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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Sep 07. 2016

<사평역(沙平驛)에서>

곽재구

사평역(沙平驛)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오늘은 시 한편 올려봅니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곽재구 시인의 대표작입니다.

사평역은 실제 존재하는 역은 아니고 시인의 상상속의 역이랍니다.

새하얀 눈과 보라색 수수꽃의 대비, 청색의 손바닥이 의미하는 세파를

거친 손, 기차의 차창을 단풍잎으로 표현하는 시인의 상상력은

참 대단하다고 생각이 들지요.

시골역 대합실을 색의 대비와 함께, 회화처럼 느껴지게 사람들을 묘사한

표현 등으로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시입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 맘이 참 따뜻하고 풍부해 지는 것을 느끼게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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