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인문학 – 전환”中
<아편전쟁과 중국차(茶)> (3)
“퇴근길 인문학 – 전환”中
강 일 송
오늘은 “퇴근길 인문학 수업, 전환” 편의 세 번째 이야기를 이어보려고 합니다.
글을 쓴 저자는 백상경제연구원으로 <서울경제신문>의 부설 연구기관으로 2002년
설립된 후 다양한 인문과학 융합교육을 위해 여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백상경제연구원이 서울시교육청과 함께 진행하고 있는 인문학 아카데미
‘고인돌(고전 인문학이 돌아오다)’를 바탕으로 기획한 책이고, 고인돌은 8만 여 명이
수강한 인기 프로그램이라고 합니다.
지난 시간은 “불안”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해 보았고 오늘은 중국에서 시작된
‘차(茶)’와 ‘아편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글쓴이는 신정현 작가로 중국차의 매력에 빠져 차를 업으로 삼고 있는 차 전문가입니다.
이화여대 중어중문학과 학사를 마치고 중국 운남농업대 다학과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마쳤습니다. 현재 중국차 전문점 죽로재를 운영하고 있고, 저서로 <보이차의 매혹>,
역서로 <운남 보이차 과학> 등이 있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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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 열풍에 휩싸인 영국
1662년 포르투갈의 캐서린 공주가 영국의 찰스 2세에게 시집오면서 영국에 홍차 마시는
습관이 전해졌다. 캐서린이 가져온 홍차는 왕실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영국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차가 늦게 보급되었지만, 차 마시는 습관은 어느 나라보다
빨리 퍼졌다.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이 중국산 실크로 된 옷을 입고, 중국산 찻잔에
홍차를 붓고, 카리브해에서 재배한 설탕과 우유를 넣어 마셨다. 여기에는 엄청난 돈이
필요했다. 유럽에서 홍차를 마신다는 것은 부와 신분을 상징했다.
상류층의 유행은 곧 전국으로 퍼졌다. 스코틀랜드의 가장 가난한 가정에서도 차를 매일
마실 정도가 됐다. 영국인들은 차를 구입하기 위해 수입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비용을
지불했다. 사람들이 너무 열광적으로 차를 마셨기 때문에 정부가 이를 막을 방안을 연구
하기도 했다.
정부는 차가 건강을 해친다고 홍보했지만 차열풍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법, 결국 가짜 차가 시중에 나돌기도 했다.
★ 영국의 무역 적자와 전성기의 청나라
영국은 중국에서 차와 도자기와 비단을 수입하고, 대가로 많은 양의 은을 지불했다.
그러다 보니 영국의 무역 적자가 심각했다. 영국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중국 황제에게
사신단까지 보냈다.
청나라는 건륭 황제 때 전성기를 맞았고, 물산이 풍부해서 도무지 부족한 것이 없고,
태평성세였다. 그런 황제에게 영국 사신단은 하찮게만 보였다.
사신단은 황제에게 현재 개방된 광저우항 외에 추가로 항구를 더 개방해 달라고
부탁했다. 황제는 단칼에 거절한다.
★ 아편에 중독된 중국
영국 사신들은 중국인이 사지 않고는 못 배길 물건을 생각해냈다. 바로 아편이었다.
양귀비 열매에 칼로 상처를 내고 즙을 받아서 말린 것이 생아편이다.
아편은 본래 원나라 때 인도를 침략하고 돌아올 때 가져온 것이었다. 이때는 마약이
아니라 귀한 약제였다.
17세기 말 수마트라인들은 독성이 강한 생아편을 개선한 숙(熟)아편을 개발했다. 양귀비
열매즙을 끓이고 여과해서 담뱃잎에 섞어 대나무파이프로 피웠다. 아편 수입은 급속도로
늘었다. 물론 중국 정부가 수입을 허가한 것은 아니었다. 밀수였고 아편을 공급한 것은
영국이었다. 그들은 식민지 인도에서 아편을 재배하고 중국에 팔았다.
중국인들은 영국인이 만든 제품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아편은 사고 또 샀다.
아편에 중독된 중국인들은 집을 팔고 밭을 팔고 나면 아내와 딸을 팔았다.
