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中
<콜럼버스, 에덴동산의 꿈으로 근대를 열다>
--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中
강 일 송
오늘은 서양사학자 주경철교수의 시각으로 본 유럽인 이야기를
한번 보고자 합니다.
저자인 주경철(1960~)교수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와 동대학원
서양사학과를 졸업한 후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고, “대항해 시대”, “문명과 바다”, “문화로 읽는 세계사”,
“히스토리아”등 많은 저작을 하였습니다.
오늘은 중세의 인물 중, 근대를 열어간 인물을 소개하는 책을
보았고 그중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에 대한 숨어있는 역사를
흡입력 있는 주교수의 글을 통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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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가 된 콜럼버스, 그는 누구인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1492년
아시아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하겠다고 배 세 척을 지휘하여 서쪽
바다로 향했고, 그 결과 자신도 모르게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
했으나, 죽을 때까지 자신은 일본이나 중국 어딘가에 갔다 왔다고
믿었다.
콜럼버스가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은 그리
오래전이 아니다. 20세기에 들어서이고 그의 출생년도 후대 자료를
가지고 추측해보면 1451년 여름일 가능성이 크다.
콜럼버스는 제노바의 가난한 직조공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정식 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으로 자신의 사고체계를 정립했는데,
어릴 때는 선원이 되어 지중해 여러 지역, 아이슬란드, 아프리카
해안을 다녔고 1470년대에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정착했다.
★ 꿈을 실현하기 위한 준비
처음 그는 포르투갈에서 아시아 항해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 각국은 어떻게 해서든지 먼저 아시아로 진출하고자 했다.
후추, 도자기, 비단 같은 아시아 물건을 유럽에 가져오면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왕실에 서쪽으로 가는 아시아 항해 사업을 제안했으나
위원회에서 실현 가능성이 낮다고 기각이 되었고, 다음에는 에스파냐
왕실에 제안했으나 이마저도 기각되고 말았다.
하지만 극적으로 에스파냐의 이사벨 여왕이 허락을 해주어 1492년
항해가 가능해졌다. 1492년은 에스파냐 역사에서 중요한 해인데,
에스파냐 땅에 남아 있던 무슬림 세력을 최종적으로 남부 그라나다
에서 몰아낸 해이다. 또한 동시에 국내에 거주하던 유대인을 축출
했는데, 국왕이 유대인들에게 내린 명령은 재산은 남겨두고 몸만
떠나라는 것이었다. 국왕은 가톨릭을 지킨다는 명분을 얻는 것과
동시에 엄청난 재산까지 빼앗았다.
에스파냐 사람들인 나중에 아메리카 현지 주민들을 가혹하게 착취
하고 거리낌 없이 살해한 것은 그동안 이어져온 ‘이교도와의 전쟁’
의 연속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 독학으로 만들어낸 세계관
콜럼버스는 독학이었지만 열심히 공부한 것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그는 책을 엄청나게 많이 가지고 있었다.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
의 등장으로 책의 출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인데, 그런
시기에 평민 출신 선원이 1만 5천권의 책을 수장했다고 한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은 <이마고 문디>였는데, 파리에서
활동했던 신학자 피에르 다이이(1350-1420)가 저술한 세계지리책
이었고, 피에르 다이이는 13세기 영국의 철학자인 로저 베이컨
(1214-1294)이 쓴 책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 또한 9세기에
활약했던 아랍 천문학자 알프라가누스의 책을 보고 베꼈다.
그러니까 콜럼버스의 지구관의 원류는 실상 아랍 지리학에 가서
닿게 된다.
<이마고 문디>에서 콜럼버스를 매료시킨 내용은 바로 “지구가
굉장히 작다”는 것, 그리고 “육지와 바다의 비율이 6대1” 이라는
것이다. 지구가 작고, 육지가 크다면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바다를
건너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이 될터이기 때문이다.
콜럼버스가 신세계에 가져간 세계지도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던
당시 사람들의 생각처럼 창세기에 적혀 있는 대로 아시아 동쪽
끝에 에덴동산이 실제한다고 믿고, 지도에도 표시해 놓은 것이었다.
★ 새로운 땅에 발을 내딛다.
