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이 사랑한 파리>
“그림 속 풍경을 거닐다”
강 일 송
오늘은 예술의 도시, 파리를 배경으로 한 명작들을 찾아 현재 남아있는 그 현장을 찾으며
시간을 거슬러 감동을 다시 느끼게 해주는 책 한 권을 보려고 합니다.
저자인 류승희 화가는 1989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현재까지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파리 국립미술학교 비올레스 아틀리에에서 추상미술 작업을 했으며, 파리 1대학 팡테옹
소로본에서 학사, 석사, 박사 준비 과정 D.E.A 학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2005년 첫 책 “화가들이 사랑한 파리”(1판)를 출간한 이후 “빈센트와 함께 걷다”, “안녕하
세요, 세잔씨”,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따뜻하겠지” “파리 메모아르” 등을 출간하였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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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상주의와 풍경화
낭만주의 작가 샤토브리앙은 1793년에 한 편지에서 풍경화에 대해 이렇게 썼다.
“풍경화에는 지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이 있다. 어떤 재료를 쓰느냐에 따라, 다른 장소에서
자신의 감정과 꿈이 소생하는 느낌을 체험하게 해주는 것이 풍경화다.”
인상주의는 물체의 고유색을 부정하고 빛을 실험적으로 사용해서 물질에 종속된 색채를
해방시켰다. 인상주의의 이런 점을 두고 윌리엄 모리스는 그후에 일어난 모든 미술 운동은
인상주의에 빚지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인상주의는 어떤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태동했는지
잠시 살펴보자.
우선 인상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법대를 다닌 작가가 많았다는 점이다. 드가, 세잔, 마티스,
쿠르베는 법대에 다니다가 화가가 되었고, 보나르 역시 법대를 졸업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부유하기도 하고 가난하기도 했지만 모두 부르주아지 출신이었다. 누구도
농부나 노동자 계층 출신은 아니었다.
마네와 모리조의 아버지는 법관이었고, 드가의 아버지는 은행을 소유한 소귀족이었다.
시슬레의 아버지는 파리에서 회사를 경영했고, 은행업에 뛰어들어 성공한 세잔의 아버지는
그 도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렇듯 부르주아로 태어나 화가가 되면서부터 가난을 맛보게 된다.
경제력이 든든했던 카유보트, 드가, 마네 등은 가난한 동료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들이 그린 풍경화는 철도의 발전과 공장에서 물감을 생산해낸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새로이 등장한 튜브 물감은 가지고 다니면서 작업하기에 확실히 편리했다.
기차의 발달도 중요했는데, 도시를 떠나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아니면 파리 근교로 쉽게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미셀 외젠 슈브뢸이 1839년과 1864년에 쓴 두 권의 광학이론서는 인상주의를 낳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이후 점묘파, 분할주의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인쇄술의 발달도 빼놓을 수 없다.
★ 카유보트의 비 내리는 시간
-- 카유보트와 모스크바가
귀스타브 카유보트(1848-1894)는 화가이기도 하지만 수집가로도 명망이 높았다.
센의 법원 재판장인 아버지 덕분에 그는 스물다섯 살에 거액의 재산을 상속받는다.
그 덕에 그는 그림에 몰두하며 가난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허기를 달래주는 데도 큰 몫을
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인상주의 전시회를 여는 데 부족한 자금을 보태주고 모네에게 화실을 구해주는가
하면, 1883년에는 친구가 된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67점이나 구입한다.
그중에는 르누아르, 드가, 모네, 피사로, 세잔, 시슬레 등 인상주의 화가들의 주요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 카유보트의 기증 스캔들
카유보트가 세상을 떠난 후 이 작품들은 국가에 기증된다. 그런데 이 일은 거대한 스캔들을
일으키는데, 이 시기는 인상주의 작가들이 아직 인정받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기증한 내역을 보면 마네 3점, 모네 16점, 르누아르 8점, 피사로 18점, 드가 7점, 시슬레 9점, 세잔 4점이었다.
