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상파와 자포니즘, 그리고 조선의 도공>
강일송
오늘은 미술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현대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그림들은 인상파의 그림들이 많습니
다. 그들은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었고, "자포니즘"이라는
말까지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우리의 도공들이 있었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처럼 쇄국을 하였지만, 나가사키의 인공섬인 데지마
섬에서 유일하게 네덜란드와는 교역의 통로는 열어두어 유럽과
소통을 하였었습니다.
네덜란드를 통해 배운 학문을 난학(蘭學)이라 하였었구요.
그 당시 중국의 도자기는 유럽의 왕실과 귀족층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명,청 교체기에 중국의 도자기를 구하기 어려워지자
이를 대체할 공급원으로 일본이 선택됩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를 통해 120만점의 일본 도자기가 유럽으로
수출이 되었다하네요.
임진왜란때 일본은 패전해서 돌아가면서 이삼평을 비롯한 엄청난 수의
도공들을 납치해 갑니다.
이전에는 옹기 수준밖에 못만들어 중국, 조선 등에서 수입만 하던 백자를
이삼평을 비롯한 조선 도공들이 드디어 일본의 흙으로 만들어
내게 됩니다.
지금으로치면 반도체 기술과 같은 첨단 산업기술이 도자기를 굽는 기술
이었던 셈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이 유럽에 수출하던 도자기를 싸서 갔던 포장지가
"우키요에" 입니다.
"우키요에"는 부세회(浮世繪), 에도시대(1603-1867)에 유행을 한, 문자
그대로 덧없는 현세의 유락거리를 묘사한 풍속화입니다.
채색 판화로 만들어져 대량 보급이 되었고,
일본 도자기를 싸던 종이로 처음 유럽에 전해졌습니다.
이로써 이전까지의 화풍에 식상하고, 새로움을 모색하던 인상파
화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원근법을 무시한 대담한 구도, 강렬하고 순수한 색채, 세부묘사를 과감히
생략하기도 하고, 대각선 구도로 사물을 배치하기도 하였습니다.
어쨌든, 인상파화가들은 일본화에 유행처럼 매료가 됩니다.
이러한 유행을 "자포니즘"이라고 합니다.
고흐는 안도 히로시게의 목판화 <비>를 그대로 베끼고,
<탕기염감의 초상>에서는 배경이 우키요에 일색입니다.
모네도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후지산 36경> 처럼 한 곳에서
연작화한 것을 모방하여 해뜨는 광경을 수십차례 그리기도 하고,
일본식 정원을 가졌습니다.
마네도 <에밀졸라의 초상>에서 일본병풍과 우키요에를
배경으로 넣었으며
드가는 <빨래하는 여인>을 그리면서 화면중심에서 벗어난
우키요에 특유의 구도를 사용하였습니다.
특히 고흐의 우키요에 사랑이 대단했다고 하고, 동생
테오와 같이 모은
우키요에 작품이 400점이 넘는다고 합니다.
임진왜란때 잡혀갔던 도공들은 경기도 이천이나 광주에 있던 왕이나
왕족에게 올리던 관요가 아니라, 대부분 호남과 영남의 민요의 도공
들이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도자기 문화는 아낌없이 사라지고
오히려 일본을 통해서 우리의 그림자를 봅니다.
우리의 문화를 세계적으로 계승 발전시키는 노력, 그러한 인식,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매우 아쉬운 대목입니다.
우리의 기술을 가지고 간 일본이 세계에 알려지고 엄청난 경제적
유익을 얻은 사실에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많은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첫 번째 사진은 모네가 애인인 카미유에게 일본의 의상을 입혀서
그린 <일본 여인>, 1876, 작품입니다. 보스턴의 Museum of Fine Arts
미술관에 있는 그림을 제가 사진으로 찍어 놓았던 것이고요,
두 번째부터는, 이 보스턴의 미술관을 2015년 방문시 때마침 일본의
우키요에 대표화가인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 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우리가 흔히 보아온 후지산을 가운데 두고 사나운 파도가 둘러싸고
있는 그 그림의 작가입니다.
몇 작품을 함께 올리니 한번 감상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