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中, 플라톤 아카데미 총서
<인간의 한계> 김상근
- “나는 누구인가”中, 플라톤 아카데미 총서
강 일 송
오늘은 인간의 본질을 찾아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를 두고 7인의 인문
학자들이 쓴 책을 보려고 합니다. 그중 연세대 신과대학의 김상근 교수의 글을
보겠습니다.
저자는 이전에 소개한 “키로파에디아”, “마키아벨리”를 저술하였습니다.
김상근 교수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데,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을
졸업하고 사우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교, 에모리대학교에서 석사를, 프린스턴 신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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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이란
인문학은 “후마니타스, humanitas, 인간다움”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던 키케로
(BC 106-43)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키케로는 공화정 말기에 활동했던 변호사
이자 정치가이며 사상가입니다.
키케로가 처음 후마니타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의 의미는 “탁월함을 습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합니다.
즉, 인문학은 힐링이나 이데올로기 비판의 도구가 아니라, 탁월함을 추구해서
역사적인 인물로 만들기 위한 공부의 훈련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대가 종결되고 유럽의 중세 시대가 전개되면서 키케로의 인간다움이
‘인간의 의무’로 변했습니다. 중세 대학의 교과 과정에서는 논리, 수사학, 문법
을 가르치는 3학과(trivium)와 수학, 기하학, 음악, 천문학을 가르치는 4학과
(quadrivium)가 있었습니다. 이를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학문’이라는 의미의
‘자유학예’라고 하는데요, 미국의 리버럴 아츠(liberal arts)가 바로 거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중세 대학은 점점 전문화되어 갔습니다. 신학, 법학, 의학이 중심이었던 중세
대학의 학문은 세분화되고 지나치게 전문화되었습니다. 이럼으로 현실세계와
학문이 결별하는 현상이 나타났지요.
이런 상황에서 14세기부터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상공인 계급들이 등장하기 시작
했습니다. 또한 십자군 전쟁이 끝나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권이 점차 강화되었
습니다. 경제가 부흥되고 상공인들이 등장하면서 새롭게 생긴 문화운동을
우리는 르네상스(renaissance)라고 부르지요.
이들은 전혀 다른 학문적 수요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사업과 삶에
도움이 되는 학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피렌체에서 인문학이 탄생
한 것입니다.
◉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라
마키아벨리는 1520년대 초반에 사소한 임무를 띠고 피사 인근의 작은 도시 국가
인 루카에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 피렌체 상인과 루카 상인 간에 채권 문제가
발생했는데 해결사로 갔던 것입니다. 그때 마키아벨리는 14세기 초반에 루카를
통치했던 전설적인 용병 대장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에 대해 듣게
됩니다. 그리고는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라는 책을 씁니다.
마키아벨리는 이전에 <군주론>을 써서 메디치 가문에 헌정을 했지만, 그 내용에
대해 이 무렵에는 깊은 참회와 반성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군주론 이후
카스트루초를 새로운 모델로 삼고 책을 쓴 것이지요.
카스트루초는 13-14세기 이탈리아를 풍미했던 루카의 용병 대장이었습니다.
그는 사생아로 태어나 포도밭에 버려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대개의 영웅들이
그러하듯이 어릴 때부터 고난과 눈물의 시절을 보냅니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리더십이 뛰어난 인물로 성장했고, 열여섯 살 무렵, 루카의
용병 대장이었던 프란체스코 귀니지가 양자로 입양합니다. 얼마 후 귀니지가 사망
하게 되고 귀니지 가문을 대표하여 용병 대장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적 상황은 복잡했습니다. 전통적으로 교황파가 득세하고
있던 이탈리아였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권을 지지하는 이른바 황제파의 도전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전 유럽도 마찬가지여서 교황파와 황제파로 갈라져서 대립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교황파는 구(舊)엘프당으로, 그리고 황제파는
기벨린당으로 불렸지요.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각각 구엘프당과 기벨린당으로
분열되어서 서로 전쟁을 거듭했습니다.
새로운 산업이 일어났던 피렌체에서는 중산층과 신흥 귀족이 많았기 때문에
교황파인 구엘프당이 우세했고, 전통 귀족과 지주가 많은 피사와 밀라노 사람들은
황제파인 기벨린당에 속했습니다.
