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인문 인류

<암흑시대를 뚫고 피어난 르네상스의 빛> (1)

“퇴근길 인문학 - 전환”

by 해헌 서재

<암흑시대를 뚫고 피어난 르네상스의 빛> (1)

“퇴근길 인문학 - 전환”


강 일 송


오늘은 예전에 소개했던 “퇴근길 인문학수업-멈춤”에 이어 “전환”편을

살펴볼까 합니다.


글을 쓴 저자는 백상경제연구원으로 <서울경제신문>의 부설 연구기관으로 2002년

설립된 후 다양한 인문과학 융합교육을 위해 여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백상경제연구원이 서울시교육청과 함께 진행하고 있는 인문학 아카데미

‘고인돌(고전 인문학이 돌아오다)’를 바탕으로 기획한 책이고, 고인돌은 8만 여 명이

수강한 인기 프로그램이라고 합니다.


“퇴근길 인문학” 시리즈는 “멈춤”, “전환”, “전진” 편으로 나뉘어 있고, “멈춤”은

이미 소개를 했고, 오늘은 “전환”편의 다양한 내용 중 “르네상스”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 글은 민혜련 작가의 저술인데, 그는 ‘르네상스적 인간’을 인생의 모토로 삼고

살아가는 파리 문화예술 전문가로, 프랑스 캉 대학에서 불문학 박사 수료, 서경대

와인발효공정 공학 전공으로 공학박사를 마쳤습니다.

저서로 <게스트하우스 France>, <일생에 한 번은 파리를 만나라>, <민혜련의 파리

예술기행>, <관능의 맛, 파리>, <르네상스;빛과 꽃의 세기> 등이 있습니다.


===========================================================


★ 서로마 멸망과 장원제도 형성


476년,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서로마가 멸망한 후 로마제국은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식민지 도시는 폐허가 되고 제국의 운영체계가 무너지면서 혼란이 찾아왔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로마제국 말기에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면서 서유럽의 게르만족도

광범위하게 개종했기 때문에 교회 행정망은 숨을 쉬고 있다는 정도였다.


상업이 줄어들고 농경사회가 다시 되면서 ‘토지’가 가장 중요한 생산기반이 된 것이다.

각 촌락은 독립된 자급자족의 경제체제가 되어 관습적으로 세습되며 영주가 다스리는

장원(莊園)이 됐다. 장원에서의 생활은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주민 생활을

통제하는 틀이 됐다.


★ 봉건제도와 막강해진 교회 권력


북해의 강인한 바이킹족과 헝가리 마자르족이 배, 혹은 말을 타고 약탈을 일삼았다.

결국 자신을 지킬 힘이 없었던 농민들은 군사를 모을 힘이 있는 사람, 즉 기사

밑으로 들어가 보호를 요청하였고, 기사는 더 힘이 센 영주를 주군으로 모시며

보호를 받아야 했다. 이렇게 힘의 사다리를 올라 영주 위에는 대영주, 그리고

제일 꼭대기에는 국왕이 자리하는 일종의 계약체계인 봉건제도가 완성됐다.


하지만 국왕은 전체를 통제할 힘은 없었고, 봉건제는 일종의 느슨한 연방제였다.

또한 큰 나라를 운영해본 경험이 없는 게르만족이 지배하는 땅에 국가를 세우려면

교회 행정망에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로마 교황의 권력이

강력해지면서 서유럽 모든 나라에서는 교황이 대관식을 거행했다.

중세후기 유럽 각 지역이 국가의 틀을 잡아가자 세속 왕들은 교황의 권위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고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7세와 벌인

‘카노사의 굴욕’이 대표적이다.


교회의 힘이 막강했으므로 중세 내내 어둡고 무거운 기독교 교리가 강요됐다.

성경의 내용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고전은 금서가 됐고, 인간은 오직 사후

세계인 천국을 위해 현세의 삶에서는 금욕과 청빈으로 인내해야 했다.

농촌에서의 생활은 무겁고도 답답했을 것이다. 그래서 흔히 중세를 암흑시대

라고 한다.


★ 이슬람의 부상, 십자군전쟁의 시작


한편 7세기 중엽 마호메트의 후계자들은 소아시아에서부터 유럽, 북아프리카에 걸쳐

거대한 사라센 대제국을 건설한다. 그들은 한 손에는 코란,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이교도들을 정복해나갔다. 유럽이 장악했던 지중해의 해상권도 장악해 이탈리아를 거쳐

들어오던 중국과 동방의 교역품들도 아랍인들이 차지했다. 거기다가 기독교인들이

사후에 천국으로 가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했던 성지순례길이 막힌 것은 더 큰

문제였다. 순례의 목적지인 예루살렘이 이들의 영역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10세기경이 되자 호전적인 튀르크의 셀주크 왕조가 이슬람의 주세력으로 떠올랐다.

강성인 셀주크 왕조는 동유럽의 비잔틴 왕조를 본격적으로 압박하였고, 다급해진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당시의 교황이던 우르바누스 2세에게 서신을 보내

서유럽 세계에 참전을 촉구했다.


이는 곧 온 유럽인들의 신앙심을 자극했고, 각 나라의 국왕들은 참전을 결행했다.

