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듯이 아무리 지식이 축적되고 발달해도 널리
보급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모든 면에서 뒤졌던 서양이 근대의 문턱에 접어
들면서 한순간에 역전을 이룬 요인은 외부에서 도입된 지식과 기술이 정치권력에
의해 통제되지 않고 민간에 널리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동양과 서양의 싸움에서 서양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개방 사회
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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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해보았습니다.
저자는 “시사”와 “역사”의 관계에 대한 시각으로 역사를 접근합니다.

중세의 4대 발명품을 다 먼저 만들었던 동양, 즉 중국이 스스로는 그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그것을 전수받은 유럽이 그것을 바탕으로 오히려 동양 및
신세계를 침략하는 도구로 사용했던 아이러니를 설명합니다.

나침반으로 인해 대항해가 가능해졌고, 화약으로 타문화권보다 결정적인 무력의
우위에 서게 되었으며 종이와 인쇄술로 르네상스같은 문화의 혁명이 일어납니다.

저자는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로 비유합니다. 동양과 서양의
경쟁에서 집권 세력, 고위층만 독점했던 지식과 기술이 고인 물처럼 발전이 없
었지만, 민간에서 자유로이 유통되고 이용이 되었던 서양은 문명발전의 대폭발
이 일어났습니다.

조선과 일본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모든 문화와 기술을 전수하고 여러 면에서 우위를 누렸던 조선이 새로운
세계와의 단절과 폐쇄로 인해, 일본으로부터 씻을 수 없는 치욕과 고통을 수십
년간 당하게 됩니다.

역사는 죽은 과거가 아니고, 살아서 현재와 미래를 밝혀주는 등불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시사”는 과거의 “역사”에서 비롯된 원인과 결과의 관계
라고 할 수 있겠지요.

부디 역사의 교훈을 늘 되새기고 그럼으로 현재를 냉정하게 살아감으로 미래를
아름답게 비추게 되는 지혜로운 국민과 나라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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