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헌 서재 May 24. 2017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서울대 인문 강의” 中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 “서울대 인문 강의” 中


                          강 일 송


오늘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과 거대한 사회변혁이었던 1868년의

메이지 유신에 대한 책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저자인 박훈(1966~) 교수는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에서 학사, 석사

학위를 도쿄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는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메이지 유신의

기원, 정치 변혁과 공론, 일본인의 대외 인식 등과 관련된 논문을

써오고 연구해 왔다고 합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


★ 메이지 유신이란


메이지 유신은 19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걸쳐 일본열도에서 일어난

거대한 사회변혁이다. 이 변혁은 실로 극적이었다.

19세기 말까지 미국과 서유럽의 몇 개국 정도를 제외하고, 산업혁명

과 헌정(헌법+의회)을 함께 이룬 나라는 유라시아 대륙 맨 끝의

일본이 유일했다.

서유럽에 가까이 있는 러시아나 동유럽의 국가들도,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 지대에 있는 오스만튀르크 제국도 그런 정도의 변혁은 이뤄

내지 못했다. 물론 조선이나 청(淸) 등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흔히 일본과 비교하면서 근대화에 실패한 조선을 비난한다.

일리 있다. 그러나 당시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들이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음을 본다면 조선은 열등했다기보다는 평범했던 것이고, 일본이

특이했던 것이다.


★ 서양에 대한 일본의 대응


1868년 메이지 정부가 들어섰을 때, 당시 세계 정세에 대한 일본

정치 세력들의 풍부한 정보와 명민한 판단력, 탄력적 대응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1930년대 이후 일본의 실패는 바로 이런 점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렬하고 과장된 위기감’은 신속히 체제 개혁을 수행하고

자국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에는 큰 역할을 한 반면, 곧바로 외부

에 대한 거친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이웃 국가들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침략욕으로 나타난 것은 잘 아는 대로이다.


★ 도쿠가와 막부의 붕괴


일반적으로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구체제와 그 지배자들의 영향력

은 대부분의 경우 최후의 순간까지 변혁 세력보다 강력했다.

청조가 무너지는 순간에도 쑨원보다는 청 조정 지배자들의 영향력

이 강했을 것이며, 김옥균보다는 고종이나 조정 대신들의 힘이 더

셌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막말기(막부 말기, 대략 1850년대~1867년)의 도쿠가와

막부는 주목할 만한 구체제이다. 메이지 유신은 그 시기 도쿠가와

막부의 여러 역사적 선택들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결론적으로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한 공로의 반은 도쿠가와 막부에 돌려야

할 것이다.


쇠퇴 조짐이 있기는 했으나 1860년대까지 막부는 당장 무너질 정도로

지리멸렬한 상태는 아니었다. 더구나 막부는 끊임없이 자기 혁신을

거듭했다. 이런 개혁 덕분에 유신 직전까지도 막부는 여전히 다른

번(藩)들에 비해 군사적으로 현격한 우위에 있었고, 외교적으로도

위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막부는 맥없이 무너져 버린 것일까?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필자는 “정치적 리더십 부재”에 주목했다.

특히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1837-1913)가 사실은

막부 내지지 기반이 매우 허약했던 점, 그리고 막부의 수상이며

실질적으로 막부를 총괄하는 로주(老中) 권력의 구조적 취약성

등이 막부 붕괴의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18세기 일본의 유학의 성행


기존의 메이지 유신을 이해하는 입장은 서양의 충격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처음에는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리 사무라이 사회라는 비동아시아적 사회였다가 서양의 충격을

받아 급속히 근대화의 길로 달려갔다는 것이다.

즉, ‘일본적 사회 -> 서양의 충격 -> 근대화’라는 인식이다.


하지만 일본은 18세기 말부터 급속히 유학이 확산되었다.

19세기는 일본 역사상 가장 유학(중심은 주자학)이 번성한 때일

것이다.

그런데 이 유학은 병영(兵營)국가인 도쿠가와 체제와는 잘 맞지

않는 사상이다. 이 체제에서는 유학은 ‘위험 사상’이 될 수 있었다.

유학이 확산됨에 따라 이 사무라이 체제는 동요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서양의 충격’이 있기 전에 ‘유학적 영향’에 따른

체제 동요가 이미 시작되었다.

즉 ‘일본적 사회 -> 유학적 영향(동아시아 국가 모델의 수용 시도)

->서양의 충격 -> 근대화’ 라는 궤도를 걸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을 타도하고 천황을 옹립하는 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은 메이지 정부의 수립을 유학적 정치사상에 따라

봉건제에서 군현제로 전환된 것으로 이해했다.

