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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Nov 26. 2016

<언어의 온도>

<언어의 온도> 이기주

                 강 일 송

오늘은 일상에서 건져 올린 따뜻한 에세이집을 하나 보려고 합니다.
저자는 우리 언어에는 나름의 온도가 있다고 합니다. 온기 있는 언어는
슬픔을 감싸 안아준다고 하고, 너무 뜨거운 언어에는 정서적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언어는 상대의 마음을 닫게 하고
얼어붙게 만듭니다.

작가이자 출판인인 저자는 말글터 대표를 맡고 있으며, 아주 간단한
프로필만 제공을 합니다.
“글을 쓰고 책을 만든다. 쓸모를 다해 버려졌거나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 쓴다. 가끔은 어머니 화장대에 은밀하게 꽃을 올려놓는다.”
작가다운 프로필 소개이네요^^.

그의 글 몇 편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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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틈, 그리고 튼튼함

대학 때 농활을 갔다가 작은 사찰에 들어간 적이 있다. 마당 한가운데에
석탑 하나가 기품을 뽐내며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석탑이었다. 세월과 바람을 견딘
흔적이 역력했다.
“얼마나 됐을 것 같나?”
주지 스님인 듯했다. 그는 하루에도 서너 번씩 마주치는 옆집 아이에게
안부 인사를 건네듯 편안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이곳에 있는 석물(石物)은 수백 년 이상 된 것들이 대부분이야. 참 이런
탑을 만들 땐 묘한 틈을 줘야 해.”
“네? 틈이라고 하셨나요?”
“그래, 탑이 너무 빽빽하거나 오밀조밀하면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폭삭 내려앉아. 어디 탑만 그렇겠나. 뭐든 틈이 있어야 튼튼한 법이지.”

스님이 들려준 이야기가 건축학적으로 타당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동안 내 삶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던 감정과
관계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돌이켜보니 지나치게 완벽을 기하는
과정에서 중심을 잃고 넘어지게 만든 대상이 셀 수 없이 많았던 것 같다.
틈은 중요하다. 어쩌면 채우고 메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지 모르겠다.
다만 틈을 만드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 사랑이란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어느 가을이었다. 급하게 작성할 원고가 있고 해서 작은 카페에 들어가
노트북을 켰다. 커피 향에서 가을 냄새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카페 구석에 꽂혀 있는 시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릴케의 시가 들어 있어
보는 중 문득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어느 책에선가 읽은 ‘사랑의 어원’
에 미쳤다.

사랑이란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여기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어떤 학자는 사랑이 살다의 명사형일 것으로
추측한다. 하지만 나는 생각할 사와 헤아림을 의미하는 한자 양(량)을 조합한
‘사량’에서 유래했다는 설을 가장 선호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랑을 하면 상대에 대한 생각을 감히 떨칠 수 없다. 상대의
모든 것을 탐험하려 든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상대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우주, 하나의 시대이므로...

어제는 노트북을 켜고 ‘사람’을 입력하려다 실수로 ‘삶’을 쳤다. 그러보 보니
‘사랑’에서 슬며시 밭침을 바꾸면 ‘사랑’이 되고 ‘사람’에서 은밀하게 모음을
빼면 ‘삶’이 된다.
몇몇 언어학자는 사람, 사랑, 삶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본류를
만나게 된다고 주장한다. 세 단어 모두 하나의 어원에서 파생했다는 것이다.
세 단어가 닮아서일까. 사랑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사랑이
끼어들지 않는 삶도 없는 듯하다.

삶의 본질에 대해 우린 다양한 해석을 내놓거나 음미하기를 좋아한다.
헤밍웨이는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으나 패배하진 않는다”고 했고, 어느
작가는 “작은 인연과 오해를 풀기 위해서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읊조렸다.
“우린 다른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영화
대사도 한 번쯤 되새길 만하다.

나는 어렵게 이야기하기보다 ‘사람’, ‘사랑’, ‘삶’, 이 세 단어의 유사성을
토대로 말하고 싶다.
사람이 사랑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삶이 아닐까?

◉ 나이를 결정하는 요소

“나이를 결정하는 건 세월일까, 생각일까?”
“늙는다는 것은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처럼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질문이 가슴 한구석에서 살금살금 고개를 들
때가 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문장이 가장 먼저 떠올랐는데, 그건
광고 카피라이터가 만들어낸 카피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나이의 한계는 엄연히 존재한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간과 세월만으로 나이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이를 좌우하는 뜨거운 용광로가 있다고 치자. 거기에는 건강이나
신체적 상태가 가장 먼저 들어갈 테지만, 인간의 감정과 생각, 상상력, 그리고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같은 요소들도 뒤섞이기
마련이다.

단순히 ‘젊음’을 잃으면 ‘늙음’이 될까?
삶은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에 불과할까?

글쎄다. 어떤 이는 ‘늙은 젊은이’로 불리고 또 어떤 사람은 ‘젊은 노인’으로
불리는 것을 보면 ‘늙음=나이 듦’이라는 등식이 꼭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늙음은 무엇인가 하는 이 만만치 않은 질문에 여전히 나는 답을 하지 못하
겠다. 다만 ‘낡음’이 ‘늙음’의 동의어라는 주장에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느끼는 일과 깨닫는 일을 모두 내려놓은 채 최대한 느리게 생을 마감하는
것을 유일한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순간, 삶의 밝음이 사라지고 암흑같은
절망의 그림자가 우리를 괴롭힌다. 그때 비로소 진짜 늙음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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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에세이 3편을 함께 보았습니다.
오늘 이 젊은 저자는 나이에 비해 조숙하고 사려가 깊은 글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글이나 말은 이 책 제목처럼 나름의 온도가 있을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배어 있는 글은 따뜻한 온도를 보여줄 것이며,
무관심과 냉정함이 배어 있는 글은 당연히 차가울 것입니다.

첫 번째 글은 대학시절 자그마한 암자에 가서 세월을 먹은 석탑을 보고
주지스님과 대화를 나눈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탑은 묘한 틈이
있어야 하고, 너무 빽빽하거나 딱 맞으면 오히려 비바람에 내려 앉는다고
말이지요. 참 통찰이 깃든 말입니다.
삶도 너무 여유가 없이 빡빡하게 살다보면 어딘가 탈이 납니다.
빈 여백과 빈 마음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생존을 위한
필수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두 번째 글은 사람, 사랑,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도 글을 컴퓨터로
타자치다 보면 오타가 자주 나는데, 저자의 경험처럼 사람과 삶이 바꾸어
쳐지는 경우가 있더군요. 저자의 주장처럼 사람, 사랑, 삶의 어원이
한 뿌리에서 나왔든지 아닌지 그게 뭐가 대수일까요? 사람은 사랑을 할 수
밖에 없고,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어쨌든 삶을 살아내어야 합니다.

세 번째 글은 나이듦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 젊은
사람에 비해 확률상 철이 더 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항상 적용
되는 것은 아니어서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욕심의 늪에 갇혀서 사는 철없는
어른들도 많이 보입니다.
그래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카피는 진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잘 나이가 드는 것, 잘 성숙하는 것, 잘 익어가는 것이 갈수록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주말의 시작입니다.
행복한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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