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과 음악”
<클래식을 뒤흔든 세계사> 니시하라 미노루
- “프랑스 혁명과 음악”
강 일 송
오늘은 서양음악을 통한 세계사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역사는 정치, 경제, 종교 등과 뗄 수 없는 관계로 연관되어 흘러갑니다.
또한 예술과도 마찬가지인데, 오늘 이야기하는 클래식 음악도 그 시대의
사회상에 따라서 만들어지고 연주되었습니다.
오늘 저자는 니시하라 미노루(1962~)로, 음악사회사를 전공하고 도쿄예술
대학 대학원을 거쳤으며, 현재 토호가쿠엔 대학 음악학부 교수로 있습니다.
음악가와 음악 작품이 탄생하게 된 사회적 배경을 다각적으로 연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번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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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혁명과 가치관의 전환
프랑스 혁명은 음악과 그 음악을 듣는 사람들, 그리고 작곡가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을까? 이 대사건은 사람들의 사회생활뿐만 아니라 가치관, 생활
관, 음악,미술,연극 등의 예술에 대한 관점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이 사건은 분명 시대의 패러다임을 변화시켰다.
프랑스 혁명은 단순히 절대왕정의 타도라는 정치적 변동이나 극단적인 빈부의
격차에서 비롯된 경제적 개혁만은 아니었다. 이미 퍼져있던 계몽주의 사조와
낭만주의적 경향도 이 혁명과 관련이 있다. 궁정이 절대적인 왕권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을 가지지 못했던 독일에서는 1770년대부터 시작된
계승 전쟁과 화려한 궁정생활을 유지하는데 들어간 지출에 상응하는 수입구조
를 확립할 수 없었기에 궁정재정이 파탄나면서 몰락 귀족이 속출했다.
프랑스 혁명은 또한 과거 궁정 문화와 음악활동을 폐하는 동시에 완전히 새로
운 음악 문화를 창출했다. 혁명 식전의 각종 공연에서 연주된 취주악과 합창
으로 편성된 음악은 이 시대의 산물이다.
◉ 글루크 “아울리데이 이피제니”
- 국왕을 찬미하는 음악가들
1789년 7월 14일, 쌓여만 가던 프랑스 민중의 불만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
는 형태로 폭발했다. 왕권과 신분제도, 부의 불균형 등 봉건제도 그 자체를
겨냥한 혁명은 사회 구조와 사람들 인식의 대전환을 의미했다.
열기에 휩싸인 혁명 속에서 음악가들은 어떤 행보를 보였을까?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앞으로 혁명이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해 당시
국왕 루이 16세를 비롯해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1790년 6월에 초연된 장 바티스트 르무안의 오페라 “이집트의 루이9세”는
13세기 프랑스왕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 목적은 태양왕 루이 14세의 옛
영화를 예찬하기 위한 것이었다.
혁명 전후 시대에 글루크는 국왕 측의 작곡가였다. 1773년부터 공연된 “아울
리데의 이피제니”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찬미하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폭동이 마침내 분명한 혁명의 형태를 띠어갈 즈음 궁정을 주된 활동 무대로
삼은 음악가들에게도 시련이 닥쳐왔다. 그들은 궁정이냐, 민중이냐 어느 쪽에
설 것인가를 명백히 하도록 강요받았다.
◉ 고세크 “자유의 축전”
- 혁명을 지지한 음악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다양한 혁명가가 불렸고, 민중의 열기는 고무됐다.
혁명 식전의 축제 분위기를 가장 고조시킨 것은 대취주악으로 연주된 식전
음악이었다. 이 식전음악은 고세크 이외에, 메율, 루 슈르, 루이 엠마누엘
쟈단 등이 주로 만들었고, 지도력과 혁명에 대한 공감, 작품의 가치, 대중
들에게 준 감동으로 본다면 고세크가 가장 중요한 작곡가였다.
고세크는 벨기에 출신의 작곡가로 하이든보다 열 두 살 정도 어렸고, 베토벤
과 슈베르트가 사망한 뒤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789년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혁명에 공감하여 오페라 극장 부속 가창학교
교장을 비롯해 오페라 극장에서 맡은 일을 모두 그만두고, 베르나르 사례트
와 함께 국민위병군악대의 지휘과 지도를 맡았다.
