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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사상적 DNA, 풍류>

“퇴근길 인문학수업 中”

by 해헌 서재

<한국인의 사상적 DNA, 풍류>

--“퇴근길 인문학수업 中”


강 일 송


오늘은 지난 번 소개했던 “퇴근길 인문학수업”책을 다른 내용으로 한번 더

살펴볼까 합니다.


글을 쓴 저자는 백상경제연구원으로 <서울경제신문>의 부설 연구기관으로 2002년

설립된 후 다양한 인문과학 융합교육을 위해 여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백상경제연구원이 서울시교육청과 함께 진행하고 있는 인문학 아카데미

‘고인돌(고전 인문학이 돌아오다)’를 바탕으로 기획한 책이고, 고인돌은 8만 여 명이

수강한 인기 프로그램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그중 한국인의 사상에 대해서 신창호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신교수는 동서양고전을 시대정신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며 활동하고 있는 인문학자

인데, 현재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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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의 사상적 DNA, 풍류


인간의 삶은 다채롭다. 다양한 색깔의 근간은 일과 놀이다. 일과 놀이의 이중주를

가운데 두고 온갖 연주와 합창이 개입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한국인은 삶에서 일과 놀이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전통적 언어를

사용했다. ‘풍류,風流’라는 고상한 개념이다. 풍류는 고대 한국인의 문화와 정신을

상징하는 언표로 현대어에도 종종 등장한다.


풍류는 ‘바람 풍.風’ ‘흐를 류,流’로 이루어진 한자다. ‘바람이 불어 흘러 지나가다.’

라는 낭만 가득한 유희를 담고 있다. 조선 후기의 방랑객 김삿갓이 인간의 희로애락을

노래하고, 수많은 선비가 자연을 벗 삼아 즐기며 살아간 것처럼 풍류는 아름다운

삶의 양식으로 전해졌다.


풍류를 잘못 이해하면, 풍류객이 먹고 놀기만 하는 이미지로 비쳐질 수 있다.

그러나 삶의 저변에 에너지를 축적하게 만드는 놀이의 본질을 심도있게 거론하면,

풍류는 인간 사회가 내뱉는 사상의 기저를 보여준다.


★ 일과 놀이는 하나


과학기술 문명의 발달에 힘입어 인간이 놀 수 있는 마당은 그야말로 무한히 확장

됐다. 심지어는 인공지능 기술을 응용한 로봇과도 대화하며 놀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20세기 초반 네덜란드 출신의 역사문화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저서 <호모 루덴스>에서 놀이와 유희에 재미있는 의미를 부여했다. 놀이는

단순히 문화의 한 요소가 아니다. 문화 그 자체가 놀이의 성격을 지닌다.


인간은 전통적으로 일과 놀이를 구분해왔다. 일과 놀이는 서로 반대되는 활동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일하는 가운데 즐거움이 배어 있고,

놀이 가운데 다가올 일을 구상하고 있다면 일과 놀이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이런 관점에서 일과 놀이는 동일한 의미의 세계에서 만나 함께 춤을 춘다.


우리는 한국인의 원초적 정신세계에서 일과 놀이가 하나의 의미로 녹아드는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 풍류 사상이다. 풍류에 관한 언급은 <삼국사기> 제4권 진흥왕

37년의 가사에 등장한다. 당나라 유학파 출신이면서도 골품제라는 계급사회에

한계를 느낀 최치원이 <난랑비> 서문에서 밝혔다.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다. 풍류라고 한다.”


★ 현(玄), 존재하나 잡을 수 없는 것


풍류를 이해하는 관건은 첫 문장에 강력하게 제시된 ‘현묘,玄妙’라는 표현에 있다.

이것의 이해를 위해 노자의 도덕경을 보면, 노자는 하고자 함이 없는 것과 하고자

하는 것, 즉 욕심이 없는 무욕(無慾)과 욕심이 있는 유욕(有慾)을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했다. 어째서 무욕과 유욕이 같은가? 정반대의 양상인데!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가물거리는 상황을 ‘현,玄’이라 했다.


