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과 서양의 세계관> - 인류라는 거인의 우뇌와 좌뇌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0”中
강 일 송
오늘은 “지대넓얕”이라는 약어로도 유명한 베스트셀러 시리즈 중 다른 책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지난 번에는 진리, 철학, 예술에 관한 주제를 이야기했고, 오늘은 동양과 서양의 세계관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저자인 채사장은 2014년 겨울에 출간한 첫 책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 밀리언셀러에 오르면서 <시민의 교양>, <열한 계단>,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등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보기 드물게 인문학 서적으로 베스트셀러를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철학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일반적으로는 고대 그리스를 그 출발로 본다. 기원전 5세기 무렵에 탄생한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으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합리적 사유 활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서구의 관점일 뿐 인도와 동양에서도 위대한 스승들이 탄생했고 세계와 자아에 대한 철학적 탐구가 깊이 있게 이루어졌다.
다만 서양과 동양의 차이가 있다면 동양의 철학적 사유가 일원론으로 시작된 반면, 서양의 철학적 사유는 이원론으로 시작되어 근대 이후에 이르러서야 일원론을 발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동양과 서양은 각각 나름의 사유 체계를 전개해나갔고, 이를 통해 인류는 정신적 측면과 물질적 측면에서 발전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특히 서양의 이원론적 사유는 세계와 자아를 분리하고 각각을 독립적인 실체로 파악함으로써 물질 세계를 기반으로 하는 빠른 성장의 역사를 가능하게 했다. 그것은 이원론이 인간을 주체로, 자연을 대상으로 분절함으로써 인간이 자연을 개발하고 변형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로마인은 대지를 둘로 구분하였는데, 인간에 의해 경작된 땅인 아게르(ager)와 경작되지 않은 땅인 살투스(saltus)가 그것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문명의 힘을 통해 야만을 교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고관은 근현대까지 이어져 서양의 모범이자 자랑인 산업화를 이루는 데 기여했다. 오늘날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물질적 풍요는 인간과 자연을 엄격히 분리한 이원론적 사고에 빚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서양의 이원론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그것은 고통의 발생이었다. 인류는 야만으로서의 자연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고통을 만들어냈고 이 고통은 다시 인간의 고통으로 전이되었다. 생태계 파괴와 환경 교란으로 인한 기후 변화가 인류의 재난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는 미분리의 통합적 존재인 자아와 세계를 인위적으로 분리하는 행위가 가져온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학문의 영역에서도 문제점이 드러났다. 세계를 독립적 개체로, 탐구의 대상으로 다뤘던 서구 사상은 근대에 이르러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와 모순 앞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서구의 이항 대립이 해결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철학에서는 칸트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통해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의 분리를 극복해내었고, 신과 인간의 완벽한 분절을 전제하던 기독교에서는 독일 신비주의의 등장과 함께 일원론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기존까지 배제되어왔던 관찰자의 존재가 화려하게 복귀했다.
★ 동양의 일원론과 서양의 이원론
동양의 위대한 스승들은 일원론적 세계관을 전개하였다. 베다, 도가, 불교의 사상이 ‘세계와 자아의 통합’으로 수렴한다고 말이다. 그들은 세계와 자아가 그 근원에서 분리되지 않았음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이것이 위대한 스승들이 지혜롭게 말해준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최종 사유였다.
반면 서양은 플라톤 이후 이원론적 세계관을 토대로 발전했다.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이분화가 이루어졌는데, 세계와 세계의 분리, 자아와 자아의 분리, 세계와 자아의 분리. 우선 세계는 완벽한 이데아 세계와 불완전한 현실 세계로 나뉘었다. 다음으로 자아는 영원 불멸의 영혼과 감각적인 나약한 육체로 분리되었다. 마지막으로 세계와 자아는 각각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주체로서의 인간으로 규정되었다.
이 중에서 우리가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자아와 세계의 분리가 갖는 의미다. 서양의 이원론은 이 둘을 각각 독립된 실체로 파악한다. 쉽게 말해 자아와 세계의 존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세계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내가 죽고 나서도 세계는 그대로 있을 것이다. 매우 상식적이다. 그것은 세계가 실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이원론적 관점은 실재론으로 이어진다.
반면에 동양의 일원론은 자아와 세계를 분리하지 않기에 이 둘의 존재를 통합적으로 고려한다. 쉽게 말해서 자아와 세계의 존재는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 받는다. 내가 세계를 본다는 것은 사실 나의 마음을 스스로 보는 것과 같아. 그래서 이러한 일원론적 관점은 관념론으로 이어진다. 만약 관념론자가 세계를 탐구하고자 한다면 그는 자신의 마음부터 탐색해야 한다. 마음의 구조와 형식과 특성을 파악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
★ 인류라는 거인의 우뇌와 좌뇌
우리는 이제 인류의 거대한 두 가지 관점을 알게 되었다. 일원론, 관념론으로 이어지는 동양의 관점과 이원론, 실재론과 이어지는 서양의 관점, 이 두 관점을 인류라는 거인의 우뇌와 좌뇌와 같다.
하지만 비극이 있었다. 균형이 깨어진 것이다. 근현대의 역사가 서양의 승리로 끝나면서 동양의 근현대는 서양을 배우고 모방하는 역사가 되었다. 우리의 역사와 사상은 초라해 보였고, 그래서 우리는 서양인이 되고자 했다. 그들의 철학과 사상, 기술과 문화를 빠르게 흡수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우리는 동양인으로 태어나 훌륭한 서양인이 되었다. 서양의 세계관 위에 당당히 발을 딛고 살아간다.
