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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예술

<햄릿 - 불완전한 인간의 완전한 비극> 오종우

예술 수업 2.

by 해헌 서재

<햄릿 - 불완전한 인간의 완전한 비극> 오종우

강 일 송

오늘은 이전에 한 번 소개해 드린 성균관대 오종우교수의 “예술수업”
중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부분을 한 번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지난번 글이 길어져 미처 언급 못한 부분이었습니다.

오종우교수는 고려대 노어노문학과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하였고
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현재 성균관대 러시아문학과
교수로 있습니다.
그의 강의는 성균관대 최고의 명강으로 꼽히고 있으며 “예술의 말과
생각“이라는 이름으로 강의되고 있습니다.

그 중 오늘은 햄릿의 대사를 재해석하고 “비극”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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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세익스피어(1564-1616)의 <햄릿> 3막 1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대사가 나옵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그런데 이 대사는 번역하기 어렵습니다. <햄릿> 전체의 의미를 안고
있는 문장이면서 나아가 인생의 가치를 함축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널리 알려진 번역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일 겁니다.
그 밖에도 여러 연구자들이 조금씩 다르게 우리말로 옮겼는데,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혹은 “과연 인생이란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번역도 있습니다.
모두 햄릿의 독백을 더 정확하게 옮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어느 번역도 원문의 의미를 흡족하게 전달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대사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기에 그렇게 번역하기
힘든 걸까요?

이번에는 잠시 방향을 돌려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에서 인기 있는 공연 가운데 하나가 <오이디푸스 왕>
이었습니다. 소포클레스가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연극대본으로 바꿔
쓴 비극작품이지요.

소포클레스는 원래 신의 위대함과 인간의 한계를 다룬 신화를 인간의
강인한 정신적 가치를 부각시키는 이야기로 뒤바꾸게 됩니다.
내용은 같지만 주제가 달라진 것인데, 신의 이야기를 인간 중심의
이야기로 전환한 것은 인류 문명의 기초가 당시에 세워질 수 있었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오이디푸스 왕의 내용은 익히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지금도 공연되고 있는 이 작품의 무대를 보고 있노라면 인간에게
이보다 더 고통과 고뇌가 있을까 할 정도입니다.
비극은 이처럼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난과 슬픔을 다룹니다.

그런데, 당시에 왜 이런 비극 공연을 사람들이 즐겨 보았을까요?
악독한 인물이 파멸한다면 그것을 보는 우리는 비애감이 아니라 도리어
쾌감을 느낄 것입니다. 정의롭기 때문이죠.
하지만 비극은 아무 잘못도 없는 고상하고 순결한 인물이 몰락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비극을 즐겨 보는 것은 몹시 역설적인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의 정신력은 난관에 부딪혔을 때 발현됩니다. 그런데 이 난관은
결코 극복할 수 없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오이디푸스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눈이 멀어 진실을 못 본다고 질책
했습니다. 그러나 진실이 밝혀진 뒤 자기 눈을 찌릅니다.

<오이디푸스 왕>은 신의 위력, 즉 신탁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불완전성이 빚은 비극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나약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눈을 찌른 것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진실을 부단히 추구했습니다. 그는 백성에 대한 의무감을
안고 끝까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엔 자신도 불안했지만 자기 운명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의지를 지닌 행동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이길 수 없는 신탁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밝혀진 진실에 책임을 지고 스스로 눈을 찌른 뒤 황야로 나갑니다.
파멸했지만 패배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처럼 비극은 꿋꿋하게 자존하는 영웅을 통해 인간의 가치를 체험하게
해줍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에 관해 다룬 <시학>에서 비극을 이렇게 정의했
습니다. “비극은 완전한 행동의 모방이다.”
비극의 행동이 완전하다고 합니다. 즉, 비극의 행동은 열정, 능력
그리고 추구하는 가치가 조화를 이루어 인간의 고귀함을 보여줍니다.
영웅은 초능력을 가진 수퍼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웅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의 가치를 보존하는 인물을 뜻합니다.

다시 햄릿으로 넘어와 보겠습니다.

