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로 읽는 교양 세계사” 中
<몽골제국과 무역의 세계화>
-- “경제로 읽는 교양 세계사” 中
강 일 송
오늘은 경제의 관점에서 본 세계사 이야기를 연이어 한번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자인 오형규(1965)는 서울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
하고, 서강대학교 경제대학원에서 공부했다 합니다.
현재는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 “경제학, 인문의 경계를 넘나들다.”, “자장면 경제학”,
“카너먼이 들려주는 행동경제학이야기”등이 있습니다.
오늘은 몽골제국 이야기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늘 정착농경민과 유목민들 간의 끝없는
대립과 갈등의 구조 속에서 전개되어 왔습니다.
그중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하였고 가장 큰 영향을 준 유목
제국인 몽골제국을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어떠한지 한번 보시겠습니다.
=============================================
★ 농경정착민과 유목민
인류의 4대 문명은 엄밀히 말해 정착민들의 문명이다.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인류가 정착해 농업혁명을 통해
생산성을 높여 도시와 국가로 발전해온 과정이다.
그러나 지구상에는 황량한 초원 지대에서 삶을 이어간
또 다른 인류가 있었다. 이들은 유라시아 대륙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역사의 한 축을 담당했다.
바로 유목민이라고 불리는 북방의 다양한 민족이었다.
유목민들은 중앙집권적이고 밀집해 사는 정착민과 달리
씨족, 부족 단위로 드넓은 초원에 드문드문 퍼져 살았다.
정착민의 수직적 권력, 착취, 화려함과는 반대로 유목민은
수평적 권력, 정복, 검소함이 특징이다.
유목민의 삶은 혹독한 기후와 척박한 환경에 대한 투쟁 그
자체였다. 한파와 가뭄이 심해지면 수시로 이동해야 했다.
그렇기에 유목민은 제대로 된 문자나 역사를 남기지 못했다.
‘바람에 새겨진 역사’라는 멋들어진 비유도 있다.
정착민의 기록 속에 유목민은 잔혹하고 야만적이고 파괴
적이었다. 하지만 유목민은 때때로 역사의 중심에 섰다.
정착민들은 그런 유목민을 ‘신의 채찍’이라고 불렀다.
★ 유목민의 역사
역사에 기마민족이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전 17-18세기
히타이트인과 힉소스인이다. 히타이트는 말과 전차로 바빌
로니아를 정복했고 힉소스는 이집트를 지배하며 바퀴를 전해
주었다. 인도에서는 아리아인이 나타나 인더스 문명을
정복하고 갠지스 강 유역으로 진출했다.
기원전 8세기 중앙아시아에 다시 기마민족이 등장해 500여
년간 초원을 지배했다. 서양에서 ‘스키타이’, 페르시아에서는
‘사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초원길을 개척했고, 흉노에 청동기 문화를 전했으며
신출귀몰하는 기마 전술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과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기원전 3세기에 강력한 제국을 건설한 흉노는 수시로 중국의
목을 죄었다. 중국인들은 흉노에게 공주를 보내고 비단, 금은
을 바치며 평화를 구걸해야 했다.
유럽에서는 흉노족의 일파인 훈족이 벼락처럼 나타나 역사를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당시 유럽인들은 훈족을 신이 벌하기
위해 내려친 ‘신의 채찍’으로 여겼다.
흩어져 반목하던 유목민이 세력을 결집하면 인구 압력에 직면
해 정복전쟁에 나서게 마련이다. 반대로 정착민이 강한
국가를 건설하면 유목민은 초원으로 밀려나 다시 예전 생활
로 돌아갔다.
수,당시대의 중원의 제국에 밀린 돌궐족은 멀리 몽골고원으로
흩어졌다. 서양에서도 훈족 이후에 이렇다 할 기마민족이
없었다.
이제 세계 역사는 정착민의 승리로 귀결되는 듯했다.
13세기 초 몽골 제국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 팍스 몽골리카
12세기까지 북방의 초원은 유목민족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다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패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등장한 테무친은 1206년 몽골 제국의 칸에 올랐다.
그가 바로 칭기즈칸이다. 칭기즈칸은 10만 명의 기마 부대를
이끌고 정복전쟁을 시작하여 튀르크계 코라즘 제국을, 실크로드
동쪽의 서하를 정복했다. 이로써 초원길과 실크로드를 몽골이
장악하게 되었다.