이원론과 실재론의 명칭은 낯설지만 그 내용은 매우 상식적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만큼 우리는 서양의 세계관에 익숙하다. 반대로 동양의 일원론적 세계관은 너무도 낯설게 느껴진다.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은 이미 우리에게서 잊힌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게 된 위대한 스승들을 다시 불러낸 것도 사실은 서양인이다. 18세기에 이르러 서양 철학은 관념론을 진지하게 탐구했고, 19세기 니체는 이원론의 한계를 냉철하게 지적했으며, 20세기 물리학의 발전은 세계가 우리의 의식과 독립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에 혼란을 느꼈다. 21세기에 들어서며 유럽에서는 서양의 물질 중심적 세계관의 대안으로 인도와 동양의 고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하지만 근대 서양의 세계관을 갖게 된 우리는 이러한 흐름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 현대 물리학, 양자역학 등의 등장
현대에 이르러 인류는 원자가 텅 빈 무엇이라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개별 원자를 이루는 원자핵과 전자를 제외하면 원자의 99.999퍼센트는 텅 빈 공간이다. 텅 빈 원자들이 모여 있는 빨간 사과도 99.999퍼센트는 텅 빈 공간이고, 우리의 신체도 이와 다르지 않다.
현상 너머의 세계는 우리에게 결코 드러나지 않기에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세계지만, 적어도 그곳에는 빛깔도, 소리도, 향기도, 맛도, 촉각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단단한 형태와 구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소량의 물질과 에너지가 요동치는, 거의 비어 있는 세계 라고 생각해야 한다.
20세기에 양자역학의 등장은 기존까지 배제되었던 관찰자를 불러내고 있다. 양자역학의 근간을 이루는 불확정성 원리, 광자의 입자성과 파동성을 구분하기 위해 제시된 이중 슬릿 실험은 관찰자로서의 의식적 존재를 고려하게 하고, 의식이라는 것을 단지 뇌 활동의 부산물 정도가 아니라 세계 자체와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무엇으로 파악하게 한다.
우리는 이제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세계 바깥은 내가 상상하는 세계가 아니다. 단단하고 안정적이며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이 아름다운 눈앞의 세계는 세계의 실체가 아니라 나의 의식 능력이 만들어낸 내 의식 안의 세계다. 그러므로 나의 세계는 내가 눈뜬 것과 동시에 생성되어 내가 눈 감는 동시에 소멸한다. 나와 세계는 분리되지 않는다.
최근에 이루어지고 있는 양자얽힘과 관련된 실험은 사물과 사물, 혹은 사물과 의식이 더 높은 차원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과학의 발전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먼 미래의 후손들은 더 높은 단계에 이르러 이 모든 것을 상식으로 알게 되는 게 아닐까?
우리에게 분리되어 있는 자아와 세계가, 존재와 부재가, 삶과 죽음이, 나와 타자가, 빈 것과 가득 찬 것이,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실체의 다른 면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오늘은 "지대넓얕" 시리즈 중 한 권에서 동양과 서양의 사고의 차이를 일원론과 이원론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서양과 동양을 나누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수없이 많은 차이를 발견 하고 분류할 수 있겠지만 오늘 저자는 사고방식, 철학적 흐름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철학의 흐름을 보면 서양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하였고, 동양도 비슷한 시기에 중국과 인도에서 문명의 시작과 함께 철학적 사고가 생겨났습니다. 동양과 서양은 인종이 다르고 지리적 환경이 다른 상황에 의해 서로 각자의 문화 와 문명, 철학을 발전시켜왔는데, 오늘 저자는 그 큰 흐름의 차이를 서양의 이원론과 동양의 일원론으로 구분지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서양은 몸과 정신, 인간과 자연, 자아와 세계를 구별함으로써 철학과 문화의 체계 를 잡았는데, 이로 인해 과학의 발전과 함께 물질 문명의 번영을 이루게 되었고 이윽고 동양을 제압하며 세계의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이는 동양으로도 전파되어 현대 교육을 받은 동양인들은 자연스럽게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에 젖게 되었지요.
반면 동양은 자아와 세계를 분리하지 않고, 몸과 정신을 하나로 보며, 인간과 자연 환경을 동화되어야 하는 존재로 바라봅니다. 서양은 자연과 환경을 다스리고 개척하며 개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서슴없이 개척하고 파괴하는 일을 해왔고 현대에 이는 자연환경 훼손과 기상 이후 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칸트와 니체 등은 철학적으로 이원론을 비판하고 현대문명의 폐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동양적 사상과 사고를 수용하는 쪽으로 흐름이 이어 지고 있습니다.
또한 과학, 특히 물리학 등이 발전하면서 과거 뉴튼의 고전 물리학이 진실이자 정설로만 알려져있었지만 현대 물리학이 발달하면서 양자역학이 등장하였고 양자역학을 대입시켜야만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과학적 현상이 설명이 됨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양자역학은 전 세계 누구도 정확하게 이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할 정도로 굉장히 설명이 어렵고 이해가 안 되는 학문의 분야입니다. 양자역학을 오랜 기간 공부했다고 하는 양자역학 전문가인 경희대 물리학과의 김상욱 교수 자신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받아들인다고 할 정도이니 말입니다.
현대 물리학에 의하면 모든 사물을 이루는 원자는 사실 99.999%가 비어 있는 공간이라고 하지요. 너무나 작은 원자핵과 전자를 제외하면 실체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공간 자체이고, 이런 원자가 모여서 단단한 돌이 되기도 하고 철이 되기도 하고 물과 공기가 되기도 하니, 불교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너무나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