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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2) - 김영하

여행의 의미, 비(非)여행, 탈(脫)여행

by 해헌 서재

<여행의 이유>(2) - 김영하
-- 여행의 의미, 비(非)여행, 탈(脫)여행

강 일 송

오늘은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라는 산문집을 다시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저자인 김영하(1968~) 작가는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및 동대학원 석사를 졸업했으며, 1995년
<거울에 대한 명상>으로 등단하고, 이듬해 첫 장편소설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로
제1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했습니다. <살인자의 기억법>, <너의 목소리가 들려>, <퀴즈쇼>
, <빛의 제국>, <검은 꽃>, <아랑은 왜>, <오직 두 사람>, <보다>, <말하다>, <읽다> 등의
많은 작품들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여행기란 무엇인가”, 인생과 여행은 어떻게 닮았는가, 여행의 플롯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번에는 여행, 비(非)여행, 탈(脫)여행, 여행의
의미 등에 대해서 논해 보려고 합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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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여행

대학을 졸업할 무렵부터 그후로 군복무 기간을 제외하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행장을
꾸려 여행을 떠났다. 그 많은 여행 중에서 가장 이상했던 여행은 무엇이었나?
아마 2017년과 2018년에 걸쳐 방영된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이라는
TV프로그램과 관련한 일련의 여행들일 것이다.

왠지 보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에서 제목을 따왔을 것만 같은 이 프로그램은
제작과정도 보르헤스나 카프카의 소설처럼 기이하고 환상적인 구석이 있었다.
바로 이 프로그램에서 나는 “모든 여행은 끝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게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아침에 모이는 순간부터 출연자들의 일거수일투족, 모든 발언이
녹화되고 녹음된다. 여행이 끝나고 서울로 귀환하면 프로듀서들은 이 영상들을 보며
편집을 시작하는데 리뷰만 하는 데도 엄청난 시간이 들 것이다. 닷새 정도의 모든
영상을 보아야 하고 그중에서 뭘 담을지 버릴지 결정해야 하며 사실과 부합하는
지도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

이 여행이 매우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바로 이 순간, 완성된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매주 금요일 밤이었다. 그전까지 나의 모든 여행은 확고하게 일인칭이었다.
나의 시점에서 세상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다. 당연히 내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알쓸신잡 같은 여행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되면 나는
‘여행을 하는 나’를 삼인칭 시점으로 보게 된다. 나는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되어서 화면을 바라본다. 열여덟 시간 예상치 못한 각도에서 찍힌 나를
처음으로 보게 되는데 화면 속의 나는 여행 중이다.

다른 출연자의 여행도 그때에야 비로소 보게 된다. 촬영중에는 대체로 다른
출연자의 여행에 대해 들을 뿐이다. 그가 실제로 뭘 보았는지는 전적으로
그의 말에 의존해야 한다. 총괄 프로듀서는 각 4명의 18시간을 모은
72시간으로 간접적으로 여행을 경험하고 수십 명이 프로그램을 편집한다.
여기서 일종의 카프카적 상황이 발생한다. 수십 명이 프로그램에 관여하지만
이 여행의 전부를 경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을 확보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거듭하여 말한 것처럼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줄이고 현재에 집중할 때, 인간은 흔들림 없는 평온의 상태에 근접한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 비(非)여행, 탈(脫)여행

방송을 하면서 나는 아테네, 전주, 피렌체, 부산 등을 다녀왔지만 내가 다녀온 곳은
그 도시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그 도시를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마치 금강산 유람을 떠난 조선시대의 양반이 높은 봉우리는 하인을 시켜
다녀오게 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실제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20세기 이전에는
힘든 여행은 아랫 사람을 시키고 지체가 높은 이들은 유람의 범위를 벗어나는
모험은 삼가왔다. 21세기의 우리는 남을 시켜 좋은 구경을 하고 오게 하고 나중에
이야기만 전해 들었던 유럽의 귀족이나 조선의 양반을 비웃지만, 과연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다를까?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바야르는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유쾌한 책에서 이런 여행을 비(非)여행, 혹은 탈(脫)여행이라고 불렀다.
바야르는 이마누엘 칸트가 단 한 번도 자신이 사는 쾨니히스베르크를 벗어나지
않았으면서도 지리학 강의를 열었던 것을 이런 비여행의 예로 든다.

