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를 거닐며 인문학을 향유하다
<미술관에 간 인문학자> 안현배
-- 루브르를 거닐며 인문학을 향유하다
강 일 송
오늘은 미술과 인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저자인 안현배교수는 파리1대학에서 역사학과 정치사를 공부했습니다.
이후 프랑스 국립사회과학고등연구소에서 예술과 정치의 사회학에 대해
연구를 하였고, 박사까지 마치게 됩니다.
귀국 후 성공회대학교, 서울대학교, 카이스트, 고려대학교, 서강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며 저술활동을 병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은 미술로 읽는 인문학책이자, 인문학을 도구로 미술을 감상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십년 넘게 루브르 박물관을 다니며 그림을 감상하였다고 합니다.
한 번 보시겠습니다.
----------------------------------------------
** 미술 작품을 읽는다는 것
미술관을 다니다보면, “그림을 읽는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하게 됩니다.
특히 오래된 명작일수록 그렇습니다. 그림에 대한 기본적인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작품 속 상징들을 이해해 나가다보면 그림이 읽히기 시작합니다.
오래된 미술 작품은 신화와 종교, 철학, 역사, 문학, 예술은 물론 인간의
삶까지도 녹아들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인문학은 미술을 흥미진진하게
읽어 내는 가장 유용한 도구입니다. 미술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는 것은
인문적 소양을 기르는 가장 효과적인 공부이기도 합니다.
◉ 화가 저널리스트가 되다
<키오스 섬에서의 학살>, 1824, 외젠 들라크루아
이 그림은 1822년 지중해의 작은 섬 키오스에서 벌어진 잔혹한 학살을
세상에 고발합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은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역사화가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입니다.
키오스 섬은 그리스인들이 많이 지만 지리적으로 터키에 가깝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의 식민지였던 키오스 섬은 그리스 독립전쟁에 합류를
하자 이를 진압하러 오스만 투르크군의 침략을 받습니다.
곧 이어 대규모 학살이 자행됩니다.
훗날 미술사가들은 <키오스 섬에서의 학살>을 가리켜 “미술 저널리즘을
연 작품”이라는 평가를 내립니다. 들라크루아는 이 그림을 통해 “누구를
위한 혁명이며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라는 질문을 세상에 던집니다.
화가는 정의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한 용기란 무엇인지를 세상을
향해 묻고 있습니다.
◉ 비유와 상징을 읽는 즐거움
<풍요> 시몽 부에, 1640
먼저 루브르의 이 그림에 대한 해석을 보겠습니다.
“시몽 부에는 루이 13세의 첫 번째 궁정화가였다. 이 그림 <풍요>는 베네
치아 미술의 거장 베로네제의 화풍을 떠오르게 한다. 화면 전체를 메우는
풍요의 여신 품에 영적인 충만을 은유하는 아기천사가 안겨 있는 것으로
봐서, 물질적 풍요보다는 정신적 풍요를 강조하는 듯하다.”
이 그림에서 보석은 물질적 풍요, 책은 지적 풍요, 그리고 하늘을 가리키는
아기천사의 손가락은 영적풍요, 즉 신앙심을 가리킨다는 말은 간명합니다.
그리고 물질적, 지적 풍요 보다 영적 풍요인 종교적 신앙심이 훨씬 높은
가치를 두기 위해 아기천사가 위에 위치합니다.
하지만 굳이 미술의 해석을 루브르의 해석만을 고집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른 관점과 해석을 통해 “다름”의 문화로 미술세계를 살찌울 수 있을
테니깐요.