그리하여 시작된 십자군전쟁은 아랍 세계와 서유럽 사이에 씻을 수 없는 깊은

골을 남기게 된다. 11-14세기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벌인 이 지루한 전쟁은 서유럽

에는 성전(聖戰)이었지만 이슬람에게는 엄연한 침략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자 신앙의 순수한 열정은 사라지고 교황과 영주들은 각자의 정치적

경제적 이권을 노골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했고, 전쟁은 무자비한 약탈과 침략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 되다.


기독교의 광기 같았던 십자군전쟁은 많은 상처를 남겼지만 서유럽에 예기치 않은

선물도 주었다. 에게해와 지중해의 해상무역을 통해 상업이 발달한 이탈리아의

항구도시들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부를 축적한 상공업자들이 의식을 가진

시민계급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슬람의 땅에 도착한 십자군은 그 옛날 그리스와 로마가 건설했던 고대 헬레니즘의

찬란한 빛을 재발견하게 된다. 기독교 사상에 반대되는 모든 사고를 죄악시한 서유럽

과는 달리 이슬람의 술탄들은 고대 사상을 잘 보존하고 이를 더욱 발전시키고 있었다.

자신들의 뿌리를 발견한 서유럽은 놀라움에 매료됐고, 수백 년간 금지됐던 고대의

서적들이 서유럽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그리스의

인본주의 세계관이었다.


물질세계와 인간의 이성을 중시한 아리스토텔레스나 지동설을 주장한 아리스타코스 등

기독교 교리와 반대되는 사상서도 대거 섞여 있었다. 숫자와 0의 개념, 10진법 등은

수학, 천문학 등의 실용과학이 발달했던 아라비아와 인도로부터, 화약과 종이, 나침반

등은 중국으로부터 전해졌다. 이는 서로 시너지를 일으켜 세계가 서유럽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계기가 되었다.


★ 깨어난 이성과 근대의 발달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했을 때 중국에서 종이가 전해지지 않았다면 인쇄술이

그토록 발전할 수 있었을까? 인쇄된 수많은 서적과 팸플릿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중국에서 나침반이 전해지지 않았으면 콜럼버스 등이 장거리

항해를 할 수 있었을까? 중국에서 화약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근대 유럽의 무기가

그토록 발달할 수 있었을까? 아라비아 숫자와 0의 개념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금융자본주의와 컴퓨터로 이루어진 현대 문명이 발달할 수 있었을까?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휴머니즘이 시작되고, 이렇게 시작된 르네상스는 인문학과

예술을 찬란히 꽃피웠고, 결국 부패한 교회에 반해 다시 성경과 신앙 자체로 돌아

가자는 종교개혁을 탄생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도시국가에서 경험한 상업경제는 이후 신대륙과 함께 대규모 자본이 유럽으로

유입되어 교육받은 부르주아 계층이 사회의 중심이 되는 세상의 원동력이 됐다.

깨어난 이성은 자연에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자연을 연구하고

개척하는 서양의 도전 정신을 일깨웠다. 일련의 모든 변화는 수 세기가 지나며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로 귀결돼 프랑스대혁명을 통한 근대 민주주의와 산업혁명을

예고했다.


===============================================================


오늘은 인문학 강의 중, 르네상스의 전문가인 민혜련 작가의 입을 빌려 르네상스

의 배경과 의미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역사는 인간에게 많은 교훈을 줄뿐 아니라 일련의 연속적인 사건들을 통한 통시

적인 시각을 가지게 해주고 흥미 또한 함께 제공합니다.


언제까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로마의 영화도 끝이 나고, 그들에게는 야만인과

같았던 게르만족이 유럽을 장악하고 지배하게 됩니다. 그들은 교회의 행정력과

망이 필요했고, 기독교 세계의 힘이 막강해지며 중세는 기독교 세계관이 수백 년

간 지속이 됩니다. 장원제도와 봉건제도가 이와 맞물려 돌아가지요.


하지만 그들의 동쪽에서는 이슬람 세력이 커져갔고, 이들이 소아시아와 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하고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이 그들 수중에 넘어가자

서유럽의 왕들과 교황은 십자군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처음 순수했던 종교적 열정과 의지와는 달리,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차 자기들의

이익과 탐욕이 넘치는 약탈의 전쟁으로 변질되었고 엄청난 소모전이 지속이

되었습니다.


역사는 늘 양면성이 존재해서 아름답지 못한 십자군전쟁이었지만 서유럽은 이

전쟁으로 인해 많은 깨달음과 새로운 사상이 유입되는 결과를 갖게 됩니다.

즉,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을 아랍이 잘 보존하고 있었고, 이를 접하면서

르네상스의 발판이 마련이 됩니다.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고 발달된 아랍과 인도로부터

수학, 천문학이 들어오고, 중국으로부터 화약, 나침반, 종이 등이 들어옵니다.

아이러니하게 화약, 나침반, 종이는 서유럽이 나중에 중국을 침략할 때 가장 큰

도구가 되는 발명들이었지요.


화약으로 뛰어난 총기를 가지게 되고, 나침반은 대항해를 가능하게 하여 신대륙

을 식민지로 삼아 엄청난 부를 가져오게 됩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종이의

유입으로 꽃을 피워 학문의 발전과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가 결국 서유럽의 과학발달과 민주주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이는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를 되살펴 본다면, 인간의 삶은 따로 혼자만의 역사가 아니라, 이처럼 서로 멀리

떨어졌던 동서양, 신대륙, 기독교, 이슬람 세력 등이 서로 부딪치고 융합되고 서로

영향을 주면서 어우러진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 다른 주제로 연이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