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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예술

<명작 순례>

“김환기와 홍랑의 작품”

by 해헌 서재

<명작 순례> 유홍준


--“김환기와 홍랑의 작품”


강 일 송


오늘은 우리나라의 명작들을 살펴보면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홍준교수의 해설과

견해를 들어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흔히 서양미술의 고전적인 명작들을 우리 작품들보다 더 자주 접하는 게 현실

입니다. 오늘 저자는 우리의 명작의 내력과 그에 담긴 예술적 가치를 해박한 지식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저자인 유홍준(1949-)교수는 서울대 미학과에서 학사,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석사를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에서 박사를 합니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뒤 미술평론가로 활동했으며, 영남대 교수, 명지대 대학원장, 문화재청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대표화가 중 한 분인 김환기 화백과 조선시대 3대 여류시인

홍랑의 작품 2가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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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1970, 면포에 유채

-- 나는 고국의 오만 가지를 생각하며 점을 찍었다.


우리나라의 회화 중에서 현재 국보로 지정된 그림의 주인공은 공재 윤두서,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추사 김정희 다섯 명뿐이다.

그렇다면 20세기 화가 중에서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할까?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를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다. 박수근과 이중섭은 서양화라는 새로운 조형어법을 한국적으로

토착시킨 화가이고, 김환기는 모더니즘을 구현한 화가이다.


2013년은 수화 김환기(1913-1974) 탄신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다.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도 섬마을에서 태어난 김환기는 서울로 올라와 중동학교를 마친 뒤 니혼(日本)대학

미술학부에 유학하면서 화가의 길을 걸었다. 처음에 추구한 것은 추상미술이었다.

1956년에는 파리로 건너가 현대미술의 현장을 체험하였고, 한국에 돌아와 한국적

서정을 바탕으로 한 세련된 모더니즘을 추구하였다. 이 무렵에 그린 작품이 <항아리와

매화가지>이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제2의 인생을 살았는데, 50세의 나이에 예술회 회원, 한국미술

협회 이사장,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학장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뉴욕

으로 건너간 것이다. 그는 당시 이렇게 적었다.

“뉴욕에 나가자, 나가서 싸우자.”(1963년 10월 13일)


뉴욕에서 김환기는 조형적 실험과 고민을 거듭하였고, 이때부터 김환기의 점 그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즐겨 그리던 대상들을 점으로 환원시켜갔고, 고향 땅 신안의

섬마을, 뻐꾸기소리를 생각하며 점을 찍었다. 그는 일기에서 ‘서울의 오만 가지’를 생각

하며 점을 찍었다고 했다. 점으로 “새로운 창을 하나 열었다.”고 했다.


김환기가 그렇게 도달한 점의 세계는 1970년 한국일보사 주최 <한국미술대상전>에 출품

하여 대상을 받았다. 이때 출품한 작품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다.

이 작품은 절친한 선배이기도 한 김광섭의 시 <저녁에>에 붙인 그림이다.


이 시에서 별은, 고향의 별이다. 김환기의 점은 이처럼 서정이 들어 있어 서구 모더니스트

들의 냉랭하고 물질뿐인 올 오버 페인팅, 색면파 추상, 미니멀 아트와는 다른 따뜻함이

서려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김환기는 교통사고를 당했고 후유증이 남아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

했다가 1974년 7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뉴욕주에 있는 발할라 마을의 켄시코

묘지 산마루, 평소에 ‘아, 이런 데 누워서 쉬었으면 좋겠다.“고 하던 그 자리에

안장되었다.


백 년의 세월 속에 수화 김환기 같은 화가를 갖고 있다는 것은 우리 근대미술의

큰 위안이자 자랑이다.