학교도 그 이전에 볼 수 없었을 정도로 많이 설립되었고, 사무라이

(군인)들이 학교를 다니는 기현상이 보편화되었다.

무술 실력도 여전히 중요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유학 소양은 사무라이들의 위신과 출세에 중요해졌다.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물게 200년이 넘는 장기 평화가 지속된

도쿠가와 사회에서 일반 사무라이들은 군인으로서의 존재 의의를

잃어버리고, 방대한 관료제의 말단 실무자, 즉 리(吏)로 변해 갔다.

그들은 조선의 양반들과는 달리 정치에 참여할 의사도 그럴

기회도 별로 없었다.

이런 그들에게 유학이 급속도로 침투하면서 그들은 ‘사(士)’가 되어

갔다. 그리고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했다. 물론 사무라이로서의 정체성이 약화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메이지 정부가 폐도령(廢刀令)을 내릴 때까지 칼을 내려

놓지 않았다. 칼 찬 사대부! 문무의 결합 속에서 그들의

행동력은 커져 갔다.


★ 사무라이들의 정치 운동


19세기에 사무라이들이 벌인 전대미문의 전국적인 정치운동은

이런 배경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이때 이들은 마치 명대(明代)의 중국 사대부나 조선조의 양반들

처럼 ‘학적(學的)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그에 기반을 두고 당파

를 만들어 당쟁을 일삼았으며, 정치적 주장을 담은 상서를

쏟아 냈다.


필자는 이를 ‘사대부적 정치 문화’라고 명명했다.

이러한 사대부적 정치 문화의 확산와 사무라이들의 ‘사화(士化)’

가 도쿠가와 체제를 동요시키고 정치 변혁을 촉발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


오늘은 우리와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장 정서적으로는 먼 거리를

유지하는 일본, 가까이 하기도 멀리 하기도 힘든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 대체로 우리의 문물을 배워가야만 했던

우리보다 못한 문명의 작은 사람(왜인)이라는 이미지와

세계가 놀라워하는 경제력, 군사력, 문화를 가진 강대국으로서의

이미지를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보다 못한 문명이이서 우리가 학문, 종교,

기술 등을 전해주었던 일본이  도대체 언제 어떻게 우리를 제치고

세계의 강대국, 선진국이 될 수 있었을까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책이 바로 여기에 대한 아주 훌륭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저자인 박훈 교수님은 한때 기자를 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자신

의 아는 바를 독자나 청자에게 잘 알려주는 탁월한 전달력이 있습니다.

저자의 강의나 설명을 들으면 순간순간 묵혀있던 의문이 탁 하고

풀리는 경험을 하게 되더군요.


어쨌든 오늘날 일본이 사무라이 막부의 체제에서 메이지 유신을

통해 국가의 체제를 변화시키고 앞선 서양문물을 빠르게 흡수하고

자기화하여 오히려 후발 국가들을 침략한 과거를 이제는 좀 더

냉정하게 분석하고 바라볼 시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먼저 저자의 언급 중 가장 강하게 와닿는 말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

들이는 그들의 태도에서, "강렬하고 과장된 위기감"이란 용어입니다.

일본은 섬나라라는 특수성 때문에 늘 "화(和)"를 중시해왔었고,

서양의 문물이 뛰어남을 알고 폐쇄하기 보다는 적극적인 수용을

통해 자신들을 발전시켜 나가는데, 그 바탕에는 이러한 강렬하고

과장된 위기감을 조장함으로써 이를 극대화한 경향이 있었음을

알게됩니다.


또한  일반적인 ‘일본적 사회 -> 서양의 충격 -> 근대화’라는 인식에서

우리가 잘 인지하지 못하던 유학의 역할이 포함된 새로운 인식,

즉 ‘일본적 사회 -> 유학적 영향(동아시아 국가 모델의 수용 시도)

->서양의 충격 -> 근대화’ 라는 궤도가 이 책의 핵심 포인트지

않나 생각합니다.


일본의 사무라이 체제가 서양의 문물이 들어가기 전, 유학의 붐이

사무라이들에게 있었고, 이를 통해 정신적 개혁, 사회 전체에

큰 사회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나 하고, 똑같은 유학이

우리는 먼저 받아들였고 더 많이 학문적 성숙이 있었음에도

일본만큼 큰 사회적, 국가적 변화를 하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도

가지게 됩니다.


진정 누군가를 이기고 극복하고 싶다면 그들을 철저하게 알아야 하고

대비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큰 의미와 내공이 꽉 찬 책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도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몽골제국과 무역의 세계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