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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by 해헌 서재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무문관(無門關)의 화두로 보는 인생의 질문”


강 일 송


오늘은 동서양 철학을 넘나들며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우리 시대 철학자인

강신주(1967~) 작가의 책 한 권을 보려고 합니다.


저자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드물게 대중성을 확보한 철학자입니다. 여러

베스트셀러를 가지고 있으며, 장자, 노자의 철학에서 문학과 철학과의 만남

을 시도하는 등 다양한 행보를 보이고 약간은 시니컬한 이미지로서

대중에게 다가오는 학자입니다.

그는 연세대에서 공학을 전공하다가 돌연 서울대와 연세대에서

철학 석사와 박사과정을 밟습니다.


오늘은 그가 전하는 불교철학을 통한 다양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한번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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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문관(無門關)


서양에서는 ‘The Gateless Gate'로 번역되는 ’무문관‘이라는 말, 이 말만 들어도

망치로 맞은 듯 띵하지 않습니까? ‘문이 없는 관문’이라니요. 도대체 이게 말이나

됩니까.


이 무문관은 송나라 때 무문 혜개(1183-1260) 스님이 48개의 화두를 선별해서 해설한

책 <무문관(無門關)>을 말합니다.

이 문은 문을 찾아 통과할 생각을 조금이라도 먹으면 통과할 수 없는 문이고,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풀리지 않는 딜레마나 역설로 가득 찬 문입니다.


하지만 이 문은 자신만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에게만 열린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어딘가에게 의존함이 없는 사람, 자기만의 방식으로 깨달음을 가지고 가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문입니다.


★ 움직이는 건 마음뿐!


“어느 날 사찰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두 스님이 서로 논쟁을

했다. 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라고 말하고, 다른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라고

주장했다. 서로의 주장만이 오갈 뿐, 논쟁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이때 육조(六組)

혜능은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두 스님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문관> 29칙, 비풍비번


행자들 속에 숨어 있던 혜능이 논쟁 중간에 등장하며 모든 논쟁을 종식시킵니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에 마음이 갔기 때문에, 바람이 움직인다거나 혹은 깃발이 움직

인다는 논쟁 자체가 가능한 것 아니냐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현상학(phenomenology)의 창시자 후설(Edmund Husserl,1859-1938)은 우리 마음이

가진 특성은 바로 ‘지향성,intentionality'에 있다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무엇인가에 쏠린다는 것, 이것이 바로 지향성입니다. 그는 또한

“지향성이 없이는 객관과 세계는 우리에 대해 현존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 자비와 이타심


자비는 분명 사랑이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비는 서로를 소유하려는 경향을

강하게 띠는 남녀 사이의 사랑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자비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이로움(利)이란

바로 ‘자유롭게 한다’, 혹은 ‘삶의 주인이 되도록 한다’는 의미입니다.

타인에게 그만의 본래면목을 찾아서 당당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바로

‘이타’라는 것이지요.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1813-1855)는 이야기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주관적이지만 모든 타인들에 대해서는 객관적, 또는 지나칠

정도로 객관적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정확히 자신에 대해서는 객관적이고

타인들에 대해서는 주관적일 수 있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주장은 아주 단순합니다. 보통 우리는 자신을 주체로 생각하지만 타인들은

하나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쉽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타인들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물건처럼 생각한다는 겁니다. 이렇다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가 타인을 사랑

한다는 것은 우리가 타인도 나와 마찬가지로 주체이고 주관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전제

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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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철학자 강신주 작가의 불교 선문답집의 화두를 중심으로 자신만의 철학적

세계를 서술한 책을 함께 보았습니다.


그중 저는 오늘 세 가지로 이야기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무문관이라는 용어부터 살펴보았는데, 문이 없는 문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요. 과거 어느 대통령이 대도무문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 것이

떠오릅니다. 이 문은 찾아 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드러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의도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 자기의 길을 알고 자기의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에게 열려지는 문이라고

말합니다. 쉬운 것 같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지요.


두 번째는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깃발이 움직인다 와 바람이 움직인다. 라는 논쟁

을 육조 혜능이 '마음이 움직인다'라고 종결을 시킨 내용이었습니다.

이미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라고 하였지요.


또한 현상학의 대가 후설의 말인

"지향성이 없고는 객관과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인지한 세계만 세계로서 인식하고 받아들이겠지요.

우리의 감각기관이 인식한 컨텐츠를 가지고 우리의 마음은 일어납니다.

즉, 마음이 일어나 지향성이 생겨야만 비로소 우리는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세 번째는 자비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자비는 남녀간의 사랑과는 다른 것이

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비의 기본 원리인 "상대방을 이롭게 하고, 자유롭게

한다"는 내용 때문인데, 남녀간의 사랑도 진정한 사랑은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자비의 영역에 들어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여튼, 진정한 사랑, 자비는 자신보다는 상대방에게 무게추가 넘어가 있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말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이 가득한

말인데,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는 주관적이고 남에게 대해서는 지나치게 객관적

이라는 것이지요. 인간은 본래 "selfish"(자기본위적)인 존재입니다.

내 발의 가시가 남의 암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 인간이지요. 하지만

이 영역을 벗어나 진정 남에게 주관적이고 자기에게 객관적임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위대함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종교가 추구하는 것이 사랑, 자비, 인, 도덕 등이 바로 이러한

자기본위적인 성향을 버리고, 타인에게 자기에게와 같은 사랑과 연민을 가지게

가르치지요.

물론 종교를 믿는다는 것과 실천의 문제는 좀 다를 수 있음은 익히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책의 제목처럼, 매달린 절벽에서와 같이 절박하고 생사가 갈리는 순간에도

어떤 결단을 내리고 새로운 세계, 미지의 영역으로 뛰어들 자신이 있는 사람에게

진정 무문관 이라는 문은 열릴 것이고, 진정 자신만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길이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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