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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예술

<생각의 미술관>

“확실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by 해헌 서재

<생각의 미술관> 박홍순

--“확실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강 일 송


오늘은 미술과 철학이 조우하는 책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철학은 글이라는 텍스트안에 존재한다고 생각

하지만 오늘 저자는 그림을 통해서 잠든 사유를 일깨울 수

있고 그림이 훌륭한 철학의 도구라고 말합니다.


저자인 박홍순은 인문학자로 “미술관 옆 인문학”, “사유와

매혹”, “히스토리아 대논쟁”, “저는 인문학이 처음인데요”

등 다양한 작품이 있습니다.


저자의 의도인 그림을 통해 철학적 마음의 흔들림을

느낄 수 있는지 한번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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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과의 만남


철학과 만나는 일은 배경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생각하기’다. 통상적인 생각을 넘어 의문을 제기하고 나아가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의 힘을 키우는 과정이어야 한다.


미술작품은 이를 위한 아주 훌륭한 안내자다. 화가는 정지된

장면에 여러 문제의식을 집약적으로 담고자 한다. 화가가 의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당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시대정신이 저절로 담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그림을 통해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사고훈련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 마그리트의 그림보기


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그림은 애초에 화가의 의도가 여기에

맞추어져 있기에 안성맞춤인데, 그는 그림을 통해 철학을 하고자

하였다. 대상을 매개로 자신의 사상을 그리고, 그림으로 사유

하기를 즐겼던 화가다.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들이밀거나 서로 대립되는 요소

를 교묘하게 섞어서 순간적으로 당혹감과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그림이 유발하는 충격은 철학에 무관심한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지성을 자극한다.


◉ 확실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마그리트의 그림이 늘 그러하듯이 <금지된 재현>도 우리를 당황

스럽게 한다. 한 남자가 말끔하게 차려입고 거울을 본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뒷모습이 거울에 비친다. 옆의 책이 제대로

반사된 것을 봐서 거울인 것은 틀림없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시각적 충격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마그리트는 이 그림을 통해

어떤 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관심을 둔다.

먼저 <금지된 재현>은 자유로운 생각을 자극한다. 제목 그대로

금지된 발상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1938년 어느 강연에서 그는 “1915년 나는 사람들이 강요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볼 수 있는 태도를 되찾고자 했다.

나는 관습과 가장 거리가 먼 그림을 그리면서 자유의 기쁨을

경험했다.”


관습적 인식에서 벗어남으로써 틀에 박힌 사고방식을 넘어 생각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다. 철학은 넓고 깊은 생각을 통해 가능성이

열린다.


마그리트는 거울로 뒷모습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금지된’ 재현

이라고 했을 것이고, 결국 인간 인식이 갖는 근본 한계에 의문을

던진 것이다.

눈으로 받아들인 사물이나 현상은 뇌를 통해 일정한 정보 처리

과정을 거쳐 생각으로 발현하게 된다. 그토록 확실하다고 믿는

눈이 고작 사실의 일부만 알려주니 청각이나 촉각을 비롯한

다른 감각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당연히 정신은 늘 제한적이고 일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우리가 아는 것을 도대체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

그동안 확실하다고 자신해 왔던 수많은 지식이 근본적으로

의심받아야 한다.

오랜 기간 인류가 쌓아온 지식도 어디까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지 마그리트의 도전은 바로 이 곳으로 향한다.


◉ 내가 아는 것은 오직 내가 모른다는 것뿐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는

<마녀의 집회>와 <산 이시드로 순례행렬>에서 무지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관적으로 그린다.


<마녀의 집회>는 여전히 비합리적인 사고에 머물고 있는 스페인

사람들의 무지몽매함을 고발하고 있고, <산 이시드로 순례행렬>도

현상적으로는 마녀 숭배와 반대편에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우매함이라는 점에서 다를 바 없는 종교 현실을 보여준다.


당시 유럽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촉발된 혁명적 분위기가 유럽

전체에 꿈틀거리고 있었다. 천 년 가까이 지속된 유럽 봉건

체제에 결정적 균열을 내었고, 종교에 기초한 신분제 논리를

거부하고 이성에 기초한 계몽주의 열망이 유럽에 흐르던 시기

였다.


고야가 살던 스페인은 봉건질서와 사고방식에서 좀처럼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귀족과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한

지배세력의 부패와 전횡이 점점 더 심화됐다.


그런데 과연 무지는 당시 스페인 사람들만의 문제일까?

현대인들은 문맹이라는 말이 낯설고 인터넷으로 다양한 정보가

홍수처럼 떠다니지만 진정한 철학적인 앎은 부족하다.

지식과 정보의 바다에 살지만 무지의 골도 깊어지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천 년 전에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

며 무지를 질타한 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소크라테스는 재판의 마지막 변론에서 “지혜와 관련해서는

자신이 진실로 전혀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가 가장

지혜로운 자”라고 한다.


무지와는 아무 인연도 없다고 확신하는 사고방식에 반성적

사고가 끼어들 틈이 없다. 소크라테스의 점잖은 권유나

고야의 질타, 혹은 마그리트의 시각적 충격으로 부족할

지도 모른다. 스스로 절실한 필요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관성의 힘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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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미술을 통해서 철학적 사고의 힘을 기를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벨기에 출신의 화가 마그리트의 그림을 주된 모티브로

하여 담론을 전개합니다. 마그리트는 스스로 화가보다는 철학자

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했을 정도로 철학자들의 책을 탐독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를 주로 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 그림인 <금지된 재현>에서 그는 통념적인 거울의 기능

을 뒤틀어 표현합니다. 이를 통해 인간이 가장 정확하다고 하는

시각이라는 감각조차도 불확실하고 제한적이라는 통찰을 주고자

합니다.


예전에 소개한 "지식의 반감기"란 책이 있었지요. 여기에서도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지식이 수십 년만 지나도 반 정도가

진실이 아니거나 완성되지 않은 부족한 지식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학문과 앎에 있어서 너무 완전한 확신보다는 늘

겸손하고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스페인의 화가 "고야"의 그림에서 출발합니다.

<마녀의 집회>와 <산 이시드로 순례행렬> 두 그림은 정반대의

상황을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내면을 보자면 작동방식이

같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아무 생각없이 따르는 멍한 눈빛과 맹목적인 추종하는 마음은

두 그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저자는 이 두 그림의 시기인 1700년대 스페인 뿐이 아니라

현대에서도 이러한 무지와 비근대성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다고 합니다.

수많은 책과 인터넷의 지식이 범람하지만

진정한 사고하는 힘을 가진 이들은 적다는 이야기지요.

결국 제대로 사고하는 힘, 즉 철학의 역할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오늘 여러 그림들을 통해 저자는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외국에서 더 잘 알려진 숭산스님(1927-2004)은 하버드

출신의 현각스님의 스승으로도 유명한데, 숭산스님의 기본

적인 화두는 늘 "오직 모를뿐" 이었다 합니다.

이는 소크라테스부터 전해져 온 "내가 아는 것은 오직 내가

모른다는 것일뿐"이라는 의식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다시 한번 정리를 해본다면, 우리가 인문학을 배우고, 학문에

정진하는 이유는 우리의 지식과 앎이 아주 보잘것 없이 작다는

정확한 인식과 겸허함에서일 것이고,

우리는 그 바탕위에서 제대로 사고하는

철학적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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