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인문 인류

<인문학을 부탁해>

사유의 확장과 인문학

by 해헌 서재

<인문학을 부탁해> 박영규


강 일 송


오늘은 인문학에 대한 책을 한 권 보려고 합니다.

요즘은 다양한 인문학 책들이 서점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인문학의 열풍이라 할 만 하지요.

오늘 만나는 책은, 대학총장 출신의 늦깎이 인문학자가 대학생들에게

인문학 강좌를 하면서 강의를 한 내용의 책입니다.


저자는 서울대학교 사회교육학과와 동대학원 정치학과를 나와 정치학자

로서 교수 생활을 오래 하였고, 정치학자에서 인문학자로 전향(?)하였

다고 합니다.


인문학 강좌 시작 때, 인문학이란 뭘까? 뭐라고 정의하면 좋을까? 라고

학생들에게 주제를 줬더니, 여기서 나온 답들이, “거미줄”, “물”, “나무”,

“현미경” 등으로 다양하게 정의했다고 합니다.

거미줄처럼 자신의 사고를 확장시켜주고, 물처럼 자신을 성장시키는 에너지

원천이고, 나무처럼 시원한 그늘을 주는 쉼터이고, 현미경처럼 세상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도구라는 것이지요.


한 번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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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와 인문학

시는 인문학의 시작이면서 완성이다. 시에는 세상과 나에 대한 물음,

행복, 인생설계도, 사랑, 자유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문학의 주제가

모두 농축되어 있다. 짧은 글로써 길고, 깊고, 넓은 인문학적 깨달음을

드러내는 시인들은 가장 효율적인 인문학자들이다.


고은은 그 중에서도 우뚝하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얼마나 간결한가, 딱 두 문장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세상사에 대한

깨달음이 절절히 녹아 있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볼 때 시인들의 작업이 모두 효율적인 것은 아니다.

비용 대비 수익을 볼 때 시 한 편의 시장가격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함민복의 <긍정적인 밥>이라는 시 한 편 보자.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인들은 주로 가지 않은 길을 보여준다. 그 길이 특별히 다른 것은 없다.

다만 가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가지 않았기에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상이 정해주는 정답과 다른 인생을 살고 싶다면 시인의 말을 경청하라.

그 길을 바라볼 때 내 가슴이 설레면 그 길로 가라.

그러면 프로스트가 노래한 것처럼 내 인생은 달라질 것이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어 나는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을 선택했다.

그것은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달라지게 했다.“


◉ 사유의 확장과 인문학

익숙한 것에 정서적 유대감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어머니와 고향은

그래서 늘 친숙하고 그립고 다정하다. 문명의 출발선은 익숙함이다.

그러나 문명의 성장은 낯선 것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질적인 것들과의 만남과 대립, 화해가 없으면 문명은 제자리 걸음을

면치 못한다. 사고의 확장을 위해서는 인문학적 훈련이 필요하다.


★ 낯선 대륙의 아리랑

아프리카는 우리에게 낯선 대륙이다. 언어, 풍습, 종교, 지리 등 모든 것이

낯설다.

도리스 레싱의 <풀잎은 노래한다>는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풀잎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저항, 인권, 진실을 상징하는 알레고리다.

조국을 잃은 식민지 백성의 아픔과 백인들에게 억압당하는 아프리카 흑인의

한은 본질적으로 같다. 아프리카의 풀잎이 노래하는 원주민들의 한은

낯선 대륙의 아리랑이다.


주인공 메리 터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로디지아의 느게시에서 농장을

경영하는 리처드 터너의 부인이다. 결혼하기 전 메리는 매우 싹싹한 여성이

었다. 직장에서 인기 만점이었는데, 이러한 메리의 사회성은 백인을 상대

할 때만 나타나는 제한적 특성이었다.


결혼한 후 메리는 농장에서 만난 흑인 원주민들을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메리는 가슴을 드러내놓은 채 아이들에게 젖을 물리는 흑인 여자들을 보면서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흑인들의 역겨운 냄새 때문에

구역질을 하기도 한다. 남편이 흑인들은 오히려 백인들에게서 나는 냄새를

역겨워한다면서 메리에게 참으라고 말하지만 메리의 사전에는 문화적 상대

주의와 관용이라는 단어가 없다. 메리는 철저한 백인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불관용주의자다.


급기야 메리는 옥수수 수확을 하는 도중 목이 말라 잠시 쉬고 있는 모세에게

채찍질을 한다. 게으른 흑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채찍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메리의 철학이다.


