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말 속 깊이 숨어있는 이야기지.
이 책을 사게 된 계기는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소개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책을 뒤적여 보아도 정확히 어느 부분에서 언급되었는지 찾을 수 없다. 혹시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분명 거기에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을 되짚을 수 없다. 이 순간부터 이미 소설의 주제와 맞닿는다. 기억의 흔적이 흐려지고, 존재의 근거마저 불확실해지는 경험 말이다.
『은밀한 결정』은 오가와 요코가 1994년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줄거리는 간명하지만 섬뜩하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사물의 존재와 그것과 관련된 기억이 갑작스레 사라지는 섬이 있다. 이곳의 주민들은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소멸’에 따라 특정 사물과 그와 얽힌 기억을 잃는다.
예를 들어 “모자”라는 개념이 사라지는 날이면 사람들은 모자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고, 실제로 존재하는 모자를 불태우거나 강물에 흘려보낸다. 향수, 리본, 장미, 철새, 그리고 소설마저도 이와 같은 운명을 맞는다. 주인공은 소설가인데, ‘소설’이 소멸하자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주민들은 마음속의 무언가를 하나씩 잃어가며 점점 텅 비어 간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 소멸이 주민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자가 사라지면 모자 장수는 담담히 다른 직업을 찾고, 소설이 사라져도 주인공은 큰 저항 없이 직업을 바꾼다. 기억이 사라짐에도 불구하고 일상은 계속된다. 오히려 소멸은 ‘일상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기억이 삶에 어떤 가치를 주는지에 대해 주민들은 크게 자각하지 못한다. 단, 모든 이가 기억을 잃는 것은 아니다. 일부는 기억을 끝내 잊지 못하고 간직하는데, 이들은 곧바로 비밀경찰에게 붙잡혀 어디론가 사라진다. 왜 그들이 기억을 제거해야 하는지에 대한 합리적 이유는 제시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사회가 기억을 유지하는 자를 위험 요소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소멸은 사물 자체뿐만 아니라, 시간마저 소멸시킨다. 달력이 없어진 이 섬에서 더 이상 봄은 오지 않는다. 이후 신체와 목소리 마저 사라지는 상황 속에서 섬의 주민들은 저항하지 못하고 그 운명을 받아들이며 소설은 끝이 난다.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기억은 과연 우리 삶에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기억을 자연스럽게 소멸시켜도 일상이 유지될 수 있다면, 기억은 그저 덧없는 장식일 뿐일까? 아니면 기억이야말로 존재와 정체성의 토대이기에, 사라진 순간 우리는 본질적으로 무너지는 것일까?
여기서 여러 논의가 파생된다.
첫째, 기억은 언제나 권력과 관계 맺는다. 어떤 것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게 할지를 결정하는 행위는 곧 권력이 사회를 통제하는 방식이다. 소설 속 비밀경찰은 특정 기억을 지워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 하고, 이는 오웰의 『1984』에서처럼 권력이 집단의 의식을 조작하는 메커니즘과 닮아 있다. 더불어 그의 소설인 동물농장과도 닮아있다. 기억에 대한 통제와 그에 저항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이다.
둘째, 기억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 작동한다. 우리는 나의 고유한 기억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집단적 기억 속에서 정체성이 부여되고, 사회가 기억해 주는 방식에 따라 ‘나’라는 존재가 특정된다. 그러므로 기억이 사라지는 순간, 단순히 어떤 물건이나 사건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 자체가 흔들린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기억을 잃는 존재가 '나'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체가 기억을 잃는다. 그러므로 기억이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정의가 흐릿해지고, 오히려 기억을 잃지 않는 사람이 비정상의 범주에 든 것처럼 설명된다.
소설은 결국 기억을 지켜내려는 이들과 소멸을 순응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의 긴장 속에서, 기억의 윤리적 의미를 묻는다.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않을 때 존재의 가치가 옅어진다고 주장한 이들이 있듯, 기억은 존재 증명의 핵심일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기억력이 썩 좋은 편이 아니다. 누군가와의 대화, 여행의 풍경, 시간 속의 많은 조각들이 잘 남아 있지 않거나 부분적으로만 각색되어 떠오른다. 그럼에도 석사 논문을 ‘기억과 정체성’이라는 주제로 썼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억이 취약한 나 자신이야말로 기억의 정치학과 윤리학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은밀한 결정』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다. 그것은 기억을 잃어버리는 세계를 그리지만, 동시에 우리가 왜 기억을 지켜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기억의 소멸을 자연스럽게 대하며, 기억에 대해 회의적인 주인공에게 R은 이렇게 말한다.
"의미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말 속 깊이 숨어있는 이야기지."
사물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단순히 쓰임에 있지 않다. 그 안에는 고유한 이야기와 체험, 개인과 사회가 부여한 서사가 내재되어 있다. 한병철은 『사물의 소멸』과 『리추얼의 종말』에서 사물이 가지는 의미를 제의적 특성에서 찾는다. 사물이 의례의 일부로 기능할 때, 그것은 단순한 물질을 넘어 기억과 공동체를 잇는 매개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사물을 기억하려 하지 않고, 신체와 목소리를 의식적으로 체화하지 않는 순간 그것들은 점차 휘발되어 버린다.
이 점에서 내게 있어『은밀한 결정』이라는 제목은 이중적으로 읽힌다.
하나는, 소멸이 외부의 강압적 권력(비밀경찰)에 의해 내려진 보이지 않는 ‘결정’ 임을 암시한다.
다른 하나는, 소멸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저항하지 않는 주민들의 태도 속에 이미 내면화된, 무의식적인 ‘결정’이 숨어 있음을 드러낸다.
앞서 설명했던 책들에 비해서는 덜 추천하는 바이지만, 기억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추천한다. 해결되지 않은 찝찝한 부분이 많은 부분은 아쉽지만.. 저자인 오가와 요코의 다른 책들마저 궁금해지게 만든 책임에는 확실하다. 기억과 관련하여 다음의 책들을 추천하며 이르게 리뷰를 마친다.
알라이다 아스만의『기억의 공간』
최호근의『기념의 미래』
태지호의『기억문화연구』
팀 에덴서의『대중문화와 일상, 그리고 민족 정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