당시 신문은 “보는 눈의 수준이 이 모양이라니. 세상은 썩어가고 있다.”라고 악평을 늘어
놓았고, 일부 시민들이 시위를 하는가 하면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는 멸시의 눈길이 쏟아졌다.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탓에 기증한 작품 전부가 프랑스 박물관에 입성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프랑스 정부는 결국 엄청난 재산을 발로 차버린 셈이 되었다. 하여간 기증이
수락된 작품은 현재 오르세 미술관을 빛내는 대표작으로 자리 잡았다.
★ 카유보트를 유혹한 모스크바가의 매력
카유보트가 스물아홉 살에 그린 “파리의 거리, 비 오는 날”은 세로 약 2미터, 가로 약 2.7
미터에 달하는 대형 작품이다. 19세기 파리라는 도시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은
현재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에 소장되어 사람들을 유혹한다. 완벽하게 구획,정비된 새 도시
를 소개하려는 듯한 실감나는 묘사와 별 모양으로 펼쳐진 길에는 원근감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이 작품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모스크바가는 건물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 건물의 내부 또한
화려하게 조각된 천장이 감탄할 만하다.
파리 유학생이 유학 생활을 시작하고 제일 먼저 겪게 되는 것이 거주 문제인데 월세가 만만치
않은 데다 셋집 또한 한정되어 있어 집을 구하기조차 힘들다. 나는 이 그림에 나오는 건물
에서 몇 년 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그림을 그리던 중 손바닥만한 쥐가 나와 혼비백산하였다.
얼마 후 나는 벽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를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결국 이사를 했는데,
하지만 이 곳은 프루스트가 살았고, 마네가 살았던 곳이었다. 그리고 모네, 시슬레,
르누아르, 졸라, 말라르메도. 내가 살았던 카유보트의 그림 속 동네. 그 동네에 있는
나의 옛집 모스크바가. 고혹하고 아름다운, 내 추억이 고스란히 깃든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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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파리에 유학한 이후 삼십 년을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의 책 한 권을 함께
보았습니다. 이미 이 책은 2005년에 첫 판이 나왔고 꾸준히 입소문을 타며 스테디셀러에
오른 덕에 다시 재출판이 된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그림인 카유보트의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이 책의 표지에 있어서
바로 서점에서 집으로 가져왔네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상주의 화가 카유보트는
부자집에 태어나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많이 수집을 하였고, 그들의 일상의 유지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카유보트의 이 그림을 보면 1877년 그려졌으니 140년이 훌쩍 지났지만 현재의 사진과 비교
를 해봐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 마차가 다니던 길이 자동차로 채워졌고 사람들의
옷차림이 바뀐 것 말고는 말이지요.
미국의 도시들을 가보아도 수백 년 밖에 안 된 도시들도 과거와 큰 차이없이 보존이 되어
있는 것을 보지만, 우리나라 도시들은 그보다 훨씬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만 과거의 건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음을 보게되지요. 참으로 아쉽고, 우리는 우리의 보물들을 스스로 다
없애고 무너뜨린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됩니다.
처음 나온 인상주의 태동에 대한 작가의 설명은 상당히 흥미로웠는데요, 법대를 나온
사람들이 많았고 대부분이 가난한 농부나 노동자층이 아닌 부르주아 아버지를 둔 사람
들이 많았던 것도 새롭게 안 사실이었습니다.
철도가 발달하면서 도시 외곽으로 자연스럽게 나갈 수 있었고, 튜브 물감이 발명되고
대중화되어 작업실을 벗어나 쉽게 자연으로 다가간 것도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는 큰
혜택이었습니다.
초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세상에 등장했을 때는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전시회에 참여를 하지 못하자 따로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지요. 카유보트가 소장했던
인상주의 작품들이 혹평을 받으며 국립 박물관에 들어가지 못한 일을 돌이켜보면
저자의 말처럼 현재의 가치로 수천 억이 넘을 보물같은 작품을 제 발로 차버린 것과 같았습니다.
이를 현재에 대입을 해봐도, 현재 우리가 보기에 너무 앞서가서 예술처럼 보이지 않아
혹평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예술의 영역이 언젠가는 인상주의처럼 엄청난 평가를 받을
분야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더 열린 마음, 좀 더 유연한 사고, 세상에 대한 좀 더 부드러운 인식 등이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