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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Sep 17. 2016

<로마의 멸망을 재촉한 중국제국>

시사에 훤해지는 역사 중


<서로마와 동로마의 멸망을 촉발한 중국제국>
-- 시사에 훤해지는 역사, 中


                            강 일 송

역사는 흔히 유명한 영웅들에 의해서 흘러가듯이 보입니다. 대부분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가들이 그렇게 기록해왔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오늘 저자는 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합니다.
역사는 의식적인 행위자들의 행위에 의해서 전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큰 흐름으로 볼 때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간다고 말합니다.

1000년 정도 차이를 두고 멸망한 서로마와 동로마의 마지막을 이끈
고트족과 투르크족은 그 처음을 거꾸로 올라가면 중국이 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 내용을 한 번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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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의 십자군 전쟁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주교들을 주도해 시작되었고, 조선 초의 과전법이라는 제도는 고려 말
조준의 건의를 토대로 신생국 조선의 관리 급료제도 혹은 토지제도로
채택되고 시행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와 사건의 결과는 때로 누구의 의지와도 무관하게 흘러
가는 경우가 많다.  십자군 전쟁을 이끈 교황은 그 전쟁의 결과로 교회의
권위가 실추되기 시작한 후대의 역사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고, 과전법을
도입한 신진사대부들은 곧바로 그 제도의 허점이 생겨나 토지제도의 문란
을 빚을 줄은 미처 예견하지 못했다.

사실 역사적 사건은 대부분 행위자의 의식적인 행위로 시작되지만, 장기적
결과는 어떤 개인의 의식이나 의지로부터 벗어나 역사 자체의 흐름에
귀속되는 경우가 많다. 비유하자면 그것을 <역사적 무의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역사적 무의식이 표출된 사건의 좋은 사례는 고대에 방대한 유라시아를
무대로 벌어진 두 차례의 민족이동이다.
기원전 221년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사람은 진시황이지만 그의 제국은
불과 15년밖에 존속하지 못했다.  그의 사후 유방과 항우가 천하 쟁탈전을
벌였고, 승리한 유방이 다시 중국을 재통일하고 한나라를 건국했다.
이 제국은 이후 400여 년간 존속하면서 중국식 제국의 원형을 이루지만,
건국 초기에는 북방의 흉노제국에 조공을 바치는 처지였다. 이 관계를
역전시킨 사람이 한 무제다.

기원전 130년 경 한 무제는 드디어 흉노를 정벌하는 데 성공한다. 패배한
흉노족이 모조리 짐을 싸서 이사하지는 않았겠지만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
으니 자연히 대규모의 민족이동이 일어난다. 어디로 갈까? 북쪽은 시베리아가
막고 있으니 갈 곳이 없다. 일부는 동쪽으로 이동해 만주로 갔지만 대다수는
서쪽으로 갔다. 중국 대륙의 서쪽에는 아득한 옛날부터 동서 교역로로 이용
되어온 실크로드가 있다. 현재 중국 서부의 둔황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
칸트에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을 따라 중앙아시아로 이동한 흉노는 타고난 전쟁 솜씨를 이용해 넓은
평원을 차지하게 된다. 여기서 밀린 기존의 민족들이 또다시 이동을 한다.
대월지족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일대로 이동했고, 그중 일파인 쿠샨족이
기원 후 1세기에 남쪽의 북인도로 들어가 쿠샨 왕조를 일으켰다.

중앙아시아에서 훈족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은 흉노는 대부분 새 고향에
남았겠지만 일부는 이동을 멈추지 않았다. 서쪽으로 가서 유럽에 들어간
훈족은 기원후 5세기에 로마제국을 공략한다. 유럽 고대 세계를 벌벌 떨게
만든 아틸라가 바로 그 훈족의 수장이다.

더 큰 변동은 그 다음이다. 흑해 서안, 지금의 루마니아에 살고 있던 고트족
이 훈족에게 밀려나 서진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후대 역사에 게르만족의 대이동
이라고 알려진 도미노식 민족이동을 일으킨다.
고트족은 둘로 나뉘어 동고트족은 이탈리아로 갔고 서고트족은 더 서쪽의
이베리아로 이동했다. 또 이들에 밀린 독일 지역의 수에비족은 갈리아로 갔고
앵글족과 색슨족은 영국으로 건너갔으며, 반달족은 멀리 아프리카로 갔다.

