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노자(老子,BC 600년경)의 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노자는 장자와 더불어, 유가(儒家)와 쌍벽을 이루는 도가(道家)의 창시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전에 현 저자의 글로 <장자를 읽다>를 한번 소개해 드린 적이 있었고, 오늘은 이어서 노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자인 양자오는 중화권의 대표적인 인문학자이고 대만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습니다. 타이베이 예술대학 주임교수를 역임하고 언론, 출판, 교육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벌이는 인문학자입니다.
한 번 내용을 보겠습니다.
◉ 노자는 세 가지만을 말한다.
진(秦)나라 이전의 모든 저서 가운데 <노자>는 가장 권위적인 문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표현 방식이 직접적이고 명확하여 논의의 여지가 없습니다. <논어>와 비교하면, 묻고 답하는 대화는 없이 오직 답안만 제시되어 있을 뿐이지요. 또한 노자에는 논쟁도 없습니다. 변론은 없고 오직 설교만 있습니다.
<노자>의 또 다른 특징은 내용이 지극히 간단하다는 점입니다. 흔히 <노자>를 가르키는 ‘노자 5천 언(言)’ 또는 ‘도덕경 5천 언(言)’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전체가 약 5천 자에 불과합니다. 글자 수로만 따지면 <장자>의 비교적 긴 장(章) 하나와 비슷한 분량입니다.
<노자>에서 알리고자 하는 첫 번째 내용은, 만물에 앞서는 “도(道)”의 존재입니다. 노자에서 말하는 ‘도’는 모든 사물을 관할하고 통솔하는 주재자입니다. ‘도’가 이처럼 만물을 관할 통솔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어떤 개별 원리로부터 도출된 것도 아니고 무엇에 의해 지배당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내용은 ‘도’에 대한 이해입니다. 여기에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자세가 꼭 필요한데, 특히 분별이 생기기 전의 모습으로 물러서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분별이란 항상 상대적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긺(長)‘은 짧음이 있음으로 해서 생기고, 높음은 낮음이 있음으로 해서 생기며, 선은 악이 있음으로 해서 생깁니다. 분별에 맞닥뜨리면 우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그러한 분별이 생기기 전의 ‘혼돈’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고 노자는 주장합니다. 일체의 이러한 분별이 생기기 전의 ‘대혼돈’, 그것이 바로 ‘도’입니다. 분별을 없애고 ‘혼돈’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노자>는 <장자>와 아주 유사합니다. 장자는 시종일관 우리에게 ‘혼돈’이 시각으로 바라본 세계를 보여주며, 이는 보통 사람들이 분별을 통해 바라본 세계와는 크게 다릅니다. 장자는 이 혼돈으로 들어가 보라고 권합니다.
세 번째 노자의 내용은, 어떻게 하면 ‘도’에 따라 적확하고도 효과적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노자의 이 내용은 ‘주(主)’, 즉 군왕, 또는 지배층을 상대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권력을 쥔 사람이 어떻게 권력을 운용할지에 대한 내용을 가르쳐 줍니다.
◉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궁극의 것
<노자> 제1장 서두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이 문장은 우리에게 모순을 보여 주는 듯 하지만 그 속에 중요한 진리가 가득 들어 있는 역설의 문형입니다. “도”의 특성은 영원불변한다는 것입니다. 어지럽게 변화하는 현상 속에서 만물의 변화를 관할하는 것이 도이고 이 도로써 이런 변화의 근본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부여한 이름으로는 그 사물을 진정으로 대신할 수 없습니다. 눈앞에 있는 사물을 ‘컵’이라 부르면, 이미 그 사물이 지닌 남다르고 복잡한 여러 성질을 감추고 없애게 됩니다.
“무(無)는 천지의 시작이라 말하며, 유(有)는 만물의 어머니라 말한다.”