우리가 현의 가물거리다 라는 뜻을 ‘검다’라고 이해를 하는데 이로인해 언제부턴가

풍류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유의 현상을 일으켰다. 사실 현에 담긴 맥락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봄날에 피어나는 아지랑이를 생각해보자. 몇 발자국 앞에서

가물거린다. 가까이 가면 물러나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푸른 바다의 물결을 보자.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랗고 때로는 무서울 정도로 검푸르다.

가까이 다가가 그 물을 떠보자. 투명한 무색이다.


그게 바로 현의 세계다. 알 수 없는 영역이지만 구체적으로 자신의 색깔을 띠고

나타나는 신비와 오묘 그 자체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자.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다. 희한하다.


★ 묘(妙),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이를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게 묘(妙)의 세계다. 묘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동시에 운동한다. 하얀 종이에 인장을 찍어보자. 양각과 음각,

오목한 모양과 볼록한 형태로 구성된 인장에서 어느 것이 보이는 세계이고 어느

것이 보이지 않는 세계인가? 결론은 둘 다이고 그 둘의 동시 존재가 인장의

생명력이다. 양각이나 음각 가운데 하나만 고려해 인식하면 본래의 모습은

구현해 낼 수 없다. 서로 다른 차원을 동시에 봐야한다.


최치원은 유교, 불교, 도교를 모두 끌어안으며 이를 풍류로 표현했다.

그게 한국인의 DNA로 남아 있다. 이러한 사유가 포괄적으로 녹아들어 우리

몸에 들어왔다. 그리고 한국이라는 동일한 사회에 다양한 측면으로 드러났다.

현묘 자체가 그러하다. 저 바다는 출렁이며 존재할 뿐이다. 때로는 검푸르게

보이기도 하고, 하얗게 파도로 부서지기도 한다.


풍류가 담고 있는 유교, 불교, 도교는 모두 인간의 삶에 관계하는 사유의

틀이다. 사유는 발휘의 차원에서 다른 양상을 표출한다.


★ 바람 따라 떠도는 삶, 바람이 머무는 자리


이 현묘의 세계에서 진리는 무엇인가? 유교인가, 불교인가, 도교인가?

무엇이 삶의 기준이 되는 사고일까? 풍류에서는 사유의 실체를 어느 하나로

고정시키지 않는다. 펼쳐지는 상황에 따라 현묘한 세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바람 따라 떠도는 삶’ 내 삶을 형성하는 일과 놀이의 조합이

진실을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유불도로 상징되는 세 가지 오목과 볼록한 차원, 그 여러 가지 상태는 늘

동시에 맞닿아 녹아든다. 실제 인식과 표출은 인간에게 부는 바람, 인간이

만들어나가는 바람에 의해 결정된다.

오늘도 일과 놀이의 사이 세계를 넘나드는 내 인생의 풍류!

바람이 머무는 자리는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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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고려대 신창호 교수의 한국인의 풍류 DNA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보았습니다.


우리 민족은 바람과 연관이 많다는 생각입니다. 한번 신바람이 나면 신들린

듯이 몰아붙이고, 자신의 평가된 능력 이상을 해냅니다.

풍류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은 어디 한 군데에 머물지를 않고 꽉 채우지를

않습니다. 그림을 보아도 서양화는 여백 없이 화면을 꽉 채우지만, 우리

그림은 여백이 더 많지요.


음악에서도 딱 틀에 잡힌 음악이 아니라 시나위 등에서는 즉흥 연주가 예사로

이루어집니다. 마치 현대의 재즈와도 맞닿아 있어서, 흥에 취해 즉흥

애드립이 나오기도 합니다.

우리의 도자기를 봐도 일본에서 보물로 인정받는 ‘이도다완’등은 막사발이라고

불릴 만큼 어느 하나 똑같은 모양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노래방이 많고, 국민 모두가 가수처럼 한가락씩 하는 나라는

드물고, 이런 바탕이 방탄소년단처럼 세계적인 한류스타를 탄생시키지 않았나

합니다.

신라시대의 풍류가 시대를 따라 면면이 우리 민족의 핏줄에 흘러 이 시대의

한류까지 흘러왔네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일만 열심히 하고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놀기만 하고

살 수는 없지요. 조임이 있으면 풀림이 있어야 하고,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 균형잡힌 삶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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