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 클래식> - 재미있는 클래식 이야기 “이름처럼 행복했던 음악가 멘델스존(1809-1847)”
강 일 송
오늘은 우리에게 쉽게 클래식 음악을 소개해주고, 흥미까지 돋우는 <이지 클래식>의 두 번째 이야기를 이어볼까 합니다. 류인하 작가가 만든 팟캐스트 <이지 클래식>은 한국 아이튠즈 인기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적 있고 월간 <객석>에서 선정한 ‘핫’한 인기 팟캐스트에도 선정된 바 있다고 하였지요.
저자가 이끄는 음악가들의 흥미로운 삶 이야기 두 번째 편으로 멘델스존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1809년 2월 3일,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유대인 가문 중에서 굉장히 명문가라 칭할 만한 집안이었고, 할아버지는 계몽주의 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파리와 함부르크에서 큰 은행을 경영하는 은행가였습니다. 어머니 레아 살로몬 역시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정 은행가로 일했던 다니엘 이치크의 손녀였으니, 명문가끼리의 결합으로 탄생한 대단한 혈통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유명 인사들이 멘델스존의 저택을 드나들었는데, 철학자 헤겔,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 그림동화로 유명한 야코프 그림, 작곡가 훔멜, 슈포어, 베버 등이 그랬습니다. 게다가 그의 저택에서는 전속 오케스트라를 고용해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열었고, 멘델스존이 작곡한 곡은 전속 오케스트라가 연주하여 발표하니, 자신의 연주를 들으면서 수정도 하고 이는 음악적으로 큰 이점으로 작용하였습니다.
당시 유명 음악가였던 카를 프리드리히 첼터에게서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고, 바이마르 방문 때 괴테를 만나기도 했다 합니다. 70대의 괴테는 고고하였으며 아무나 상대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12세의 어린 소년에게만은 예외였습니다. 매일 소년의 연주를 들었고, 함께 식사를 했으며, 같이 산책을 다녔습니다. 이 놀라운 소년은 괴테에게 피아노 4중주를 헌정하며, 대문호에 대한 존경을 표했습니다.
★ 음악적 소울 메이트, 누나 파니 멘델스존
펠릭스 멘델스존에게는 서로를 쏙 빼닮은 네 살 위의 누나 파니가 있었습니다. 태어나서부터 함께였고, 공교롭게도 파니의 죽음 이후 실의에 빠졌던 멘델스존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것을 고려하면 두 사람의 관계는 보통이 아니었지요. 누나인 파니는 모차르트에 비견될 정도의 뛰어난 음악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음악가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과는 달리 파니는 음악가로서의 삶을 포기할 수 없었고, 적극적 으로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려고 노력했지만 안타깝게도 고혈압으로 쓰러져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 인정받는 음악가, 흥행의 보증수표
멘델스존은 10대 때부터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소품,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곡을 썼습니다. 그가 작곡한 수많은 곡 중, 멘델스존의 대표곡으로 손꼽히는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은 그의 나이 17세에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지휘자로도 활발하게 활동했는데, 1829년 바흐가 죽은 뒤 최초로 <마태수난곡>을 지휘하여 바흐 부흥운동의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이 지휘를 계기로 그는 천재 작곡가, 뛰어난 피아니스트 외에 고음악의 권위 있는 해석자, 대표적인 지휘자로서도 발돋움했습니다.
1833년 그는 뒤셀도르프의 음악 감독이 되었고 이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에서 지휘자를 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쇼팽, 슈만과 친교를 맺었습니다. 오라토리오 <파울루스>에 이어 발표한 곡들이 연달아 성공을 거두자 멘델스존의 이름은 독일에서 흥행 보증수표로 알려졌습니다.
1836년 26세의 멘델스존은 프랑크푸르트에서 프랑스 개신교 목사의 딸 세실 장르노와 만나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다섯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의 누나 파니는 동생의 아내에 대해 “그녀는 순진하며 귀엽고 신선하며, 영리하고 좋은 성격을 가졌다. 동생은 아주 행운아인 것 같고, 그녀를 말할 수 없이 사랑한다.” 고 칭찬했습니다. 행복한 가정이 생긴 후 그는 수많은 곡을 작곡했습니다.
★ 누이 파니의 사망과 연이은 사망
멘델스존은 평생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부지런히 살았습니다. 멘델스존은 아내와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과 온전히 작곡에 몰입할 시간을 간절히 원했지만, 세상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그를 유럽 곳곳에서 찾았고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습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을 알현했고, 영국에서도 무대에 올랐습니다.
무사히 영국 일정을 보내고 프랑크푸르트에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누이 파니의 사망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에게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소식을 듣자마자 쓰러졌다고 합니다. 이후 요양 겸 여행을 다녀왔지만, 갑작스러운 발작과 함께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1847년 그는 사망하고 맙니다.
그의 자택 앞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장례식이 있었던 11월 7일에는 수천 명의 군중이 참석해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과 타고난 재능을 빛낸 음악가
멘델스존은 타고난 음악적 재능이 있었지만 부유한 가정 환경이 있지 않았다면 그가 남긴 멘델스존의 음악은 사뭇 다르지 않았을까요? 클래식 음악가가 대부분 가난에 허덕이며 생계형 음악, 즉 하고 싶은 음악보다 돈이 되는 음악 활동을 중심으로 했던 것을 생각하면 멘델스존은 그야말로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멘델스존의 음악은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나 고뇌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마치 구김살 없는 깨끗하고 맑고 자신감 있는 음악입니다. 그래서 저는 꽃이 피는 봄에 멘델스존의 음악을 들어보시길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는 말그대로 천재, 엄친아, 금수저 등이 어울리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 습니다. 음악적 재능은 탁월했고, 행복한 가정에, 부와 명예를 다 가진 음악가 였습니다. 헤겔, 하이네, 베버, 괴테, 쇼팽, 슈만 등 당대의 유명 인사들과 교류를 하였고, 성공한 작곡가, 지휘자, 뛰어난 피아니스트로서 이름을 떨쳤지요.
그의 누나 파니 멘델스존은 오히려 어릴 때는 동생 펠릭스 멘델스존보다 더 천재성을 인정받아 모차르트에 비견되기 까지 했지만 사회적으로 여성이 음악 가가 되는 길이 닫혀 있었던 시대라, 아쉽게도 음악적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세상을 일찍 떠나고, 소울 메이트와 같았던 누이가 죽자 멘델스존도 얼마 있다가 함께 세상을 떠납니다.
역사에서 IF를 대입하면 다양한 흥미로운 미래를 예측해볼 수 있는데, 만일 여성이 사회활동을 할 수 있던 시대였다면 파니 멘델스존이 이 세상에 수많은 음악적 업적을 남길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고, 또한 성공한 유대인 금융가였던 멘델스존의 집안이 1세기가 미루어져 나치의 시대와 맞물렸다면 지금처럼 우리에게 아름다운 멘델스존의 음악은 남아 있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요.
동전의 양면처럼, 대부분의 다른 음악가들처럼 가난, 어려움 등을 모르고 자란 탓에 그의 음악은 깊은 삶의 성찰이 보이지는 않는다는 평가도 있지만, 그의 음악은 구김살 없고 맑고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그가 17세에 작곡한 대표작 <한여름밤의 꿈> 중 그 유명한 <결혼행진곡>을 감상을 하면서 맑고 아름다운 하루를 만들어보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