◉ 세상 어디에서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아카디아의 목동들>, 니콜라 푸생, 1638년
이번 그림은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1594-1665)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정식 이름 외에 “아카디아에도 나는 있다”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림 속에 쓰인 글귀가 제목이 된 셈이지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카디아는, 실재하는 지역인데, 아주 오래전부터
지상의 파라다이스가 있었다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그림 속 인물들 가운데 있는 돌은 무덤입니다. 거기에 있는 글귀는
‘나(죽음)은 아카디아, 이곳에도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죽음의 여신이 ‘이 땅에도 죽음이 있다’라는 글을 읽는 목동들을 보면서
‘그럼,그럼’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반드시 찾아오기 마련이지만, 공포스럽게 찾아와
고통 속에 몰아놓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그것 역시 자연의 이치임을
화가는 이 그림을 통해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 소중한 순간을 영원히 간직한다는 것
<노인과 어린 소년의 초상>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1490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이름은 기를란다요(Ghirlandajo 1449-1494)인데
이탈리아말로 “꽃 장식가”를 뜻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꽃목걸이를 만들며
팔았던 금은세공사였습니다.
기를란다요는 동시대의 보티첼리와 비교가 자주 되는데, 그에 비해서 존재감
이 떨어지지만, 기를란다요는 이 시대의 천재 미켈란젤로의 스승이었습니다.
다시 그림을 본다면 노인과 소년이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손자라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울퉁불퉁한 코를 가진 할아버지의 품에 어린 아이는 안겨 있습
니다. 노인 역시 잔잔한 눈빛으로 아이를 내려다봅니다.
보통 초상화를 그리면 코의 흉터를 가려달라고 했을텐데, 주문자에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어린 손자와 깊이 교감하는 바로 그 순간을 노인은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50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그 소중한 순간이 느껴집니다.
이것이 그림이 주는 선물입니다.
-------------------------------------------------------------
오늘은 인문학자가 쓴 미술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저자는 역사, 정치를 공부한 인문학도로서, 프랑스에 거주하며 수시로 루브르
박물관을 드나들고는 큰 재미와 기쁨에 빠집니다.
그것을 책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 4편 정도를 골라 보았습니다.
<키오스 섬에서의 학살>에서는 우리가 잘 모르는 역사이야기가 나옵니다.
나폴레옹시절을 지나고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벗어나려는 독립의 물결이
번지면서 이를 막으려는 진압이 키오스 섬에서 이루어집니다.
잔혹한 학살이 이어졌고, 화가는 이를 상세히 그림으로 전합니다.
미술 저널리즘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이 그림으로 인해 사람들은 정의가
무엇이고 인간 위에 어떤 사상이 존재할 수 있는가 생각해 볼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시몽 부에의 그림인데, 비유와 상징이 그림 속에 들어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사실 근대 이전에 중세만 해도 사람들을 계몽하기 위해서
그림을 많이 사용하였지요. 기독교에서도 보면 성화를 통해서 글 모르는
교인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려면 그림 속에는 당연히 상징과 비유의 대상
이 그려지고 이를 통해 의미의 전달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보석은 물질적 풍요, 책은 지적 풍요, 아기천사는 영적 풍요를 의미하군요.
세 번째 그림은 아카디아라는 지상의 파라다이스에도 죽음은 늘 함께 있다는
것을 화가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 육화한 죽음의 여신이 곁에
있고 목동들은 아카디아 이곳에도 죽음은 있다는 비문을 읽고 있습니다.
아카디아는 지금 살고 있는 바로 자신의 장소를 의미할 것입니다.
하지만 화가는 죽음을 그렇게 무섭게 묘사하지는 않았네요. 누구나 인간은
반드시 맞아야 하는 죽음을 무서워하지 말고 담담하게 받아들여라는 말일까요?
마지막 그림은 노인과 소년이 함께 그려진 그림입니다. 이 당시 이러한 형태의
그림은 잘 없었다고 하네요. 대부분 성화이고, 초상화 개념이라면 화가를 바라
보는 시각의 인물이 있어야 하는데, 이 그림은 노인과 소년이 신뢰와 애정을
가진 눈으로 바라보는 그림입니다. 500년이 지난 지금도 두 사람의 눈길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말이 생각나는 책입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서 그림들을 보면, 대개가 비슷해 보이고 그냥 얼른
지나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배경 지식을 가지고 그림을 보니
훨씬 많은 것이 보이고 느껴집니다.
예술의 힘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자기가 살고 있는 현실을 다르게 볼 수
있는 힘을 준다는데 있다고 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