외국어를 우리말로 번역하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언어 자체가 곧 문화이기 때문이지요. 영어의 유니버설(Universal)
과 제너럴(General) 도 그런 단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둘 다 사전을 보면 모두 “보편적” 또는 “일반적”으로 번역하면서
“세상에서 두루 통하고 널리 퍼져있다.”는 뜻이라 합니다.
어원을 살펴보면 유니버설은 단 하나의 것(unique)으로 귀결된다
(vertere) 는 뜻을 지녀서 하나가 곧 전체라는 의미입니다.
제너럴은 같은 종류(genus)가 널리 퍼지다(rate) 로, 동일한 종(種 )
이 여기저기 많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유니버설은 하나가 세상에 두루 통하여 전반적이란 단어이고
제너럴은 같은 것들이 아주 많아 전반적이라는 말입니다. 표면상으로
비슷하지만 사실은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지요.

세상에는 제너럴해 보이지만 유니버설한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먼저 생명체가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유일무이합니다.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똑같은 생명체는 하나도 없죠.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오직 하나뿐입니다.

사랑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하지만, 각각의
사랑은 그 어느 사랑하고도 같지 않습니다. 사랑은 통속적으로
보이지만 모든 사랑에는 자기만의 고유한 세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의도 사랑을 완벽하게 규정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예술이 그렇습니다. 예술작품은 많이 있지만 어느 작품도
단 하나뿐입니다. 예술작품은 독창성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처럼 예술에 대해서도 완벽한 정의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제너럴의 성격을 띠는 대표적인 예로 이데올로기를 들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고 같은 부류만을 허용하는 이데올로기
는 20세기에 세계를 둘로 나누어 대립하게 했습니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왕인 아버지가 갑자기 죽고
숙부가 왕위에 올랐는데, 어느 날 아버지의 유령이 나타나 숙부가
자기를 독살했다고 알려줬기 때문입니다. 그 뒤 홀로 진실을 밝혀가던
햄릿이 고민하며 독백합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햄릿만이 그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 독백은 햄릿이 진실을 지키는 존재
로 남을 것인가 하며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입니다. 풀어 말하면
“햄릿은 진실을 아는 유일한 존재로서 유니버설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처럼 제너럴하게 진실을 덮고 현실에 안주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가 유니버설하게 나선다면 최고 권력자인 숙부에게서 큰 고난이 따를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햄릿은 진실에 따라 제대로 된
존재하기(to be) 위해서 목숨을 잃는 비극적인 삶을 삽니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은 우리에게 오직 하나뿐인 생명의 유니버설한 가치를
버리고, 흔한 제너럴에 묻혀 근근이 살아가는 삶이 진정한 삶인가 하고
묻고 있습니다.

“사느냐 죽느냐”로 번역되는 햄릿의 독백에서 “사느냐(to be)"는 목숨을
잃을지언정 진실에 따라 제대로 존재한다는 뜻이고, “죽느냐(no to be)"는
진실을 묵살하고 비겁하게 목숨을 부지하는 것으로, 살긴 살지만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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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비극 중의 비극 <햄릿> 과 <오이디푸스 왕>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았습니다.

본문에 나왔듯이, 비극의 주인공은 선하고 순결한 인물인데, 햄릿과 오이디푸스
둘 다 그러합니다. 인간의 불완전성에 의한 운명의 장난에 결코 굴복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부딪쳐 패배하지만 굴복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은 완전한 행동의 모방이다”는 말이 의미를 얻
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은 모방(미메시스)라고 이미 정의한 바 있습니다.
어차피 그에게 예술은 모방일뿐이지만 완전한 행동의 모방이라 했으니 최고의
극찬인 셈입니다.

현실에서 햄릿과 오이디푸스처럼 유니버설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보통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햄릿같은 경우 자기만 모른체 한다면
아무도 진실은 모르고, 왕자로 지내다가 왕위를 물려 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이디푸스도 중간에 모든 행동을 멈추고 덮어버렸다면 편안한
왕의 지위를 누리고 잘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생명” “사랑” “예술” 저자가 말한 세상에 유니버설한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가 살면서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궁극적 가치가 아닐까요.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이 세 가지 앞에서 당당히 유니버설할 수 있다면
나의 인생이 진정 찬란한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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