고세크의 작품은 혁명의 추이를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이었다. 1790년 작곡한
“장송행진곡”은 낭시 전투의 희생자를 추도하기 위한 작품으로, 취주악으로
편성된 식전음악의 최초 작품이기도 했다.
1791년 자유의 축전 행사에서도 고세크의 “자유의 축전”, “국민의 윤무”가
연주되었다.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가 처형되었다. 이 처형은 혁명의 절정으로 고세크
는 이 처형을 축하하는 식전을 위하여 “공화국의 승리”를 작곡해 오페라
극장에서 상연했다. 이 축전극은 국왕의 처형에 대한 청중의 흥분에 휩싸여
큰 갈채를 받았다.
◉ 프랑스 문화를 즐기는 반혁명 도시, 빈
- 18세기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퍼진 프랑스 오페라의 유행
베토벤은 1804년 프랑스의 루이 원작의 오페라를 창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빈 체제의 본거지이자 반혁명, 반나폴레옹 풍조가 강한 빈에서 왜
베토벤은 프랑스인 원작의 오페라를 작곡하려고 한 것일까.
이것은 단순히 베토벤의 창작 의사에 국한되지 않고 19세기 초 빈 지역
사람들의 프랑스 취향과 깊은 관련이 있다.
프랑스 혁명 후, 빈은 엄격한 검열제도를 두고 혁명뿐만 아니라 프랑스
문물이 빈에 끼치는 영향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오페라와 대본은 꾸준히 빈에 유입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에 의해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된
것은 합스부르크가 사람들을 뒤흔들어 놓았다. 혁명의 여파가 오스트리아
영내에 미칠 것을 염려해 이후 프랑스 사상과 문학, 연극 등은 철저한
검열을 거치게 되었다.
18세기 독일에 있어서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은 눈부시게 화려함 그 이상이었다.
로코코 양식의 섬세한 장식은 선망의 대상이었고, 프랑스 문학이나 연극,
무용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계몽 사상은 독일 각지로 전파되었으며 독일
북부인 베를린뿐만 아니라 중부 독일의 라이프치히 등의 도시에도 프랑스
취향이 유입되면서 프랑스 오페라가 상연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시에는 잠시 수그러들었다고는 하지만 빈 회의 의정서가 체결
되어 나폴레옹 전쟁이 종결되고, 다시 구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확정되자 프랑스
의 오페라가 빈에서 다시 빈번하게 상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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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음악이 세계사와 어떻게 연동되어 만들어지고 유행되어 왔는지를
프랑스 혁명과 관련지어 들어보았습니다.
서두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역사는 정치,경제,사회,예술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흘러왔습니다.
유럽의 작곡가들은 혼자서 독립하여 작품활동을 할 수 없었기에 왕정이나
귀족과의 관계를 통해 음악활동을 해왔는데, 프랑스 혁명과 같은 대변혁이
일어나자 음악가들도 선택을 강요받게 됩니다.
글루크와 같이 구왕정을 찬미하는 음악을 해오던 시절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고세크와 같이 혁명의 정신에 동조하는 음악가들이 대세를 이루게 됩니다.
혁명과 동시에 화려했던 궁정의 예술들은 중단이 되고, 민중의 의지를 고취
하는 음악들이 식전행사를 달구게 됩니다.
주변국들을 본다면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는 화려하고 선진문물을 가진 프랑스
문화의 유입이 혁명으로 인해 검열이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늘어납니다.
프랑스의 계몽 사상과 혁명 정신도 자연스럽게 퍼져나가게 되지요.
베토벤도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고 “영웅교향곡”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자 헌정을 취소하였지만 말입니다.
이처럼 음악은 미술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의 사회상과 사상, 분위기를 반영
하는 거울과도 같았습니다.
프랑스 혁명과 같이 시대상이 급변할 때는 더욱 그러하였구요.
오늘 한 주의 시작 힘차게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