이 과정에서 로마제국이 멸망했으니, 어떻게 보면 중국 한 무제의 북변 정리가
일파만파로 세계사적 대사건을 불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수백 년에 걸쳐 일어났으며, 무엇보다 한 무제 개인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
하다. 그는 로마라는 나라가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했으니까.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중대한 역사적 변화가 유라시아를 휩쓴 똑같은 사건은
7세기에도 벌어진다. 한나라가 무너진 뒤 350년간의 분열기를 끝내고 중국을
재통일한 수나라는 옛날의 진나라처럼 수십 년을 못 가 멸망했고 그 자리를
당나라가 대신한다.  신흥 제국을 반석에 앉힌 당 태종은 옛 한 무제처럼 역시
북변 정리를 서두른다.  만주의 강국인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당 태종은 옛
흉노의 자리에 있던 돌궐족을 공격한다.

돌궐족의 처지는 700년 전 흉노족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일부는 동쪽의 만주로
들어가고 대다수는 서쪽으로 이동한다. 역사는 가혹하게 되풀이된다.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로 진출한 이들은 흉노처럼 명칭이 투르크족으로
바뀌고 중앙아시아를 새 고향으로 삼는다.
셀주크 족장가문이 지배하던 11세기에 셀주크투르크는 서남아시아를 정복했고
수백 년 뒤에는 오스만 족장의 지도 아래 동유럽으로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1100년이나 존속하던 동로마제국(비잔티움제국)이 1453년에 멸망
했다.  오스만제국은 이후 20세기 터키 공화국으로 바뀔 때까지 동유럽의 발칸
과 서남아시아, 북아프리카 일부를 지배했는데, 터키라는 명칭이 바로 투르크에
서 나왔다.

역사의 긴 흐름으로 본다면, 서로마와 동로마 두 제국은 중국의 북변 정리에
의해 멸망한 셈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 민족 대이동은 고대에 중국이
유럽세계에 비해 군사력과 문물의 힘에서 월등히 앞섰음을 말해준다.
물론 처음에 돌궐족을 압박한 당 태종과 흉노를 공략한 한 무제는 신생 제국의
안전을 도모했을 뿐 자신의 행동이 유라시아 반대편에서 엄청난 역사적 결과를
낳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느 시대든 당대를 지배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리더들이 있게 마련
이다. 이들은 자기 분야를 장악했다고 여기며 모든 정책과 행위를 기획하고
의도한다.  그러나 큰 호흡의 역사는 늘 그들의 기획과 의도에서 벗어나 마치
독자적인 생명을 가진 것처럼 스스로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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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자는 상당히 생소한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역사적 무의식”이란 용어를
사용하는데, 어떤 역사적 사건을 거꾸로 거슬러 가면 하나의 조그만 사건으로
인해 처음 의도한 방향이 아닌 쪽으로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말하고 있네요.

그 예로, 한 무제의 북변정리로 흉노족이 무너져 서진한 무리들이 그 지역의
종족을 밀어내어 쿠샨왕조가 형성이 되고, 더 서진한 흉노의 일파인 “훈족”
은 그 유명한 “게르만족 대이동”을 유발한다는 내용입니다.
그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서로마가 멸망한 것은 이미 아시는 내용입니다.
훈족에 의해 바닷가로 밀려난 사람들이 세운 도시가 “베네치아”였다는 것은
전에 한 번 말씀드렸지요.

또, 700년이 흘러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당나라의 당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
한 것만이 아니라 돌궐족을 몰아내어, 후대의 투르크족이 되며 셀주크투르크,
오스만투르크 왕조를 만들게 됩니다.
오스만왕국은 서로마 멸망이후에도 1000년 넘게 지속한 비잔티움제국을
공략하여 무너뜨리게 됩니다.

저자의 의견은 약간의 “생각의 비약(flight of idea)” 이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아직 훈족의 정체가 완전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흉노족의 일파라고 추측만
할 뿐이지 정확한 결론은 내려지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좀 더 이전으로 돌아본다면, 기원전 4-5세기의 알렉산더대왕과
페르시아의 공격을 막아낸 최초의 유목국가인 “스키타이”의 영향으로
춘추전국시대의 “조나라”가 기마기술과 전술을 도입하여 강자가 되었고
그것을 본 딴 진나라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것까지  거슬러 간다면
한나라 무제때의 중국의 국력도 서양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저자는 “큰 호흡의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독자적인 생명을 가진
것처럼 처음 사건의 시작인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독자적인 흐름으로
진행하여 흘러왔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우리의 조그만 생각과 행동이 나비효과를 불러 후대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지, 얼마나 다른 세상을 만들지는 섣불리 예측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역사라는 큰 물줄기 흐름을 되풀이해서 공부하고 익혀, 현재를 파악하고
좋은 미래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이 역사공부의 참 의미와 참 맛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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