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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Apr 09. 2020

<세상에서 가장 짧은 교양수업> - 역사 편

<세상에서 가장 짧은 교양수업> - 역사 편
“1일 1페이지, 365일 교양수업”

                                                      강 일 송

오늘은 역사의 탄생으로부터 문화의 흐름까지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고 이를 1일
1페이지씩 정리해서 교양을 전해주는 책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저자는 데이비드 S. 키더와 노아 D. 오펜하임의 공동 저자인데, 데이비드 키더는
다양한 기업을 설립한 CEO이고 대학과 기업에서 활발한 강연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펜하임은 하버드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후 FOX, MTV 등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고 저술가 및 각본가로 활동중이라 합니다.

오늘은 그 파트들 중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해볼까 합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그리고 책의 머리에 “교양이란 ‘세상에서 이야기되고 사색되어 온 가장 훌륭한 것’
을 아는 것이다.” - 매튜 아놀드, 란 멋진 말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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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제타석(Rosetta stone)

1799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인들이 이집트 도시 알렉산드리아 인근 모래 속에서
신비한 검은색 돌을 발견했다. 돌에는 세 가지 고대 언어로 글이 새겨져 있었다.
하나는 그리스어로 쓰여 있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 돌의 연대를 이집트가 알렉산더대왕이 건설한 그리스 제국의
속주였던 기원전 196년경으로 추정했다. 다른 두 언어는 고대 이집트 문자인 상형
문자의 두 가지 형태였다.

로제타석이 발견되기 전까지 수세기 동안 역사가와 고고학자들은 이집트 서기가 남긴
방대한 양의 문자 기록을 읽을 수 없었다. 매우 학식이 뛰어난 현대 학자들조차 해독
할 수 없는 복잡한 문자로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로제타석의 발견으로 고대 이집트의 비밀이 풀리기 시작했다. 당시 이집트는 그리스의
속주였는데, 로제타석은 그리스 왕이 이집트 백성들에게 발표한 칙령을 기록한 것이었다.
프랑스 학자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은 로제타석에 새겨진 그리스어 문자와 상형문자를
병렬해서 수년간 연구한 끝에 복잡한 고대 이집트 문자체계를 해독했다.

로제타석은 그 자체로도 중요한 학문적 성과였다. 샹폴리옹은 수십 개 언어에 능통한
천재 언어학자였다. 영국 학자 토머스 영도 로제타석을 해독하는 작업을 도왔다.
로제타석은 1801년 영국군이 몰수해 갔고 현재 런던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샤를마뉴 대제

서기 476년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유럽은 전쟁과 무질서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런 까닭에 후대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암흑시대라 이름 지었다.
쇠퇴하는 로마 제국의 유산을 두고 경쟁 부족들끼리 끊임없이 싸웠고 예술과 과학은
답보상태에 빠졌다. 로마제국이 제공하던 통일성이 사라졌기에 유럽 대륙을 하나로
단결시킬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샤를마뉴(742-814년)는 오늘날의 독일에 세워진 왕국의 왕으로 서로마제국에 속했던
여러 지역을 처음으로 재통일하고 거대한 유럽 제국을 건설했다. 서기 800년 경
성탄절에 로마 교황은 샤를마뉴에게 신성 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씌웠다. 즉 새로
부활한 기독교 왕국의 지도자로 임명한 것이다.
대관식이 거행되던 당시 샤를마뉴의 제국은 오늘날의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그리고 독일 대부분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샤를마뉴는 여러 이웃 부족을 합병한
게르만족인 프랑크족 왕이었다.

신성 로마제국은 서기 800년에 설립이 선포되었지만 실제로 유럽은 단합시키지는 못
했다. 18세기 작가 볼테르가 농담했듯이 신성 로마제국은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었으며 ‘제국’은 더더욱 아니었다. 신성 로마제국은 절반의 독립적 지위를 갖는
300여 개 공국으로 구성되었지만, 수세기 동안 중앙 유럽의 중심 세력으로 작용했다.
샤를마뉴는 기독교를 확산시켰고,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이슬람 칼리프가 다스리는
스페인 지역을 되찾기 위해 싸웠다.

샤를마뉴가 남긴 유산은 지금도 유럽의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최근 유전학 연구에
따르면 유럽인 가운데 상당수가 샤를마뉴의 후손임이 밝혀졌다. 샤를마뉴는 프랑스와
독일의 건국 시조 중 하나로 여겨진다. 그가 세운 신성 로마제국은 규모가 축소되어
유지되다가 1806년 마지막 황제가 퇴위하면서 해체되었다.

