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 클래식>
“빨강머리의 사제 비발디(1678-1741)”
<이지 클래식>
“빨강머리의 사제 비발디(1678-1741)”
강 일 송
오늘은 우리에게 쉽게 클래식 음악을 소개해주고, 흥미까지 돋우는 <이지 클래식>의
세 번째 이야기를 이어볼까 합니다.
류인하 작가가 만든 팟캐스트 <이지 클래식>은 한국 아이튠즈 인기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적 있고 월간 <객석>에서 선정한 ‘핫’한 인기 팟캐스트에도 선정된 바 있다고 하였지요.
저자가 이끄는 음악가들의 흥미로운 삶 이야기 세 번째 편으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에 손꼽히는 “사계”의 작곡가, 빨강머리의 사제 비발디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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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직자가 된 빨강머리 바이올린 영재
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1678-1741)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지오반니 바티스타, 어머니 카밀라 칼리키오는 슬하에 4남 5녀를 두었는데,
안토니오는 그중 둘째였습니다. 아버지 지오반니는 이발사였지만 뛰어난 바이올린
실력을 가져서 성 마르코 성당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일하고 있었고, 어머니 카밀라는
재단사의 딸이었습니다.
안토니오는 어릴 때 너무나 허약하여 어린 시절 내내 병치레가 잦았습니다.
그러한 아들에게 아버지는 바이올린 연주를 가르쳤고 타고난 재능이 있어 안토니오는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습니다.
안토니오가 태어난 17세기에는 계급 사회였고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거나 사제 서품을 받아 사제로 살아가는 것이었죠. 평민 집안에서
태어나 성당 음악가로 살았던 아버지는 맏아들을 사제로 키워 집안을 일으키고
싶었을 겁니다. 그런 아버지의 뜻에 따라 10세가 되던 해 성 제미아노 성당의
후원금을 받았고, 5년 뒤 본격적인 성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 음악을 더 사랑한 성직자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 수도원에 기거하여야 했지만 워낙 몸이 약했던 비발디는 집으로
출퇴근하게 배려를 받았고, 덕분에 그는 음악과 멀어지지 않았습니다.
25세에 사제서품을 받은 그는 서품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래 앓아왔던
천식 때문에 미사 집전이 힘들다고 호소했습니다. 이윽고 그는 사제의 의무인 미사
에서 벗어나면서 음악 활동에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비발디는 피에타 병원에서 운영하는 음악원의 교사로 지원을 했고, 이곳은 다른
음악원과는 달리 고아원의 역할까지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음악에 재능이
있는 아이들을 거두어 음악 훈련을 시킨 후 연주회를 열어 그 수익금과 기부금으로
운영하던 기관이었지요.
비발디가 부임한 후 학생들의 실력은 날로 향상되었고, 베네치아를 관광하러 온
사람들에게 베네치아 관광 필수 코스로 자리매김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고,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 최고의 문화예술 오페라에 눈을 돌리다.
비발디가 활동하던 18세기 초의 이탈리아, 특히 베네치아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문화예술은 오페라였습니다. 여러 극장이 서로 경쟁하며 인기를 끌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비발디는 오페라를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작곡한 오페라는 90여편이 넘고, 비발디의 오페라는 각광받았다고 합니다.
이 무렵 비발디는 스캔들에 휩싸였는데, 제자였던 소프라노 안나지로와의 염문설이
퍼졌습니다. 스무 살이 넘게 나이 차이가 났고 사제였기 때문에 염문설이 추기경의
귀에 들어가자 추방령이 내려졌습니다.
결국 비발디가 향한 곳은 빈이었는데, 빈의 황제 카를6세를 만나 후원을 받기 위해
떠났지만 빈에 도착하자마자 황제는 사망하였고, 결국 비발디 인생의 마지막
종착지는 빈의 슈페탈 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 시대의 흐름을 읽은 바로크 음악가
왜 사람들은 바로크 시대를 얘기하면서 음악의 아버지 바흐와 음악의 어머니 헨델
다음으로 비발디를 많이 언급할까요?
무엇보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바흐의 연장선상
에서 언급되다 보니, 자주 회자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중세시대에는 기독교가 중심에 있었고 음악의 중심도 종교, 성당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하지만 고전파로 넘어가면서 종교음악의 수요보다 비종교적 음악의 수요,
즉 세속음악의 수요가 더 많아졌고, 그 중심에 비발디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제였지만 종교음악만 작곡하지 않았고 세속음악을 많이 작곡했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잘 읽어낸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바흐와 헨델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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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클래식 이야기 세 번째로 하이든, 멘델스존에 이어 비발디 이야기를 함께
보았습니다.
비발디의 "사계"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클래식 음악으로 각인되어
있고, 광고 배경음악으로도 많이 쓰이지요.
비발디는 종교음악 위주의 시대에서 비종교음악, 세속음악으로 이행되는 과정의
중심에 서 있는 음악가인데, 아이러니한 점은 종교인인 사제가 세속음악의 선구자
가 된 것입니다.
그는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의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아 뛰어난 연주자가
되었지만,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많은 제약이 있었고, 반면에 이런 허약함
덕분에 사제의 의무에서 벗어나 음악 활동에 전념할 수도 있었습니다.
비발디가 활동하던 시절의 베네치아는 유럽에서 가장 부가 모이던 경제의 중심지
였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곳에서 문화예술은 꽃피기 마련이었지요.
음악원 겸 고아원에서 그는 음악 교사를 하였고, 베네치아 관광 필수 코스가 될
만큼 훌륭한 음악단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예술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오페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그는 이미 유럽
에서 유명한 음악가로 자리매김을 했다 합니다. 하지만 제자와의 염문설로
그는 추기경에게 추방을 당해 빈으로 향하였고, 그는 쓸쓸히 빈에서 삶을
마감하게 되지요.
"사계"를 듣다보면 어쩜 이렇게 4계절을 아름답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고, 그는 진정한 음악 천재로 후손들에게 많은 감동과 행복감을 전달한
예술가로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 음악원 출신의 뛰어난 연주자들이 1952년 창단한
"이 무지( I Musici )" 음악단의 사계가 특히 유명하지요. 저도 개인적으로
이 무지치의 공연을 본 적이 있는데, 연주자들이 대를 이어 계속 바뀌어
내려왔지만 이탈리아 최고 연주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합니다.
유튜브에서 "이 무지치"의 "사계"를 옮겨와 봤습니다.
사계의 멋진 선율과 함께 행복한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https://youtu.be/aBBZU6MEk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