아편은 순식간에 중국 전역에 퍼졌다. 건륭 황제의 손자인 도광 황제는 아편이 중국을
병들게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도광 황제에 이르러서 나라 재정은 형편
없이 어려워졌다.
궁리 끝에 도광 황제는 영국 상인들이 밀수로 들여오는 아편을 몰수해서 불태워버렸다.
도광 황제나 그의 신하들은 순진한 사람들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여전히 중국이 세계의 중심인 줄 알았고 영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강한지도
몰랐다. 영국인들이 얼마나 뻔뻔한지도 몰랐다. 영국인들은 중국 정부가 자신들의
소유권을 침해했다며 전쟁을 일으켰다.
사실 중국인들은 이 전쟁에서 진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황제는 출정하는 군인
들에게 “가서 중국 군대의 기상을 보이라. 영국인들은 그 기상만 보고도 전쟁할 의지를
잃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은 졌다. 이때부터 유럽 열강의 중국 침탈이
본격화됐다.
★ 인도에 밀려난 중국차
한편 이즈음 영국은 완전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었다. 이 일은 로버트 브루스라는
상인이 1823년에 인도 아삼 지역으로 가면서부터 시작됐다. 그곳에서 야생 차나무를
발견했고, 인도에서 차가 재배될 수 있다는 것을 안 그들은 중국에서 차나무 씨앗과
묘목을 수집해 인도로 보냈다. 처음에는 실패를 했지만 중국차 가공기술자를 설득해
인도로 보내고, 이런 노력이 결실을 보아 아삼과 다르질링에 대규모 다원(茶園)이
조성됐다.
또한 영국은 차 만드는 기계를 만들었다. 기계는 빨랐다. 하루에 엄청난 양의 차를
생산해 냈고, 품질 또한 일정했다.
곧 세계시장에서 인도차는 쉽게 중국차를 눌러버렸다. 1888년에 인도차 수출액이
중국차를 앞섰다. 인도는 영국의 식민자라 영국으로 수출하는 차에 관세도 붙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차에는 35%라는 관세가 붙었다.
이후 중국차는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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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차(茶)를 통해 근대사를 조명해 보는 시간을 함께 가졌습니다.
실로 중국은 세계사에 엄청난 발명을 유럽에 전해주었고, 이는 거꾸로 자신들을
침략하게 할 원동력을 함께 준 것이었습니다. 당나라, 명나라, 청나라 전성기 때의
중국은 정말 유럽보다 앞서 있었고 스스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전해준, 화약, 종이, 나침반 등은 서양의 근대무기, 인쇄술의 확장, 원양
항해의 가능으로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의 식민지 개척에 날개를 달아주었고
스스로도 침략을 당해 패전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중국차는 영국으로 전해져 온 국민이 사랑하는 국민 음료가 되었고, 이는 경제적으로
부담을 느낀 영국이 중국을 침략하는 원인이 되었지요.
역사적으로 아편전쟁은 참으로 근본이 아름답지 못한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영국
의회에서도 찬반이 비슷하게 나와서 불과 몇 표 차이로 전쟁의 승인이 났고, 이로
인해 세계 역사는 많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세계 차 생산을 독점하던 중국은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에서 양질의 차가 대량 생산
됨으로써 차 종주국의 위상을 내려놓습니다. 저자는 영국의 로버트 브루스를
“영국의 문익점”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네요. 중국차의 씨앗과 묘목을 가져와 인도
에서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했고, 산업혁명의 주역답게 기계화를 시켜서 좋은 품질의
차를 풍성하게 생산해서 영국 국민들이 차를 저렴하게 즐길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지금도 계속되어, 차를 일찍이 마셨던 중국, 한국, 일본보다 오히려
차 및 홍차의 문화는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꽃을 피웠고, 중국, 한국,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유럽에 전수되어 가장 고가의 도자기들은 유럽에서 생산이 되고 있지요.
중국 도자기를 유럽에서 생산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 끝에 독일의 마이센 가마에서
최초로 도자기를 굽게 되고, 영국의 웨지우드 가문 등도 성공을 합니다.
지금도 독일의 마이센 도자기와 영국의 웨지우드 도자기, 헝가리의 헤렌드 도자기,
덴마크의 로열 코펜하겐 등은 고급 도자기의 대명사로 불립니다.
다음 시간에 다른 내용으로 찾아오겠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