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무너뜨리지 않는 한 집은 누군가의 삶을 담으며 존재한다
시작하기 전에
여기서 소개하는 책들은 모두 올해에 읽었던 책들로만 정했고, 목차도 그것을 기준으로 작성했다. 그렇게 정한 이유는 딱히 없다. 작년에는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소설책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전문적인 서적만 읽어도 벅찰 때였기 때문이다. 졸업을 하니 소설책에 손이 가기 시작했다.
올해 처음 읽었던 소설책은 어린왕자이며, 그다음으로 읽었던 책이 조예은 작가의 적산가옥의 유령이다. 어린 왕자는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이며, 다회독을 했었기 때문에, 올해 처음 읽은 소설은 어찌 보면 이 책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도입부에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한 이유는 전문 서적들 이후 마주한 소설의 이질성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그 설명이 오늘의 주요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대학원을 졸업하고 소설을 읽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소설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라기보다는 그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매일 똑같은 일상에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리고 소설을 통해 가벼운 사유를 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읽었던 전문서적들은 대부분 차가운 영역에 속했다. 이야기보다는 정보를, 감성보다는 이성을, 사유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알려줬을지 몰라도 사유할 거리를 던져주기에 너무나 무거운 주제들이 많았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책의 모든 분야를 통틀어 내게 좋은 귀감이 되었던 책들은 과거에 읽었던 소설이었다. 대표적으로 어린 왕자와 연을 쫓는 아이가 있다.
적산가옥의 유령을 선택한 이유
그렇다면 많고 많은 책들 중 왜 이 책이었냐 묻는다면 그저 우연이었다. 여러분이 책을 고르는 기준을 잘 모르지만, 나는 보통 책에서 추천해 주는 책을 사서 읽는 편이다. 특히 한병철의 저서들과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나오는 책들을 많이 샀다. 특히 다음 주에 소개할 요코의 은밀한 결정은 신형철의 산문에서 소개한 책이다. 다시 넘어와서 적산가옥의 유령을 선택한 이유는 부끄럽지만 그저 책등이 예뻐서, 또한 책 사이즈가 아담 해서였다. 조예은 작가가 누군지는 아예 모르는 상태였다.
조예은 작가
1993년에 태어났으며 주로 스릴러나 호러물 등의 장르소설을 쓴다. 많은 단편집을 냈으며 가장 유명한 작품은 칵테일, 러브, 좀비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2025년 올해 젊은 작가상을 수상했다.
본론
앞선 설명이 길었다. 책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데, 항상 이러한 독서 리뷰를 쓸 때면 줄거리를 짧게 설명할지, 혹은 길게 설명할지 고민이 된다. 사실 내가 느끼기에 이 책의 강점은 스토리에 있다. 그렇다고 스토리를 길게 설명하기에 스포일러를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든다.
외증조모는 50년 넘게 한 적산가옥에서 살아왔다. 적산가옥(敵産家屋)이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이 지은 일본식 주택을 뜻한다. 그 집은 본래 1930년대 무역업으로 재산을 모은 일본인 가네모토가 지은 저택이었다.
이 집에는 오래전부터 불길한 별채가 있었다. 본채 옆에 붙은 2층짜리 노출 콘크리트 건물로, 전통적인 일본식 가옥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외증조모는 어린 시절부터 주인공에게 이 별채에 얽힌 괴담들을 들려주곤 했다.
세월이 흘러, 거동조차 불편하던 외증조모는 바로 그 별채에서 생을 마감한다. CCTV에 찍힌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기이했다. 걷지도 못하는 몸이 허공에 뜬 듯 별채로 향했고, 닫힌 문이 스스로 열리더니, 그녀는 바닥에 귀를 바짝 붙인 자세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후 이야기는 외증조모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가 어떻게 이 적산가옥에 살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집과 별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외증조모의 죽음 이후, 주인공은 그 적산가옥에 들어가 살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외증조모가 얘기했던 집 안의 유령을 마주하게 된다. 더불어 주인공은 점차 과거 외증조모의 기억을 공유하게 된다. 스토리는 외증조모의 과거와 주인공의 현재가 교차하며 전개된다.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체험이 서로를 비추고, 별채에 얽힌 진실과 집을 떠도는 유령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나오는 유령은 외증조모가 간병했던 가네모토의 아들이다. 자, 여기서 왜 외증조모는 가네모토의 아들을 간병하게 되었는지, 왜 그 아들은 유령이 되어 현재의 주인공 앞에 나타났는지, 외증조모는 왜 별채의 바닥에 귀를 대고 죽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하지 않겠다. 너무나 강력한 스포일러이기도 하지만, 여기는 스토리를 적는 장소도 아니기에.
