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논리, 동양의 마음>
“우리나라 철학 거장의 근본 생각하기”
강 일 송
오늘은 우리나라 철학의 대가가 삶에서 이어진 의문과 질문들에 대해서 스스로 답한
개인적 철학적 개론서를 한번 보려고 합니다.
저자인 박동환(81) 교수님은 연세대학교 철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1971년 미국
남일리노이 주립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1981~1982년 네덜란드 라이덴
국립대학고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에서 연구교수로, 1993-94년 베이징대학에서 방문학자를
하였고, 2001년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정년퇴임하였다 합니다.
저서로는 “사회철학의 기초”, “동양의 논리는 어디에 있는가”, “안티호모에렉투스” 등이
있습니다.
저자가 짧게 쓴 글들에 개인적인 소회를 한번 곁들여보겠습니다.
=========================================================
★ 봄(觀)은 봄(觀)의 대상을 짓는다. 그 봄(觀)이 들어앉을 집을 짓기도 한다.
그래서 거기에 걸려 막히거나 갇히는 것이다.
어디에 갇히거나 걸려 막힘을 피하는 해방의 길은 흐르는 물을 따라 흘러서
풀려나가는 데 있다.
------------------------------------------
볼 관(觀)자를 써서 박교수님은 하나의 어떤 사물을 보는 시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물이든 그 사물을 보는 프레임, 창에 따라 그 사물의 모습은 규정지어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 규정됨은 걸리고 막히고 갇히는 것으로 저자는 표현하고 있네요.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상선약수(上善若水)의 그 수(水)가 등장합니다.
세상사를 흐르는 물처럼 살면 그러한 갇힘과 걸림, 막힘이 해결될 것이라 말합니다.
★ 개미는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날씨의 바뀜을 미리 알며 거기에 대처한다. 그러나 그는
햇볕 쨍쨍한 어느 날 먹이를 찾아나서는 길에 그 앞을 지나는 사람의 발 밑에 깔린다.
그것이 그의 최후의 날이다. 걸어가는 사람의 궤도를 그려 그의 지혜로써 미리 볼 수
있는가. 그가 그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는 조건들을 추적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끝없이 있으려는 존재자의 마지막 날을 결정하는 운명의 법칙은 어떤 것인가.
-----------------------------------------------------
두 번째 글은 생존자, 즉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은 너나 없이 운명의 손 위에
놓여진 존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날씨는 잘 알아맞히는 개미들도 지나는 길에 사람에
밟혀 그의 생을 다할 것임을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아침에 출근을 해서 집을 나간
가족이 화재가 난 사우나에 갇힐 수도, 불이 난 유조차에 덮침을 당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불확실함, 불가항력성 등으로 인해 전지전능한 신을
찾고, 점을 보며,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 인간사를 관통하는
큰 흐름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현대 음악의 기교에서 벗어나 원시의 호흡과 리듬을 그리듯이
세련된 철학의 허구에서 돌이켜 시원(始原)의 야성과 폐허의 논리를 찾는다.
----------------------------------------------
현대의 잘 짜여진 음악, 미술, 학문의 틀에서는 숨막히는 질서만이 존재하여, 원시부터
내려오는 인간 본성의, 본연의 향기가 그곳에는 들어있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철학도 마찬가지여서 말의 잔치가 되어 버리면 그곳에는 태곳적 시원의 논리가 사라지고
없다는 말이겠지요. 이 문장을 보니 갑자기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가
떠오릅니다. 뜨거운 가슴을 가진 조르바야말로 시원의 야성을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 들에 피는 한 잎의 풀도, 산을 뛰어넘는 짐승도 자연이 준 인연의 고리에 순응해서
산다. 그러나 사람은 그 의식의 능력 때문에 자연과 맺은 원시의 고리를 벗어나 날으려는
꿈을 지닌다. 그는 자연을 초월하는 한없는 자유를 찾고 자아의 욕망을 위하여 끝없이
달린다. 그는 자기에 대한 무한한 기대와 자기로부터 오는 끊임없는 실망에 시달린다.
이것은 자연으로부터 허락된 길인가,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살았는가.
------------------------------------------------------
이 세상 자연의 모든 구성원은 대체로 자연의 틀안에서 순응하며 살아가지만 인간은
본인의 근원을 질문하고 자연의 원리를 알고자 하며 더 나아가 자연을 뛰어넘고 조종하
려고까지 합니다. 의식을 가진 인간은 나날이 발전하기도 하지만 광대무변한 자연에
마주할 때 두려움과 왜소함 등 실망감도 함께 가지게 됩니다.
저자는 이러한 인간의 성향이 자연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스스로 개척한
길인지 오히려 우리에게 물어오고 있습니다.
★ 사람은 같음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타자의 세계를 잡는다. 그것은 타자의
세계를 구속하려는 자아의 편협한 고집.
----------------------------------------------
인간은 누구나 자기 본위적이지요. 타인의 큰 고통보다 나의 발에 조그마한 가시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생각에 타인을 맞추려고 하고
그게 안 되면 온갖 트집을 잡습니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상황을 끌고 가려고
하고, 이는 인간이면 누구나 가진 “권력 의지”의 표출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기라는 존재의 이익을 증대하기 위해 타자를 강제하는 것이 “권력 의지”라 하겠지요.
사실, 이러한 권력 의지는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다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식물도 햇빛을 더 받기 위해 서로 경쟁을 하고, 동물들도 더 좋은 사냥 자리를 위해 서로
밀어내고 경쟁을 합니다. 생명체의 가장 바탕의 본성이겠지요.
★ 서양 사람의 논리는 애매함을 밀어내는 정신으로 이루어진다. 그의 논리는 이론의
정신을 나타낸다. 이론은 말의 그물 안에서 펼쳐진다. 그의 논리는 말의 그물을 따라
이어지는 내재함축으로 얽히는 것이다.
동양 사람의 논리는 애매함을 받아들이는 정신으로 이루어진다. 그의 논리는 실제의
정신을 나타낸다. 실제의 사태는 말의 그물 밖에 걸쳐 있다. 그의 논리는 잉여포섭으로
얽혀짜인다.
--------------------------------------------------
이제야 이 책의 제목인 서양과 동양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서양 사람은 애매함을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논리적이고 과학적이고 인과관계가 분명
하지요. 하지만 동양 사람은 애매함을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논리가 잘 통하지
않기도 하고 사고의 비약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언뜻 보면 서양의 정신은 과학적이고 우수하다고 느껴지지만, 자연의 대부분은 아직
인간의 “모름의 영역”안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한 모름의 영역을 대할 때는 동양
적인 사고의 흐름이 좀 더 포용적이고 적응력이 뛰어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오늘은 인간 본연의 문제들에 대한 노(老) 철학자의 깊은 사색의 문장들을 음미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철학은 용어가 쉽지 않을 경우가 많지만, 인간과 자연에
대한 깊은 사고의 흐름을 읽어내면서 보다보면 은근 진한 사색의 맛이 느껴지리라
생각합니다.
오늘도 평안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