2대 오고타이칸은 금나라를 무너뜨렸고, 바투의 원정군은 러시아
를 복속시키고 폴란드까지 쳐들어갔다.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
는 바그다드를 장악하여 아바스 왕조를 붕괴시켰다.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칸이 원나라를 세우고 남송을 멸망
시켰다.
당시 로마교황은 몽골이 강성해진 것을 알고 동맹을 타진했다.
포교와 몽골 정세 탐색을 위해 카르피니 수도사를 몽골에
파견까지 했다.
그뒤 몽골은 태평양에서부터 아시아, 동유럽, 지중해에 걸친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대제국을 건설한다.
지배한 땅은 당시 문명지역의 80%에 이른다.
몽골의 잔혹한 정복 전쟁 뒤에 찾아온 평화를 ‘팍스 몽골리카’
라고 부른다.
★ 최초의 상업의 세계화, 글로벌 무역네트워크
세계사에서 처음으로 동서양을 통합한 몽골제국의 최대 업적은
화폐경제 통합을 통한 글로벌 무역네트워크 구축이다.
중국과 이슬람의 도로망, 실크로드, 초원길을 거미줄처럼 연결해
무역을 활성화했다. 역참제를 실시하여 40킬로미터마다 말과
식량을 비축하고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중세 유라시아 대륙에 아우토반이자 초고속통신망을 건설한
셈이다.
제국의 상업은 8세기 이해 해상과 육상의 동방교역을 지배해온
이슬람 상인들이 담당했다. 이들은 육지와 바다의 교역로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통합해 제국 내의 교역을 번창하게 한
주역이다. 몽골인은 이슬람인들을 색목인으로 부르며 몽골인
다음으로 우대했다.
★ 페스트와 총이 무너뜨린 대제국
몽골 제국이 건설한 글로벌 무역네트워크는 역설적으로 제국의
붕괴를 가져온 부메랑이 되었다.
실크로드를 타고 퍼진 페스트가 무역을 위축시키고 막대한
인명 피해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역사학계 연구에 따르면 14세기 페스트는 중국 운남지방의 쥐
벼룩에 기생하던 페스트균이 실크로드를 거쳐 유럽에 상륙했
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또한 페스트는 중앙아시아, 이슬람권에도
유럽 못지않게 피해가 컸다.
몽골제국이 이슬람을 거쳐 유럽에 전해준 화약 역시 부메랑이
되었다. 몽골 군대의 비교우위는 기동성에 있었다.
그러나 유럽이 화약을 이용해 총포를 발명하면서 칼과 활로
무장한 기마 부대의 위력이 사라졌다.
이후에 후계 다툼이 심해지고 몽골 귀족들이 사치스런 생활에
젖어 국가 재정이 나빠졌다. 또한 한파, 홍수, 가뭄 등으로
대기근이 발생하여 하층민의 삶이 파괴되자 사회기반이 흔들리게
되었고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제국의 붕괴를
가져왔다.
================================================
오늘은 유목문명의 유래와 흐름, 그리고 유목문명을
가장 화려하게 꽃피운 몽골제국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문자로 역사를 남긴 정주문명에 의해 유목문명은
항상 잔인하고 미개하게 기록 남겨졌지요.
하지만 그들은 현대에 와서 다시 그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에 의해 "노마드" 란 이름으로
되살아난 유목문명의 철학적 의미는 국경없이 글로벌
화된 현대에 있어 딱 들어맞는 개념입니다.
스키타이, 흉노, 훈족으로 이어진 유목문명의 역사는
몽골제국에 이르러 완성됩니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넓은 지리적 영토와 열린 의식과
타문명과 종교에 대한 관용으로 진정한 글로벌 네트
워크를 이룹니다.
하지만 역사는 마치 달이 보름달과 초생달을 반복
하듯이 흥망성쇠의 순환을 보여주지요.
그들이 이루었던 무역네트워크를 통해 급속한
페스트의 확산과 중국을 거쳐 전달된 화약으로
부메랑을 맞습니다.
몽골제국은 탁월한 기동성, 압도적인 무력으로 제국
을 이루었지만 그들을 진정한 세계제국으로 끌어올린
원동력은 타문화와 종교를 인정하는 다양성과
열린 관용성에 있지않나 생각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