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다라 미술> 이주형
--“동과 서가 만나는 자리”
강 일 송
오늘은 좀 특이한 주제로 간다라 미술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간다라 미술은 세계의 미술사에 독특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서양의 양식으로 동양의 주제를 구현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저자인 이주형(1960~)교수는 미국 버클리 대학에서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2년부터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현재 세계불교학회(IABS) 부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기원전 327년 초여름, 스물아홉 살의 알렉산드로스(BC 356-323)와
그의 병사들은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대망의 인도 서북쪽 관문에
다다랐다.
고향인 마케도니아에서 이곳까지는 햇수로 7년, 거리로 2만 5,000km
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를 떠나 소아시아와
이집트를 평정하고, 330년에는 페르시아의 아카이메네스 제국을
무너뜨렸다.
아리아(헤라트)와 아라코시아(칸다하르)를 정벌하고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를 제압한 뒤, 다시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카불 분지에서
이제 인도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 당시 그들은 인도가 아시아의
동쪽 끝에 있다고 생각했으며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병사들 사이에 심상치 않은 동요가 일어났다. 장기간에 걸친
반복된 행군과 전투로 몹시 지쳐 있었고, 혹독한 인도의 몬순기후
에 독사와 해충으로 시달렸다. 인도가 자신들이 알던 크기보다
훨씬 더 넓은 땅이고, 코끼리와 전차부대를 거느린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정보는 그들의 사기를 꺾어 놓았다.
어쩔 수 없이 알렉산드로스는 후일을 기약하면 서쪽으로 진로를
돌렸는데, 돌아오던 중, 바빌론에서 열병에 걸려 짧은 생을 마감
해야 했고, 이때가 기원전 323년의 일이다.
그의 원정이 세계사에 끼친 영향은 막대한 것이었다. 각 지역에는
헬레니즘의 영향이 각인이 되었고, 그가 지나친 길을 따라 동과
서의 지역과 민족들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그의 발길을 따라 아시아 각지에 정착한 그리스인들과 그들이
세운 식민 도시들을 중심으로 헬레니즘 문화가 광범위하게 확산
되었으며, 이 외래 문화와 각 지역의 토착 문화 사이에 교류와
혼합이 이루어졌다.
인도아시아 대륙 서북쪽 변방의 간다라 지방에서 발달했던 그레코,
로만 계통의 미술인 이른바 ‘간다라 미술’도 그 연원은 알렉산드로스
의 동방 원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해야 할 것이다.
★ 간다라 미술
간다라(Ghandhara)는 원래 간다리(Ghandhari)족이 사는 땅이라는
뜻이다. 간다리족은 기원전 15세기 무렵 인도에 들어온
‘인도 아리아인’의 일파로 보인다. 이 종족이 정착했던 인도 서북쪽
지역을 간다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간다라는 기원전 6세기 아카이메네스 제국이 흥기하면서 페르시아에
복속되었다. 다리우스 1세(재위 기원전 522-486)부터, 크세륵세스
1세(재위 기원전 486-465년)까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간다라지역의 지역적 범위는 시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아카이메네스 시대에는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잘랄라바드 일대와
파키스탄의 페샤와르 분지, 탁실라를 포괄하는 지역을 가리켰다.
간다라의 심장부인 페샤와르 분지는 고래로 동서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인도가 깔때기 모양을 하고 있다면, 그 입구가 육지로는 서북쪽으로만
뚫려 있는데 그 깔때기의 입구, 인도의 관문이 바로 간다라였던
것이다.
이곳은 문화, 풍토, 종족 등 여러 면에서 서아시아와 남아시아,
중앙아시아의 요소를 골고루 지니고 있었다.
이곳은 기원전 1500년경 인도에 유입했던 아리아인을 필두로
페르시아인, 그리스인, 인도인, 중앙아시아 출신의 샤카족, 쿠샨족,
훈족, 돌궐족의 지배를 번갈아 받았다.
