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청제국의 건설자, 누르하치”와 함께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 “ 청제국의 건설자, 누르하치”와 함께
강 일 송
오늘은 중국의 청나라에 대한 책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로, 주류인 한족(漢族)이 볼 때는
변방의 오랑캐가 침략해서 세운 나라로 인식을 해왔지만, 사실
청나라때 중국의 영토는 가장 방대하였고, 강성하였습니다.
요즘 중국의 지도자들은 청나라의 “강희제”를 본받기 위해 노력
하고 있다 합니다.
오늘 저자인 구범진교수는 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현재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또한 함께 볼 책인 “누르하치”의 저자는 천제센(1932~)교수는
1956년 대만대 역사학과를 나오고 미국의 하버드대 방문학자로
연구생활을 하였으며, 대만대 역사학과 학과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청나라에 관한 두 책을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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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롭게 조명되는 청나라 왕조
과거 청나라는 ‘중국 역사 속의 마지막 왕조’로 일컬어졌다.
하지만 근년 들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청나라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미국 학계에서는 ‘신청사(新淸史)’라는 연구 조류가 형성되어
청의 제국 건설과 성공적인 운영이 적극적인 ‘한화,漢化’에 있다는
종래의 시각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중국에서도 청나라 역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는 마찬가지인데,
티벳, 신장, 내몽골 등 소수민족 자치구에 대한 중국의 주권주장
은 청나라가 남긴 역사 유산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청나라가 전성기를 누리던 1800년경의 영토 범위를 곧
중국사의 ‘역사 주권’이 작용한 공간으로 규정하려 한다.
★ 청 제국의 미약한 시작
청 제국의 시작은 정말 미약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청 태조라 부르는
누르하치는 1583년 군사를 일으켜 주변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
했다. 청나라가 누르하치 시절의 ‘미약한 시작’으로부터 건륭제 시절
의 ‘심히 창대한 나중’에 이르기까지는 약 18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초기의 누르하치는 “아이신 구룬, Aisin Gurun" 을 건설하는데,
‘아이신’은 황금, ‘구룬’은 나라를 뜻하므로 한자로는 “金國”이라고 쓴다.
이후 청태종, 홍타이지의 치세에 내몽골의 유목민을 복속시키고 요동의
한인들을 적극 포섭하여 마침내 다이칭 구룬(Daicning Gurun), 즉
대청국(大淸國)으로 거듭나게 된다.
★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누르하치(1559-1626)는 오늘날 중국의 둥베이(東北)라고 부르는 땅
에서 태어났다. 우리에게는 둥베이보다 만주라는 지명이 더 친숙한데
이 ‘만주’라는 말은 원래 지명이 아니라 청나라를 건설한 핵심 집단의
이름이었다. 이후 이 말이 청나라의 발상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쓰
이기 시작했으며 영어로도 ‘Dongbei'보다는 우리말의 만주에 해당
하는 ‘Manchuria’라는 단어가 훨씬 더 광범위하게 쓰인다.
만주지역에는 퉁구스계 언어를 쓰는 여러 집단이 있었는데,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 등으로 분류되었다.
‘여진’이라는 말은 여진어의 주션(jusen)을 한자로 옮긴 것으로 우리에
게도 낯익은 단어다.
여진은 일찍이 12세기 초에 금나라를 세우고, 약 100년 동안 중원
지역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13세기 초 몽골 제국에 금나라가 멸망
한 이후 여진족은 단일한 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만주 땅 곳곳에
흩어져 살았다.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대항하여 1616년 2월 17일 여진족 수령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식을 거행하고 정식으로 한 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보통 후금(後金)이라 불리는데, 공식 명칭은 ‘아이신 구룬’이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68세의 나이로 병이 들어 숨을 거두었고, 뒤를
이어 두 번째 한으로 즉위한 사람은 그의 아들 홍타이지였다.
우리에게는 ‘청 태종’으로 잘 알려져 있는 홍타이지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세운 아이신 구룬이 기본적으로 여진 국가였다면, 홍타
이지의 다이칭 구룬은 만(滿), 몽(蒙), 한(漢)의 다민족으로 구성된
새로운 제국이었다. 만약 누르하치가 세운 나라를 여진의
‘민족 기업’에 빗댈 수 있다면 홍타이지는 그 기업의 한계를
극복해 가면서 하나의 ‘다국적 기업’으로 일군 셈이다.
