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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Apr 24. 2017

<십자군 전쟁과 무역도시>

-- “경제로 읽는 교양 세계사” 中

<십자군 전쟁과 무역도시>
-- “경제로 읽는 교양 세계사” 中

                           강 일 송

오늘은 경제를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본 책을 한 권 보려고
합니다.
경제의 관점에서 역사와 접목을 시도한 신선한 방식의 책이
었는데요, 오형규 저자는 서울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
하고, 서강대학교 경제대학원에서 공부했다 합니다.
현재는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 “경제학, 인문의 경계를 넘나들다.”, “자장면 경제학”,
“카너먼이 들려주는 행동경제학이야기”등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중, 십자군전쟁을 매개로 한 경제이야기를 해보겠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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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람 제국의 형성

유럽이 중세에 접어든 이후, 지금의 이라크, 이란 지역에는
알렉산드로스 원정 후에는 큰 세력이 없다가, 3세기 경에
이란 북부에 파르티아(안식국)가 건국해 로마에 대항했다.
뒤이어,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파르티아를 복속하고 통일을
시켰는데, 610년 무함마드가 유일신 알라를 섬기는 이슬람교를
세운다.
632년 무함마드 사후에 후계자인 칼리프가 다스리는 정통 칼리프
시대를 거쳐 시리아, 이집트, 사산왕조 페르시아를 정복한다.

이슬람 세력은 세계사에 발자취를 남긴 두 차례 큰 전투를 벌였
다. 먼저 711년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킨 후
732년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침략해 들어왔다.
프랑크 왕국은 투르-푸아티 전투에서 간신히 저지해 기독교
세계의 이슬람화를 막았다.
또 하나는 아바스 왕조가 751년 중앙아시아 탈라스 강 유역에서
당나라와 싸워 이긴 것이다. 여기서 제지 기술자들이 포로로
잡혀가 종이가 이슬람세계로 전해졌고, 중앙아시아에 이슬람교
가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 열정과 탐욕의 십자군 원정

11세기 후반 이슬람 제국을 지배한 셀주크왕조는 기독교와 이슬람
교의 공동 성지인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비잔티움 제국에 압박을
가했다. 특히 기독교인의 성지순례를 금하면서 유럽에는 반이슬람
정서가 확산했다.

이때의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는데,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성지 수복’을 명분으로 십자군 원정을 결의
했다. 교황은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라며 화려한 웅변으로 왕과
영주들을 부추겨 성사를 시켰다.
그러나 교황의 진짜 속셈은 1054년 분리된 동서 교회를 재통합
하고 유럽에서 교황권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십자군 원정 직전 유럽은 농기구 개량과 삼포농법으로 농업생산성
이 높아져 인구가 늘었다. 인구 증가와 농지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대외팽창 압력이 커지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원인이 맞물려 1096년 드디어 200여 년에 걸친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다. 기병 5,000명, 보병 3만 명의 1차
십자군은 1096년 제노바 해군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을 학살하며 ‘전혀 성스럽지 못한 성전’을 시작
했다. 이슬람 제국에 아이유브왕조를 연 살라딘은 십자군의 학살
에 보복하기 위해 성전을 지휘해 1188년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이후 양측은 평화협정을 체결해 십자군이 물러가고 살라딘은 기독
교도의 성지 순례를 보장했다.

십자군의 종교적 열정이 완전한 탐욕으로 변한 것은 4차 원정이었
다. 배와 식량을 제공한 베네치아의 제안을 받아들여 헝가리의
점령지를 공격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했다.
같은 기독교권을 공격한 것이다. 십자군과 베네치아는 비잔티움
제국을 분할해 라틴제국을 세웠다.

뉴 밀레니엄을 맞은 2000년에 로마 교황청은 십자군 원정 때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플, 베이루트 등지에서 교회가 저지른 부끄
러운 과거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다. 오도된 종교적 열정과
야만적 만행을 참회하는 데 700년이 걸린 셈이다.