간다라 미술은 이곳에서 기원 전후부터 수세기에 걸쳐 번성했던
특이한 성격의 불교미술을 칭한다. 특이하다는 이유는 주제는
인도에서 태동한 불교에 관한 것임에도, 그 조형 양식은
놀랍게도 전혀 이질적인 서방의 지중해 세계에서 비롯된 헬레니즘
,로마풍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동방의 종교 전통과 서방의 고전미술 전통이 기묘하게
결합된 혼성 미술이었던 것이다.
-----------------------------------------
★ 석굴암 불상이 간다라 불상 영향 받았는지?
-- 간다라가 모든 불상의 최초 발생지이기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석굴암의 불상은 간다라 불상보다는 이후에
인도에서 만들어진 불상과 더 가깝다.
이는 인도에서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고 중국에서 한반도로
그 영향이 전달되었기에 그러하리라고 보임.
★ 무불상 시대의 존재
불교미술사에서 불상이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석가모니 붓다의 열반을 기원전 4세기로 본다면 이후 근 400년
간은 불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400년간은 붓다의 일생을 미술로 도해할 때도 붓다의 형상
대신 붓다를 상징하는 보리수, 빈 대좌, 붓다의 발자국 등으로
붓다를 나타냈다.
무불상 시대가 오래간 지속이 되었던 이유는,
첫째, 석가모니 붓다가 출현한 시대에는 인도에서 상(像)을 만들어
숭배하는 관습이 일반화되어 있지 않았다.
둘째, 원래 불교는 붓다를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초기 불교에서 붓다는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의 하나
로서, 또 진리를 깨달아 가르침을 편 위대한 스승으로서 존중
받았지만 신과 같이 숭배되는 존재는 아니었다.
붓다보다는 그가 발견하고 전한 진리인 ‘법(다르마)’가 우선시
되었으며, 그의 제자들은 ‘법’에 따라 수행하여 붓다와 같은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점차 붓다를 신적인 존재로 숭앙하는 분위기가 고조
되면서 붓다를 인간 모습으로 상으로 직접 대하고 예배
하고자하는 욕구가 불교도들 사이에 점차 강해졌다.
이어 기원후 1세기, 우리가 현존하는 최초의 불상들을 대하게
된다.
================================================
오늘은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접점 지역에서 일어난 문화의
융합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아마 이전에도 부분적으로 동양과 서양의 만남은 있었겠지만,
대대적으로 동서양이 마주한 것은 기원전 300년대의 알렉산드
로스 왕의 동방 원정 이후였습니다.
그는 소아시아와 이집트를 누르고, 세계최대의 제국이었던
페르시아제국까지 무너뜨리며 동진합니다.
이 당시 지식으로는 인도가 동쪽의 끝이고, 지금 인도의
크기보다 훨씬 작게 인식하고 있었다 합니다.
그래서 인도를 끝으로 동방원정을 마무리 하려고 하였지만,
부하장수들,병사들의 피로와 반발로 회군하였고, 그 과정
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병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연결해 놓은 동과 서는 이후에 엄청난 영향을
서로에게 미쳤고, 인도의 관문 지역인 간다라 지역으로 중심으로
동과 서가 어우러진 융합미술이 발달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개인적으로 신라의 석굴암이 간다라미술의 영향을
받아, 즉 그리스풍이 가미된 양식이라고 알고 있었으나,
이 책을 통해 오히려 이후의 인도양식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 모든 분야에서 통섭, 융합이 대세인 시대입니다.
학문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서로 소통하면서 새로운 문화가 발생
하고 많은 새로운 영역이 생겨났습니다.
오늘 최초의 동서양 문화의 교류가 대대적으로 일어났던
이야기를 들어보았고, 그 산물인 간다라 미술에 대해서도
함께 보았습니다.
부디 흥미로웠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하루도 평안하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