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떠돌이 소의 꿈> 허나영
-- 이중섭 탄생 100주년에 떠나는 여행
강 일 송
오늘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화가 중 한 명인 이중섭에 관한
책을 한번 보겠습니다.
올해는 이중섭 탄생 100주년으로 여러 가지 행사가 진행이 되고
있는데,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이중섭,백년의 신화”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미술학 박사까지
마쳤습니다.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방송매체에서 활발한 활동
및 대중강연, 대중미술 책을 여러 권 저술했습니다.
한번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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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네쌍스 다방의 화가들
전쟁 속에서도 예술은 죽지 않았다. 아직 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1952년
12월 어느 날, 부산 대청동에 위치한 한 다방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여러 화가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 키가 크고 호리호리
한 사내가 들어온다. 그와 친한 사람들은 그를 “아고리”라고 부르곤 했다.
이중섭(1916-1956)이었다. 일본말로 턱을 뜻하는 ‘아고’에 이중섭의 성이
붙어 만들어진 애칭이었다.
이 다방은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온 화가들이 만나는 장소였다.
이곳에서 한묵, 이봉상, 박고석, 손웅성, 그리고 이중섭, 다섯 명의 작가가
‘기조전’이라는 이름으로 그룹전을 열고 있었다.
이들은 부두 노동을 하거나 삽화를 그리고 페인트칠을 하면서 근근이 버텨
가고 있었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은 막을 수 없었다.
◉ 소년, 그림을 시작하다
이중섭의 고향은 평안남도 평원이다. 그는 어릴 때 남부럽지 않은 유년을
보냈다. 비록 아버지는 일찍 여의였지만 대신 여장부 같은 어머니와
열두 살 나이가 많고 현실감각이 남달랐던 형이 있었기 때문에 빈자리는
크지 않았다. 그에게 어머니는 무한한 애정을 주던 대상이었고, 어린
나이에 시집 간 누나 역시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이런 어머니와 한국전쟁
으로 생이별을 하였고, 깊은 정을 나누었던 아내와도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으니 그의 외로움은 알만하다.
그는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진학 한 후 중요한 만남을 가지게 되는데, 미술부에
부임한 임용련, 백남순 부부와의 만남이었다. 이들은 당시 드물게 미국과
프랑스에서 유학을 한 인재들이었다. 임용련은 중국 난징 진링대학과 미국
예일대학교 미술대학을 다녔고, 백남순은 파리에서 유학 중이었다.
이들이 배워온 전위적인 서양미술의 영향을 이중섭은 받게 된다.
◉ 일본에서 예술가로 성장하고 뮤즈를 만나다.
형의 경제적 후원과 어머니의 정신적 지지를 발판 삼아 이중섭은 드디어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부산항에서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 시모노세키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1936년 일본에 도착한 그는 분카가쿠인(문화학원)
에서 자유로운 학풍과 함께 아방가르드 미술을 배우게 된다.
또한 그는 대학교 2학년 시절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나는데, 프랑스 유학을
꿈꾸던 미술학도 마사코는 훤칠한 키에 배구를 잘하던 조선에서 온 청년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일제는 더욱 조선을 압박하였다. 조선에서 온
미술학도가 동경에서 공부하기에는 힘든 환경이 계속되었고, 결국 그는
가족이 있는 원산으로 돌아가게 된다.
◉ 가정을 꾸리다.
1943년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평양, 개성, 경성을 오가며 전시를 하고 여러
미술가들을 만나며 활발하게 활동한다. 그러던 1954년, 마사코가 아버지의
도움으로 그 혼란한 와중에 조선으로 넘어왔고, 그들은 결혼식을 올린다.
그는 아내를 위하여 ‘따뜻한 남쪽에서 온 덕이 많은 여자’라는 뜻으로
남덕(南德)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그들에게 찾아 온 첫 아이는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나고 이후 아들 두 명이 더 태어난다.
◉ 전쟁의 발발과 영원한 이별
그에게 아버지나 다름없던 형 이중석이 공산당의 조사를 받으러 간 이후
실종이 된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많은 재산을 소유한 이중석은 프롤레타리아
를 핍박하는 자본가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어머니와 형수
는 형을 기다리고, 아내와 아들 둘, 조카 이영진을 데리고 국군 해군함정
에 몸을 싣는다.
부산에 온 그들은 수용소에 거처를 마련하고 부두노동자로 날품팔이를
시작했다. 이때 부산에서 아는 문인들이나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곤궁한 그들은 제주도 서귀로로 다시 떠나게 된다.
서귀포에서 가난하지만 그들 가족들은 행복한 추억들을 많이 가지게 된다.
바닷가에서 물고기, 게, 조개를 잡았고, 이때의 추억으로 서귀포에서의
행복한 그림들이 그려지게 된다.
서귀포에서의 삶이 나아지지 않자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는데, 아내는 일본
의 어머니로부터 조금씩 송금을 받고 이중섭은 부두 막노동을 하게 된다.