천지가 시작하는 상태는 ‘무’이고, 만물이 생겨남으로써 ‘유’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항상 무에서 도의 오묘한 본체를 보아야 하며, 항상 유에서 도의 드러난 작용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의 상태로 들어가 사색함으로써 그속에 감추어진 심오함과 오묘함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며, 유의 상태로 들어가 사색함으로써 겉으로 드러난 사물의 원칙을 이해하게 됩니다.
◉ 장자와 노자
<장자> “추수(秋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혜자(惠子)가 양나라 재상이 되자 장자가 혜자를 만나러 양나라로 향했는데, 이때 어떤 자가 혜자에게 이르기를 “장자가 우리나라에 와서 공을 대신하여 재상이 되려 한답니다.” 이 말에 걱정이 된 혜자는 국경으로 사람을 보내 밤낮으로 장자의 행적을 좇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장자는 계획대로 양나라로 와 혜자를 만나 이야기합니다.
“남방에 원추라고 하는 새가 있는데, 이 새는 남해를 출발하여 곧장 북해로 날아간다네.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를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아.그런데 썩은 쥐를 문 올빼미가 날아가는 원추를 보고 혹 그 썩은
쥐를 빼앗길까봐 머리를 들어 ‘꽥’하고 소리를 질렀다고 하네. 지금 자네는 양나라 재상 자리 때문에 나에게 ‘꽥’하고 소리를 치겠다는 것인가?”
이것이 정치권력을 대하는 장자의 기본 태도입니다. 권력을 쟁취한 사람도 행여 잃어 버릴까봐 항상 걱정하는데, 장자의 눈에는 정치권력이란 전혀 돌아볼 가치도 없는 ‘썩은 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노자는 권력을 좀 달리 보았습니다. 노자와 장자는 둘 다 ‘도(道)’를 근본으로 삼아, 모든 현상과 변화의 이면에는 일체의 자연을 움직이는 법칙이 있다고 믿었고, ‘도’가 그 법칙의 주재자라고 믿었습니다. 장자는 도를 명료하게 깨우치면 우리가 지키려는 가치의 실제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으며, 그러한 가치들이 사실은 편협한 자기중심적인 시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도를 명료하게 이해하면 그러한 외부 기준에 자신을 함몰시키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노자는 “도”를 이해하는 목적은 처세와 권력에 운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도'를 이해하는 사람은 '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권력을 사용하고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노자의 도는 전쟁이 잇따르는 특수한 시국에서 유용한 제왕의 도이며 그 가치는 노자가 처한 시대와 긴밀하게 연관됩니다. <노자>를 난세였던 전국 시대로 돌려 놓으면 '무위'의 진정한 뜻이 어지러운 세상을 슬퍼하고 백성을 가엾게 여기는 적극적인 관심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노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노자와 장자는 "도가" "노장사상" 이라고 일반적으로 묶어서 설명을 많이 합니다만, 사실 이 두 사상은 하나로 묶여 있는 게 이상할 정도입니다. "도(道)"를 추구하는 것은 같지만, 그 방법이 너무나 다릅니다. 노자는 현실 참여형, 정치권력 추구형이라면, 장자는 현실 도피형, 정치권력 무위형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저자는 이러한 차이를 전국시대의 특수한 상황을 알면 이해가 된다고 말합니다. 너무나 혼란스럽고 매일 전쟁의 틈바구니 안에서 백성이든 군왕이든 안정적인 생활과 편안함과는 먼 일상속에서 진정 백성을 위한다면 제대로 정치의 도가 서야 한다고 노자는 믿었는 듯 합니다.
장자는 정치권력을 "썩은 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자연을 공간으로 삼아 유유히 도에 따라 살기를 원합니다. 좁고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무한광대한 자연의 품에서 통넓게 살라고 합니다.
유가(儒家)든 도가(道家)든 자세히 들여다 보면, 백성이 항상 그 중심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지금의 상황도 난세라고 본다면, 250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선현들의 경험의 말씀들을 자세히 귀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는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