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웅현 외
<생각 수업> 박웅현 외
강 일 송
오늘은 우리시대 최고의 지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이틀에 걸쳐 4000여명의
대중과 소통하였던 지식컨퍼런스의 장으로 한 번 모시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연사들과 청중들은 하나가 되어 삶에 대한 질문과 고민을 함께
나누었는데요, 바쁜 현대인의 삶 속에서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일깨우는 시간을 가지는 목표였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광고업계의 전설 “박웅현”대표의 파트를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책은 도끼다” 라는 책으로 이미 베스트셀러를 저술한 저자이기도
하고 많은 광고카피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향합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생각이 에너지다”,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 ”잘 자 내 꿈 꿔“ 등이 그의 작품이네요.
-----------------------------------------------------------
“내가 나로서 온전히 살아가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자신의 인생에서 반드시
답해야 할 질문을 만나는 것이다.“
<왜는 왜 필요한가>
저는 물음표가 좋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좋아져요. 인생의 즐거움은
느낌표를 찾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물음표가 있어야 느낌표가 따라 오는
것 같거든요.
질문이 많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로마 시대가 그랬죠. 당시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처형을 당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했던 것은 젊은이들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질문을
했던 것뿐이었는데 말입니다.
이와 반대의 시대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암흑시대’라 부르는 중세가 그렇
지요. 중세는 신본(神本)주의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의 성인 성베네딕투스는 자신의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다면서 공부를
그만둡니다. 공부를 하면 계속 의심하고 물어봐야 하는데, 신에 대해서도 의심하
고 의문을 갖는 자신을 보며 이를 신성모독이라 혀기고 그냥 예전처럼 신앙생활
에 집중하기로 한거죠.
이처럼 그리스로마시대와 중세시대의 결정적인 차이는 “질문” 이었습니다.
질문이 사라진 중세는 그야말로 암흑시대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요.
1417년 독일 남부의 한 수도원의 서가에서 당대의 뛰어난 필사가이자 인문학자
인 포조 브라촐리니가 고대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라는 옛 필사본을 발견합니다.
당시에 인쇄술이 없었기에 이 책을 필사를 했고 이것을 몽테뉴, 다빈치, 보티첼리,
몽테스키외, 마키아벨리 등이 읽게 되면서 새 세상에 눈을 뜨고 바야흐로 신본주의에
서 인본주의 즉 르네상스가 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어떤 시대를 닮았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중세라고 생각합니다. 신(神)의 자리에 돈(錢)을 앉히면 맞을 것 같아요.
우리는 묻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왜 하는지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그 질문이 돈을 버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신을 모시는 데 방해가 된다며 공부도 생각도 그만둔 성 베네딕투스처럼,
우리는 돈을 벌어야 하는데 시간도 없고 생각할 여유도 없는 거지요.
요즘 학교에서 수능시험에 방해가 된다며 책을 못 읽게 한다고 합니다.
공부란 무엇인가요? 책 읽는 것이 공부가 아닌가요? 상식이 뭔가요?
“안나 카레니나”가 상식 아닌가요?
왜 공부하세요? 왜 대학에 가시나요?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합니다.
어느 날 , 한 훌륭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왜 공부합니까?”
“좋은 대학 가려구요”
“왜 대학에 가고 싶어요?”
“좋은 직장에 가고 싶어서요.”
“왜요?”
“돈 벌려고요.”
“왜요?”
“결혼하려고요.”
“왜요?”
“애 낳고요.”
“그 다음에는요?”
“좋은 교육 시켜야죠”
“그 다음에는요?”
“좋은 대학 보내야죠”
그랬더니 질문을 듣는 학생들이 충격에 휩싸인 겁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책 “순례자”를 보면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하지만 그것이 배가 만들어진 이유는 아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안전만 추구하는 게 맞을까요? 삶은 드라마잖아요. 나만의 드라마를 만들어
가려면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것부터 알아야 하겠고요.
물론 이렇게 자기 삶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며 살아가다 보면, 불안해
지는 때가 오기도 합니다. 이 길이 맞을지, 이 선택이 옳을지 늘 확신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예측하기 힘든 것이 인생이고, 그 안에서 스스로
선택을 내리는 것이 또한 즐거움 아닐까요?
배를 만들었으면, 바다로 나아가 풍랑도 만나보고 또 그것을 극복해가며 즐겨도
보셨으면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나만의 멋진 드라마를 만들어가려면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물음표가 중요한 이유이고요.
인생을 100으로 봤을 때 90은 “기존(旣存)”입니다. 이미 그렇게 존재하는 것들
이지요. 내가 태어난 시대, 내가 타고난 삶의 조건, 이 모두가 기존입니다.
건드릴 수가 없어요. 나머지 9는 “기성(旣成)”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것이죠.
여러분은 이미 그 이름을 가지고 있고, 몇 번의 실패와 성공을 했고, 그렇게
생긴 얼굴이고, 그런 성격을 가졌습니다. 못 고칩니다.
지금부터 고쳐야 할 것은 나머지 1인 “미성(未成)”입니다.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 우리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나가야 하는 부분입니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세요! 이것이 바로 제가 생각하는
가장 적극적인 삶의 방법입니다.
삶에 대한 감사함과 함께 자기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져 갈 때 진정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
오늘은 우리가 이 생에서 어떻게 온전한 나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 에 대한
박웅현대표의 글을 한 번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교육현장에서는 질문이 사라졌습니다. 양방향으로 대화와 토론이 이루어져
자신들의 생각이 서야 하는데, 오직 일방적인 한쪽 방향만의 흐름뿐이니
공부는 잘하는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보라면 말문이 막힙니다.
저자는 가장 중요한 것이 “왜”라고 질문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구분짓는 “왜”
현대에는 신(神) 대신에 돈에 의해서 사라져 버린 “왜”
“왜”라는 질문으로 무장하고, 안전함만을 추구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탐구하는
자세가 초스피드로 변화하고 있고, 불확실성이 갈수록 증가하는 현대에
있어서 진정으로 갖추어야 할 자세가 아닌가 합니다.
“왜”라는 질문이 비단 젊은이 뿐 아니라,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가는 지금의
중장년층도 스스로에게 끝없이 던져서 되물어야하겠지요.
그래야 현실에서 길을 잃지 않고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