너무나 가난한 생활이 이어지던 중 친정아버지의 부고, 아이들의 양육문제로
남덕은 결국 일본으로 넘어가게 된다.
◉ 홀로 남은 이중섭
중섭은 가족을 떠나보내고, 현해탄을 넘어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아내에
대한 사랑 고백과 가족들이 보고 싶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리고
그는 이를 악물고 활발히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이후 부산에서 통영으로 거처를 옮긴 그는 통영에서 그림을 계속 그리며
전시회를 계속 하게 된다. 진주에 거주하던 박생광을 일본에서 만난 이후
반갑게 조우한 그는 진주의 대안동 다방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한다.
다시 서울로 올라간 그는 활발한 전시회를 열고 대구로 순회전시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또 그를 외면한다. 대구에서의 전시회가 실패로
끝이 나고 그나마 서울과 대구에서 팔린 작품의 대금 역시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이다. 그는 여관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그만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만다.
거듭되는 실패와 좌절로 중섭의 몸과 마음은 점점 지쳐갔다. 자신의 그림
들을 아궁이에 넣어 태우고 정신이상 행동들을 계속 하자 친구들은
어쩔 수 없이 대구 성가병원에 입원시켰고 서울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음식을 거부하는 거식증이 심해지면서 영양실조, 황달까지 와서
그는 점점 말라갔다. 끝내 이중섭은 1956년 9월 6일 무연고자로 사망하게
된다. 지인들이 그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은 3일이 지나서였다.
◉ 한국의 화공, 한국의 대표작가
이중섭이 죽은 지 60년이 지났다. 그동안 이중섭은 신화가 되었다.
임종을 지킨 사람은 없지만 그의 사후 일간지에서 이중섭의 부고를 알리는
기사가 연일 나왔고 추모글들이 이어졌다.
본격적으로 그의 이름이 회자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였다.
1972년 현대화랑에서 <이중섭전>이 대규모로 열렸고, 1973년 고은 시인이
<이중섭평전>을 출간했다. 이 평전을 극본으로 영화 <화가 이중섭>이 개봉
되어 사랑을 받았다. 이중섭은 전 국민이 잘 아는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자리 잡았다.
◉ 이중섭의 소, 한국의 소
이중섭은 소의 화가이다. 오산학교 시절부터 그는 소를 그려왔다.
일본에서 전시한 작품에도 꾸준히 소가 등장한다. 일본 유학 시절 후에
아내가 된 마사코에게 자신이 그린 것은 조선의 소라 강조했다 한다.
또한 그의 그림의 소는 수소인데 자신을 은유한 표현이라고 한다.
어떠한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고 소처럼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고 조카에
게 말했다고 한다.
이중섭에게 소는 바로 자신이다. 동시에 자신이 ‘한국의 화공’이라는 점을
여러 번 강조했듯 한국의 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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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나라 대표 화가 중 한명인 이중섭의 전기를 보았습니다.
미술적인 의미는 차치하고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의 이야기를 위주로 보았
습니다. 그의 인생에는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들이 고스란히 녹아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치하에서 태어난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형이 실종되고 어머니와 형수를 둔 채 남하하면서 비극이 시작되
었습니다. 전쟁이 없었다면 가족과 함께 교편을 잡고 예술가로서의 길이
탄탄하게 보장되었을 것인데, 전쟁이후 그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부산으로 피난 온 후, 그는 부두 막노동자로 일하고 가족을 부양하지만 힘에
부쳐 따뜻한 서귀포로 거처를 옮겨봅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여전히 배고
픔과 가난함을 떨치지 못하고 부산으로 돌아오지만 결국 아내와 아이들은
일본으로 떠나가게 됩니다.
이때부터 그는 가족들에게 절절한 사랑과 그리움의 편지를 현해탄을 넘어
보내기 시작합니다. 거듭된 전시회의 실패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그는
그 힘든 짐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놓고 맙니다.
주위의 좋은 친구들과 동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그리워하던 가족
과 함께 살지 못하고 그는 무연고자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를 보면 고흐가 생각납니다. 천재적인 재능과 미술적 영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아간 두 사람입니다.
사후에 그토록 훌륭한 평가를 받고 그들의 작품은 빛이 나지만, 현실을 살아간
그들은 불행한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오늘 저자는 이 책에서 이중섭의 흔적들을 찾아서 동경, 부산, 제주, 통영, 진주,
대구 등을 섭렵합니다. 어느 곳에도 진한 그의 자취는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의 삶에 대한 간절함, 가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등은 그의 그림과 편지들을
통해 현대의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생전에 즐겨 불렀던 <소나무> 노래 가사를 보면서
긴 글 마무리하겠습니다.
행복한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소나무야 소나무야
변함이 없는 그빛
비오고 바람 불어도
그 기상 변치 않으니
소나무야 소나무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