다른 사람을 시켜 대신 여행하게 하고 자신이 나중에 그것을 재구성하는 데에는
이점이 있는데, 바야르에 의하면 그것은 ‘어떤 타자를 감수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여행을 했을 때 놓칠 수 있는 것을 타인을 통해 경험하는 것, 타인이
놓쳤을 어떤 것을 상상력을 동원해 복원하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의 정신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보았다.

★ 여행 경험의 완성

우리는 흔히 여행을 다녀왔다고 말하지만, 그 도시의 속속들이 다녀온 것은 아니다.
설령 그 도시의 주민이라 할지라도 그 도시의 전부를 알지 못한다. 나 역시
서울에 살고 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지역은 아주 한정돼 있다.
그런데도 외국인이 서울에 대해 물으면 마치 서울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처럼
행세한다. 때로는 서울에 대해 책을 읽은 외국인이 나보다 더 정확하게 총체
적으로 알고 있을 때가 많다.

영어에는 ‘armchair traveler’라는 표현이 있다. 우리말로 바꾸자면 ‘방구석 여행자’쯤
될 것이다. 편안한 자기 집 소파에 앉아 남극이나 에베레스트, 타클라마칸사막을
탐험하는 여행자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행 에세이나 여행 다큐멘터리 등을 보고
어떤 여행지에 대한 환상을 품는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그곳을 다녀온다.

여행의 경험은 켜켜이 쌓여 일종의 숙성과정을 거치며 발효된다. 한 층에 간접경험을
쌓고 그 위에 직접 경험을 얹고 그 위에 다시 다른 누군가의 간접경험을 추가한다.
내가 직접 경험한 여행에 비여행, 탈여행이 모두 더해져 비로소 하나의 여행
경험이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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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 책의 두 번째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김영하 작가는 뛰어난 소설가이기도 하지만, 방송에서 보여지는대로 훌륭한
지식인이자 달변가, 방송진행인이기도 합니다. 일명 <알쓸신잡>에서 그는
다양한 여행의 경험과 지식 등을 멋지게 풀어내고 있고, 이 책의 내용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면 될 듯 합니다.

저자는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로,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불안에 대해 신경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온통 현재에 집중하게 하는 힘이 여행에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낯선 곳에서 당장 먹을 것과 잘 곳을 확보해야 하는 급박함이 여행을
현재, 'Now' 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본래 인간은 농경을 하기 전까지는 풍족한 먹거리와 안전한 장소를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던 유목민이었지요.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깊은 내면의
DNA로 들어가면 정주하기 보다는 이동하는 본능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지
아닐까 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바야르의 "비여행, 탈여행"에 대한 개념은 상당히 색다른 것이
었는데, 과거 유럽의 귀족이나 조선의 양반들이 하인을 시켜 대신 높은 봉우리
나 산을 다녀오게 했다는 것이 이러한 비여행, 탈여행에 해당한다 합니다.
이것이 대체 무슨 여행인가 싶은데, 저자는 현대의 우리가 하는 여행도 상당
부분은 이런 여행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하네요.

우리가 한 여행지를 다녀왔다고 하지만 과연 우리가 그 곳의 모든 장소를 가 본
것이 아니고, 비록 그 곳에 사는 주민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또한 여행 에세이, 여행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여행 블로그
등등 수많은 여행의 간접경험 형식이 존재하고 있고, 이런 간접경험과 직접
경험 등이 뒤섞이고 켜켜이 쌓이고 발효되어 진정한 여행의 경험이 완성된다고
하는 개념은 훌륭하다고 하겠습니다.

인간을 표현하는 방식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생각하는 인간",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언어를 가진 인간", "지혜로운 인간", 등등. 오늘 저자의 이야기를 더
얹어서 보자면 인간은 "여행하는 인간"이기도 합니다.

인생을 여행에 비유한 것은 동서양, 고금이 따로 없습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이고, 인생은 하숙생과 같은 삶이고, 인생은 여인숙에 머무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지요.

하지만 이러한 여행을 오롯이 자기만의 여행으로 만들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장으로 여기고, 늘 기대하고 배우는 자세로 임한다면 재미있고, 보람되고,
아름다운 여행의 여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