★ <그대 가시는 길에 버들가지 꺾어 바치오니> 홍랑 16세기, 종이에 묵서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이별의 마음을 간절하게 담은 이 시조는 16세기 선조 때 함경도 기생인 홍랑이 임과

헤어지면서 지은 시조다. 홍랑은 이 시조 한 수로 황진이, 매창과 함께 조선시대 삼대

여류 시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홍랑은 함경도 홍원 출신으로 경성 관아에 소속된 재색을 겸비한 관기였다. 경성은 요즘

으로 치면 함경도의 도청 소재지로 함경도라는 명칭은 함흥과 경성에서 나온 것이다.

경성은 특히 변경의 요충지로 병마 절도사의 지휘 아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병마절도사 밑에는 북평사라는 고위 관리가 파견되는데, 1573년 최경창(1539-1583)이

이곳으로 부임해 오면서 홍랑과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최경창은 호는 고죽(孤竹)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다. 최경창은 홍랑의 기예에 반했고, 홍랑은

최경창의 학예를 존경하여 성심으로 모셨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시한부일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북평사 임기가 다해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 홍랑은 배웅을 하였는데 함관령 고개에 이르러 더 이상 따라갈 수

없었다. 당시에는 함경도, 평안도 거주하는 주민의 도성 출입을 제한하는 “양계의 금”이

있었다. 이때 홍랑이 사무치는 사모의 정을 담아 바친 이별의 시가 이 시조이다.


나중에 최경창이 병석에 눕자, 홍랑은 양계의 금을 어기고 서울로 달려와 최경창을 간호

하였다. 그 정성으로 병은 나았으나, 당파 싸움에서 반대파들이 함경도 기생을 첩으로

두고 산다는 것을 문제 삼았고, 결국 낙마하여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1583년 최경창은 서울로 상경 중 도중에 갑자기 객사를 하게 된다. 불과 45세였다.


최경창의 사망 소식에 홍랑은 파주에 있는 묘소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다른 남자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몸을 씻거나 꾸미지도 않았고 자신의 얼굴에 칼자국을

내어 추악하게 만들었다. 숯을 삼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최씨 가문에서는 홍랑을 최경창의 묘 아래에 묻어주고 시제도 올린다고 한다.


이런 아련한 사연이 깃든 홍랑의 시조 친필 원본이 2000년 가을, 세상에 공개되었는데

홍랑의 절유시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글씨가 참으로 단아하고 기품이 있다.

본래 한글 서예 작품은 드문 편이고 특히 임진왜란 이전 한글 글씨는 아주 귀하다.

홍랑의 글씨는 필획 굵기에 변화가 없어 정중한 예서체 맛이 담겨 있다. 그래서

소박하면서도 애틋한 분위기가 살아난다.


오늘날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 최경창과 홍랑의 묘소 앞에는 최경창의 <변방곡>과 홍랑의

<절유시>를 새긴 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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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문화재청장을 역임한 유홍준교수의 해설로

우리나라 명작중 2가지를 함께 보았습니다.


첫번째는 우리나라 근대미술의 대표화가 중 한 명인

김환기 작가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였습니다. 그는 도쿄, 파리, 뉴욕 등 세계 미술의

중심부를 경험하고, 한국 미술계의 선구자이자 최고

의 작가로 남아 있습니다.

마지막엔 점으로 대상을 표현했는데,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담긴 한국적인 정서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구현합니다.

유홍준교수는 향후 근대 회화 작품중 국보로 지정이

된다면 그의 그림들이 가장 근접해 있다고 평합니다.


다음은 16세기 조선의 역대급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인

홍랑의 작품을 보았습니다. 한 남자를 향한 지극정성의

사랑과 이를 표현한 시조는 수백년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전의 한글 작품이 귀한 상황에

발견된 홍랑의 서체는 놀랍기만 합니다.

글씨체만 보아도 홍랑의 절개와 덕이 그대로 그 속에

녹아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아마 홍랑의 이야기가 영국이나 프랑스 등 유럽의 나라에서

있었다고 한다면, 아마 전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고 절절한

러브스토리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쌀쌀해진 날씨 건강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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