아주 개인적인 소감
전문서적을 읽다가 소설로 넘어온 직후라서 그런지, 너무 재미있게 술술 읽혔다. 지금도 이 책을 읽은 장소가 기억난다. 늦은 저녁, 계명대 입구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시간이 한 시간쯤 걸렸다. 마침 이 책을 가지고 있었고, 책장을 펼친 순간 나는 책 속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결국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쳤고, 내린 뒤에도 정류장에 잠시 서서 조금 더 읽다가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마치 잠에 빠진 듯, 현실을 잊고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은 적산가옥을 무대로 1층부터 3층 다락방, 그리고 별채에 이르는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읽는 동안 나는 정말 그 공간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기묘한 경험을 했다. 책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작가에 대한 경외감이 크게 일었다. 작품 속에서는 꿈을 꾸듯 현실 감각이 사라져, 작가를 의식할 틈조차 없었던 것이다.
비유하자면, 나는 조예은 작가가 글을 쓰며 상상한 그 공간을 독자로서 똑같이 따라가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 세세한 묘사와 몰입감 있는 문체가 돋보였다. 문장은 대부분 짧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미사여구 대신 짧고 굵은 문장들이 이야기를 쉽게 이해하게 했고, 그 덕분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생각할 거리
이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생각해 보자.
그녀의 스토리텔링은 몰입력이 탁월하다. 독자를 끝까지 견인하는 힘이 있다. 그러나 바로 그 힘 때문에, 독자로서 내가 능동적으로 사유하기보다는 이야기에 휩쓸려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생각할 틈이 부족했고, 소비하듯 읽다가 끝나버린 듯한 아쉬움이 남았다.
이 책을 비유하자면, 마치 귀신의 집 같다. 좁고 정해진 길이 주어지고,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가며 놀라고, 긴장하고, 결국 출구에 도달한다. 문학적으로 그런 분위기를 구현하는 것은 놀랍지만, 막상 출구에 다다랐을 때의 허무함은 지울 수 없었다. 이미지를 만드는 능력은 대단하지만, 나는 샛길이 있어 여러 해석을 허용하는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듯하다. 나는 반추할 수 있는 책을 원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처럼 곱씹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분량이 많지도 않아서 빨리 읽을 수 있을뿐더러 시대적인 이야기도 많아서 유익하기도 했다.
여담 1
책을 다 읽고 나서 조예은 작가에 대해 더 찾아보다가, 그녀가 군산 출신이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군산은 일제강점기 당시 전라도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던 거점이었다. 단순한 무역의 장소라기보다는, 식민지 수탈의 현장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그녀가 어릴 때부터 적산가옥을 접했고, 그녀가 그 영향을 받아 작품을 써 내려간 게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실제로 가보기도 했다.
여담 2
적산가옥의 유령을 읽으면서 문득 영화 하녀(1960)가 떠올랐다. 김기영 감독의 작품이다. 적산가옥의 유령에서는 적산가옥 내부 공간에 대한 묘사가 유독 많았다. 작가가 제시하는 시퀀스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 공간을 상상하게 되고, 그만큼 몰입도도 깊어진다. 반면에 영화 하녀는 양옥집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일어나는 살해, 범죄, 불륜 등과 같은 강렬한 이야기를 담는다. 하녀는 우리나라 영화사에서 매우 오래된 작품이지만, 여전히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영화 속 무대인 양옥집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권력과 욕망이 투영되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적산가옥과 양옥집은 다르지만, 각각의 시대 상황 속에서 국내에 들어온 주거 공간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당시 사회의 단면을 드러낸다.
영화, 사진, 문학작품 같은 예술 형식 속에 반영된 시대 상황을 짐작하고 해석하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특히 하녀는 다양한 시선으로 분석되어 왔다. 카메라 기법, 자본주의, 양옥집이라는 공간성, 시대적 배경, 등장인물의 심리 등 수많은 해석의 틀이 가능하다. 글을 쓰다 보니,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하녀(1960)와 적산가옥의 유령을 여러 시선으로 함께 분석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충분히 매력적인 시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