★ 십자군 원정은 유럽에 남는 장사

십자군 원정은 성지 탈환이 명분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가 더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가장 절실했던 것이
이슬람 제국에 막힌 교역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십자군 전쟁 200년의 손익계산서를 뽑아보면 유럽이 여러 면에서
이득을 봤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이슬람제국은 이미 절정기에 이른 선진문명이었다. 반면에
유럽이 이슬람에 보여준 것은 전쟁과 학살, 약탈, 말고는 없었다.
유럽은 폐쇄적이고 자급 경제인 장원을 벗어나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십자군 원정으로 도시와 교통로가 되살아나고 상파뉴, 한자동맹
등의 상업이 활성화되었다. 또한 봉건영주들이 몰락하고 왕권과
시민권이 강화되어 근대국가로 이행할 토대가 형성되었다.
또한 십자군 원정의 실패로 교황의 권위가 실추되어 중세의 억압적
구조에서 벗어나 종교개혁으로 이어지는 단초를 만들었다.

★ 유럽에 없던 이슬람의 선진 과학 문명

중세 시대에 유럽이 농업 사회였을 때, 이슬람 제국은 상업을 챙겨
신용을 중시하였다. 무함마드가 상인 계급 출신이었기도 한데,
그 시절 중국과 고려의 벽란도까지 드나들었을 정도다.
이슬람 상인들은 금화나 은화로 거래했고, 교역 규모가 커지자
수표, 어음까지 사용했다. 심지어 바그다드에서 발행한 수표를
아프리카 북서부 끝인 모로코에서 현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고 한다.

다양한 지식도 왕성하게 발전했는데, 인도 숫자를 개량해 아라비아
숫자를 만들었다. 편리한 숫자를 토대로 복식부기와 수학도 발달
했다. 천문학이 발달했고, 별의 고도로 위도를 측정하는 천체
항법을 통해 먼바다까지 항해할 수도 있었다. 갈릴레이보다 수 세
기나 앞서 지동설을 주장한 학자도 있다.
즉, 16세기까지 이슬람은 지식 면에서 유럽에 절대 우위였다.

이슬람의 대도시에는 종합 번역연구소라고 할 만한 ‘지혜의 집’이
세워져, 그리스, 인도, 페르시아의 문헌들을 아랍어로 대거 번역
했다. 아랍어로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11세기 이후 라틴어
로 재번역되어 유럽에 전해졌다.
또한 이슬람의 상업과 화학, 의학, 천문학의 발전은 오늘날 언어
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알코올 alcohol, 알칼리 alkali, 십진법 algorism, 대수 algebra,
거즈 gauze, 견우성 altair, 직녀성 vega, 설탕 sugar, 면 cotton,
수표 check, 제독 admiral 등이 모두 아랍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슬람의 축적된 지식은 유럽을 일깨우는 자극제였다.
그럼 점에서 이슬람은 근대 유럽의 스승이라고 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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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역사를 보는 프레임을 "경제"로 해서 읽어보는 책을 함께
보았습니다.  이전에 철학의 창을 통해서 본 역사를 본 적도
있었습니다만,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각으로 봤을 때 전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객체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 내용은 이슬람제국의 형성과 십자군 원장으로 인한 유럽의
변화였습니다. 알렉산드로스왕의 침입으로 페르시아는 멸망하고
공백기를 거쳐 셀주크 투르크에 이르게 된 이슬람세계는 중세의
암흑기를 거치는 유럽과 달리, 엄청난 학문과 문화의 발전을 이루어
냅니다.

동서양 교회의 통합과 교권 확립을 목표로 한 십자군 원정처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역사적 사건은 드물지요. 
소년병들을 모아서 십자군을 구성한 후 이들을 노예로 팔아버린
사건도 있었고, 같은 기독교권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약탈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유럽은 이슬람 세계를 접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
을 할 수 있었고, 이슬람이 보유하고 있던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헌
들이 다시 들어와 르네상스, 종교개혁 등이 일어납니다.

예로부터 역사적인 전쟁은 대부분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명분과
달리, 그 깊은 이면에는 경제적인 동인이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십자군 원정도, 농지 부족으로 인한 대외팽창의 욕구가 바탕에
있었습니다.

역사는 때로는 야만이 문명을 무너뜨리는 경우가 흔한데, 게르만족
에 의한 서로마의 멸망과 몽골군의 침략으로 그 당시 세계 최대, 최고
의 문화도시 바그다드가 불탄 사건이 그것입니다.
물론 몽골군이 북쪽의 유목 루트를 통해서 동서양을 연결한 사건은
두고두고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치긴 하였습니다.

오늘 한 주일의 시작, 힘차게 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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