루카는 중립지역이었는데, 카스트루초는 인근 피사의 용병 대장 우구치오네의 지원
을 받으며, 루카의 구엘프당 축축 작전에 돌입합니다. 자신이 장악하고 있던
루카를 기벨린당의 도시국가로 만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는 성공을 하였고, 루카에서 축출당한 구엘프당은 피렌체로 피신해 도움을 요청
했습니다. 이후 카스트루초는 피렌체와의 전투가 벌어진 몬테카티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로마의 식량 폭동까지 진압하면서 로마의 원로원으로 추대되기
까지 합니다.
숱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계속되는 반란을 모두 진압해서 자신의 위상
을 굳건하게 지키던 그는 탁월함의 화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카스트루초는
푸체치오 전투를 마치고 귀환하는 부하들을 기다리다가 감기에 걸려 죽고 말았
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천하의 카스트루초가 감기에 걸려 죽었다니 말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이 황당한 카스트루초의 최후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카스트루초는 정말 탁월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했고, 누구보다 탁월한 삶을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군주론>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는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감기에 걸려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카스트루초를 이용해서 <군주론>의 내용을 뒤집고 있는 것입니다.
책략을 써서 늘 승리를 거두고, 상대방의 기선을 제압해서 성공을 거두는 삶도
다 무의미하다는 뜻이지요. 그렇게 살아본들 감기에 걸려 죽게되는 인간의
부질없는 운명이란 것입니다.
탁월함, 즉 비루투스(virtus)의 삶보다 우선하는 것은 행운, 즉 포르투나(fortuna)
의 힘에 굴복당하는 인간의 유한함이란 것입니다. 이런 유한함에 노출되어 있는
인간은 먼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포르투나의 지배에 노출되어 있는 인간은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 인문학적 통찰
다시 정리를 해보자면, 먼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자기애 말고, 올바른 일을 하고 절제가 동반된
탁월함을 추구하는 것에서 남들보다 앞서겠다는 ‘자기애’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의 삶에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고 본인도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타인의 비난과 반대가 있더라도 그것이 바른 길이라고 판단되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합니다.
세 번째로 카스트루초의 삶을 통해 보았듯이, 인간의 유한함에 대해 깨달아야
합니다. 탁월함의 화신처럼 살았던 카스트루초도 인간의 유한한 운명을 비껴가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문학의 첫 출발이고
그것이 인문학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문학이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 보겠습니다.
인문학이 추구하는 기본 가치는, 나 자신에게 진실된 삶, 이웃과 더불어 사는
도덕적인 삶, 그리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멋진 삶과 의미 있는 죽음을 위해
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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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인문학 중, "나"를 찾는 주제의 책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동물과 같이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다양한 유산을 가지고
생활을 합니다. 심리학 같은 학문에서도 그러한 성향을 밝혀 내기도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를 알기란 무척 힘이 듭니다.
이럴 때, 위대한 선현들의 인문학적 성찰에 대한 글들이 우리의 앞을 비춰
주는 등불이 되기도 하지요.
오늘은 김상근교수의 글을 보았습니다.
마키아벨리의 또 다른 저서인 <카스트루초의 생애>를 보았는데요,
탁월한 인물이었던 그가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고, 막강한 권력과 명예를
가지게 되었지만, 한낱 감기로 순식간에 목숨을 잃게 됩니다.
탁월함, 즉 비루투스(virtus)의 삶보다 우선하는 것은 행운, 즉 포르투나(fortuna)
의 힘에 굴복당하는 인간의 유한함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지요.
인간의 유한함, 한계를 절감하는 일은 다반사로 역사에서 보여집니다.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도 그 마감은 허무한 경우가 많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그랬고, 시이저도 그랬으며, 체사레 보르자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인문학에서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자신의 유한함과 부족함을
알고 겸손해져라고 합니다.
김상근 교수가 말하는 인문학이 추구하는 가치를 한번 더 되새기고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나 자신에게 진실된 삶,
이웃과 더불어 사는 도덕적인 삶,
그리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멋진 삶과
의미 있는 죽음을 위해 사는 것"
이런 삶을 함께 추구해 보시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