★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영국의 존 왕은 1214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치른 전쟁에서 패배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존 왕은 해외 원정을 지지하지 않았던 귀족들에게 무거운 과세를
부담시켜 왕실 재무를 보충하려고 했다. 이에 귀족들이 반란해 1215년 여름, 런던을
함락했다.

런던이 함락되자 존 왕은 템즈강 유역 러니미드 평원에서 귀족들과 합의해 사태를
일단락 지었다. 합의 내용은 기본 자유 보장과 왕의 절대 권력에 대한 일련의 제한이
골자였다. 그 내용은 ‘마그나 카르타’ 헌장에 요약했다.
1215년 6월 19일 마그나 카르타에 왕실의 인장이 찍혔고, 전국에 내용을 선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마그나 카르타는 존 왕뿐 아니라 후대 왕 모두에게 영원히 적용
되는 것이었다.

마그나 카르타 초안은 귀족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종 안은 자유민
누구에게 적용되도록 수정되었다. 당시 자유시민은 전체 인구 중 소수에 불과했지만
수세기가 흐르면서 모든 시민을 포함하는 용어가 되었다.
영국에서 마그나 카르타는 자유와 법치주의의 기반이 되었고 헌법군주제의 씨앗이
되었다. 그러나 마그나 카르타는 선포된 후로 수백 년 동안 대부분 무시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2세는 마그나 카르타가 선포된 그해 9월에 바로 무효라고 선언
했다. 1217년 다시 반포되었지만 법적 효력은 없었다.

마그나 카르타의 중요성은 17세기 영국 의회 지도자였던 에드워드 코크 경에 의해
재조명되었다. 그는 스튜어트 왕가에 대항할 때 마그나 카르타의 원리를 거듭 인용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후 미국 식민지 주민들이 독립 투쟁을 벌이도록 영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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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세상에서 이야기되고 사색되어온 것 중 가장 훌륭한 것인 "교양"에 대한
책을 보았고 그중 역사 이야기를 살펴 보았습니다.
역사편에서는 3가지 키워드를 먼저 선택하였는데, "로제타석", "샤를마뉴",
"마그나 카르타"였습니다.  

인류의 가장 앞선 문명 중 하나였던 이집트 문명은 그들의 문명을 자기들만의
상형 문자로 기록을 해두었는데, 천 년 이상을 해독하지 못하였고 이것을 해결
한 것이 로제타석입니다.   로제타석은 이처럼 오래동안 열리지 않았던 보물함의
열쇠와도 같은 역할을 하였는데 이로 인해 고대 선조들의 뛰어난 문화를 해석
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런 귀한 보물이 자기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영 박물관"에 있다는
것이 아쉽긴 합니다.  "대영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등을 가보면 엄청난 양의 전 세계의 보물들이 가득차 있음을 보고 놀라게
되지요.  이집트나 그리스, 로마의 유물, 동양의 유물, 아프리카의 유물 등이
즐비합니다.  로제타석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가 발견하였고 영국이 세계를
지배할 제국시대에 런던으로 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유럽의 가장 뛰어난 황제 중 하나였던 "샤를마뉴" 대제에 관한 이야기
였습니다.  서로마가 멸망한 후 강력한 권력의 공백은 엄청난 혼란을 가져와
과거 야만인이라고 불렸던 부족들에 의해서 굴욕을 당하게 되지요.
이후 샤를 마뉴 대제는 구세주처럼 나타나 유럽의 중심을 잡게 되고 교황에게서
황제의 관을 받게 됩니다.
얼마나 그의 영향이 크게 남아있는지, 프랑스에서는 "샤를 마뉴", 독일에서는
"카를 대제",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는 "카를로 대제"라고 부르고, 영국에서는
"찰스 대제"라고 합니다.  요즘은 일반적인 라틴어 표기인 "카롤루스 대제"라고
부르는 것이 선호되고 있다고 합니다.
유전자 검사에서 유럽의 많은 이들이 샤를마뉴의 혈통임이 밝혀진 것을 보면
"서유럽의 아버지"라 불리는 것이 한편으로는 지당해 보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은 "마그나 카르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마그나 카르타는 라틴어인데 영어로 옮기면 "Great Charter" 즉 대헌장이 되겠
습니다.   당시에는 중요한 문서는 라틴어로 썼기 때문에 이름이 정해진 것이고
왕의 권력에 대한 간섭이 처음으로 이루어진 문서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사문화 되어 있던 문서였지만 후에 자유와 법치주의의 기반이 된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미국의 식민지주들이 독립 투쟁을 할 때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으니
미국의 독립과 발전에도 기여한 바가 큽니다.

다음에는 다른 이야기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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