하지만 메리는 결국 모세에게 살해당한다. 메리는 스스로 죽음의 싹을 잉태

한 셈이다. 메리 살인 사건을 대하는 경찰과 언론의 태도에도 인종주의에

대한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다. 경찰은 자세한 범행 동기를 밝히지 않은 채

귀중품을 노린 단순 살인 사건으로 추측된다며 서둘러 사건을 종결해버린다.

언론도 단신으로만 취급한다.

지배계급을 형성하고 있는 백인 사회에서도 이 사건을 쉬쉬한다. 진상이 밝혀

질 경우 일어날 사회적 파장이 두려운 탓이다.


도리스 레싱은 <풀잎은 노래한다>에서 백인 사회의 인종주의적 편견과 지식인

들의 나약함에 대해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고 있다.

메리가 모세에게 휘두른 채찍은 인종에 대한 각종 차별주의를 상징한다.

채찍은 곳곳에 깊숙한 상처를 남긴다. 상흔은 경제적 불평등, 인권탄압, 차별

등의 다양한 변종으로 나타난다.


오늘날에도 아프리카의 이미지는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다.

저스틴 새코라는 미국 여성의 사례인데, 새코는 잘나가는 인터넷 기업 IAC의

홍보 임원이었다. 2013년 12월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가면서 “아프리카로

여행간다. 에이즈에는 안 걸렸으면 좋겠다. 근데 농담이야. 난 백인인데 뭐!“

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새코의 팔로워는 얼마 안 되었지만 1만 5000명

이상을 가진 파워트위터가 이 글을 리트윗하면서 새코는 졸지에 정신나간

인종차별주의자가 되었다. 회사는 부정적인 파장을 차단하기 위해 새코를

즉각 해고한다.


<뉴욕타임즈>는 새코에 대한 뉴스를 심층 분석하면서 “무심코 인터넷에 올린

글 때문에 인생 종칠 수도 있으니 입 조심, 아니 손가락 조심하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하지만 새코사건을 이렇게 바라보는 것은 메리 터너 사건을 귀중품 도난 살인

사건으로 치부해버린 남아공 지배계급들의 인식과 같다.

새코의 글로 볼 때 그의 내면에 인종주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이 농담이었다 하더라도 결과는 다르지 않다.


심층분석이라면 마땅히 새코의 성장 배경과 문화적 관습 등을 깊숙이 들여다

본 후 인종주의의 흔적이 있는 지 판단했어야 옳다.

<뉴욕 타임즈>는 인종주의라는 프레임을 사회관계망 프레임으로 슬쩍 바꿔

버림으로써 균형 있게 사건을 분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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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처음에 시와 인문학에 대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고은의 시를 통해 짧고 간결한 두 문장의 글이 얼마나 깊은 사색을 이끌어

내는 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시인이야말로 가장 효율적인 인문학자들이라

고 이야기 합니다.


쌀 두 말과 국밥 한 그릇 값의 시 한편이 시인에게는 박하다고 느껴지다가도

따뜻한 밥 한 그릇, 국밥 한 그릇의 따뜻함을 전해줄 수 있다면 그 시의 가치는

헤아릴 수 없을 가치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 글에서는 메리와 새코의 두 여성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벡인들 간에는 싹싹하고 인기 있던 메리가 흑인들에게는 아주 냉정하고 관용이라

고는 눈꼽만치도 없습니다. 백인과 흑인의 편견에 갇혀, 흑인여성들의 젖물리는

광경이나, 흑인 노동자의 쉬는 모습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합니다.

마치 동물이나 벌레처럼 흑인들을 대하던 그녀는 비극을 맞습니다.


세코의 경우도 아무 생각 없이 올린 트위트의 글 하나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자신은 해고를 당합니다. 뉴욕타임즈는 문제의 핵심을 비켜나가 SNS의 문제라고 포커스를 맞춥니다. 인종주의의 프레임을 거치면 사회적 파장이 큼을 알기 때문

이지요. 남아공의 메리 사건을 대하는 백인들의 태도와 정확히 같습니다.


나와 타인의 다름을 문화상대주의라는 거창한 이름을 갖다대지 않더라도, 관용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역지사지하는 조그만 배려만 있었어도 비극은

피할 수 있었겠지요.


이쯤에서 우리 사회도 한 번 돌아다 보면 어떨까요?

지금 우리는 외국인들을 바라보는 두 가지 다른 시선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온 백인들 외국인과,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온 유색인종의

외국인. 마치 우리는 스스로 백인들과 비슷하거나 차상위 백인이라는 착각을

하면서 사람들을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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