★ 키메라의 제국, 청(淸)
1636년 탄생한 청나라를 하나의 생명체에 비유를 한다면,
명나라 정복의 결과물인 중원은 이 생명체의 몸통에 해당한다.
“몸통”은 한인과 만주 유전자가 발현되면서 자라난 것이다.
그리고 청제국의 근간을 이루었던 팔기만주, 팔기몽고, 팔기
한군은 곧 이 생명체의 “머리”에 해당하며, 그 조직은 만주
유전자를 위주로 하면서 몽골과 한인 등의 유전자가 함께
발현한 것이다.
또한 외몽골, 티베트, 신장 등 외곽의 지역은 청제국이라는
생명체의 “사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이는 몽골과
만주의 유전자가 발현되어 자라난 것이다.
이를 종합한다면, 청나라는 “키메라”의 제국이라 부를 수
있다. 이는 서로 다른 유전 형질을 가지는 세포조직이 하나
의 생명체 안에 공존하는 유전자 혼재 생물을 말하는
키메라와 청제국이 유사하다고 본 것이다.
이처럼 청제국의 탄생과 성장, 지배구조를 키메라 생명체에
비유하면서 발생학적으로 접근하는 이해방식은 18세기 말
위풍당당함을 자랑하던 ‘세계제국’ 청나라가 19세기를 거쳐
‘중화제국’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데도 적용할
수 있다.
★ 청제국의 변질과 소멸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청제국이라는 ‘키메라’ 생명체는 한
차례의 급속한 ‘변이’를 경험하였다. 안팎의 생존 환경이
급변하는 가운데 생명체 내부에서는 한인 유전자가 크게
활성화되었다.
‘키메라’의 몸통에서는 만주 유전자가 발현된 조직이 퇴화하
는 대신 한인 유전자가 발현하여 몸통 전체를 장악하였다.
그리고 이 조직은 몸통을 벗어나 사지까지 전이되었다.
머리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키메라’ 생명체의 사령탑 안으로 한인 유전자가 발현된 조직
이 퍼져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그리고 이후 점차 소멸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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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청나라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청나라는 우리가 익히 알던, 여진족, 즉 만주족이 일으킨 나라입니다.
훨씬 전에 금나라가 같은 여진족으로 중원을 지배한 적이 있었지만
소수의 변방 민족이 다시 명나라를 물리치고 중국의 정통성을
이었고, 그냥 이은 것이 아니라 5명의 군주가 연속으로 훌륭한 통치
를 해낸 것은 유례가 없습니다.
이는 합리적인 황제 계승 원칙이 큰 역할을 했는데, 적장자 계승 원칙
을 고수했던 명나라와 달리 청나라는 제위 계승 후부자 중에서 가장
유능한 인물을 제위에 올리는 방법을 채택하였기 때문이라 합니다.
또한 명나라의 제도와 문물을 잇고 한인을 차별하지 않았으며 타문화
를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가졌기 때문도 있다고 합니다.
오늘 저자는 청나라의 정체성을 설명하는데, 특이한 시도를 합니다.
한 생명체 내에 다양한 유전자가 각기 자기의 형질을 발현시키는
"키메라"와 청나라의 조직이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몸통은 한인과 만주족, 사지는 변방의 이민족, 머리는 만주족의 팔기
군이 중심이라는 것이지요.
마지막의 청제국도 결국 한인 유전자가 과하게 발현하여 주류이던
만주족을 밀어내고 새로운 주류가 됨으로써 막을 내렸다는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저자의 키메라 생명체론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는 상당히 창의적인
사고를 하고있고, 다양한 설명 방법의 시도를 하여왔음을 알수 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리를 해본다면, 청나라의 주도 세력인 만주족,
즉 여진족은 기동성이 뛰어나고 조직이 강한 팔기군을 중심으로
수십 배 큰 명나라를 물리쳤습니다.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며, 합리적인 왕위 계승과 다른 문화에 대한
수용의 태도, 그리고 학문에 열의를 보인 황제들로 인해 가장 넒은
영토를 가지게 되고, 이는 현대 중국의 통치 기준이 됩니다.
이는 현대에 있어서도 배워야 할 훌륭한 국가 통치의 유산이
아닌가 생각을 하면서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