1492년 8월 3일, 산타마리아호, 니냐호, 핀타호 세 척의 배가
에스파냐 팔로스 항을 떠났다. 한 달이 넘도록 육지가 보이지
않자 선원들이 귀환하자고 주장했고, 급기야 반란에 가까운
사태가 벌어졌다. 2-3일 더 항해해 보자고 설득하여 33일만에
육지를 보았다.
콜럼버스는 일본이나 중국 어딘가에 도착했으리라 믿었지만,
그 곳은 바하마 제도의 한 섬이었다. 왕실 깃발을 들고 상륙
하자마자 이 섬을 산살바도르(구세주 라는 뜻)로 명명한 후
에스파냐 왕과 여왕의 소유로 삼는다고 선언했다.
현지인들을 만났으나 자기네들과 똑같은 말을 하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언어가 없는 것이고,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종교가
없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3차에 걸친 탐사에도 향료와 금을
발견하지 못하자 에스파냐의 국왕의 신뢰를 잃게 되었다.
★ 중세의 꿈, 근대의 동력
되돌아보건대, 콜럼버스에게 아시아로 가는 길은 평범한 항해가
아니었다. 그의 내면에는 신학적 의미의 순례와도 같았고,
세계사적 과업을 달성하려는 의무감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또한 큰돈을 벌고 신분 상승을 하고자 하는 세속적
열망 또한 강했다.
그는 남미의 오리노코 강의 하구에 도착해서는 에덴동산의 입구에
도착했다고 생각하고 교황 알렉산드로스 6세에게 “제가 드디어
에덴동산을 보았습니다.”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에덴동산이 현재 이 땅에 실재하며, 금은 고가의
물질인 동시에 신령의 기운이 깃든 신의 선물이라 여겼다.
그는 이러한 중세적 꿈으로부터 근대 세계사를 개척하는 강력한
동력을 이끌어 낸 것이다.
중요한 점은 콜럼버스와 같이 생각한 사람은 많았으나 콜럼버스만이
그런 생각을 세계화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콜럼버스는 마지막에 모든 특권을 박탈당한 채, 말년에 <예언서>
라는 책을 집필했고, 그는 스스로를 모세와 비견되는 역할을 맡았
다고 생각했다.
1506년 5월 19일, 성 삼위일체, 성모마리아, 그리고 자신과 부모와
아내, 모든 신실한 신자들의 영혼을 위해 미사를 드려달라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한 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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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일생과 그를 통한
중세와 근대의 만남, 그리고 그 시절의 역사적 시대 상황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도시국가 제노바에서 태어나 선원이 되어 다양한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그는 상당히 독특하게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
음에도 수많은 책을 읽고 그의 세계관을 정립하고 자신만의 꿈을
꿉니다.
지금 본다면 현 지구에 대한 엄청난 오해와 지식의 부족으로 태평양
의 존재를 모르고 단지 서쪽으로만 가면 아시아를 만나게 될 것이고
금과 향료를 가져가 거부가 될 꿈을 꿉니다. 하지만 그를 이끈 다른
동인은 중세적 세계관, 종교관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세계지도는 성경에 기초한 에덴동산이 아시아쪽에 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고 일반적으로 누구나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콜럼버스는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그것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자기나름의 계획을 세워 두려움없이 도전합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왕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리고 후원을 요청
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음에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영국과 프랑스
왕실을 찾아갈 계획을 세웁니다.
정말 목표에 대한 근성과 끈기가 대단하지요.
또한 그는 자신이 벌어 들인 재산으로 수많은 책을 사들이고 줄을
그으면서 공부를 합니다. 비록 그 당시 학문의 수준의 한계로 인해
지구가 훨씬 작고,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몰랐지만 그는 진정한
행동가였고 실천가였습니다.
에스파냐인들이 원주민을 대할 때, 자기말을 모르면 언어를 모르는
것이고, 기독교가 아니면 종교가 없는 것이라는 주교수의 말이
정곡을 찌릅니다. 그들은 멀쩡히 있는 수백 만의 원주민을 사람취급
하지 않고 그들을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엄청난 근대사의 비극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지요.
잘못된 지식과 중세적 종교적 신념으로 아시아를 찾아 나선 콜럼버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새로운 대륙을 발견한 선구자가 되었고,
그의 이름이 현재 국가의 이름, 대학의 이름, 도시의 이름 등에서
수없이 많이 불려지고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대단히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