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내 존재가 그 소망으로 가득 찼을 때

by Peeping

과거에 2번 정도 읽었다. 그럼에도 이 책을 다시 펼친 데는 마음의 어떤 동요가 있었기 때문일까.


대부분은 『데미안』을 읽어봤을 것이라 생각한다. 워낙 청소년 필독서이기도 하며, 외국 문학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편에 속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도 이 책을 세 번 정도 읽었기에 내가 쓰는 독서리뷰가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읽지는 않았고 관심은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리뷰를 작성한다.


시작하기 전에 소설의 역할에 대해서 조금 얘기해보고자 한다.

인간 존재의 질문을 탐구하는 중요한 수단이면서, 우리가 스스로 보지 못한 삶의 측면을 보여주는 도구이면서, 인간의 무수한 경험을 잡아내어 우리를 더 인간답게 만들어준다는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모두 정답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책을 접하느냐에 따라서 개인이 느끼는 소설의 본질적인 역할도 다르게 정의될 것이다. 『데미안』은 인간 존재의 질문에 대한 탐구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탐색과 자기 단련을 하기 위해서는 이것만큼 좋은 소설이 없지 않을까...


『데미안』의 줄거리를 설명하기 전에 혹여라도 짧은 줄거리, 짧은 시간 내로 보고 싶으신 분들은 너진똑 유튜버의 『데미안 리뷰』를 참고하도록 하자.

https://www.youtube.com/watch?v=YPSViQ3AZgc


『데미안』은 특히 스포일러가 의미가 없는 책이라고 생각하기에 조금 길게 적어보겠다.


줄거리

소설 『데미안』의 주인공은 데미안이 아닌 싱클레어이다.


싱클레어는 중산층 가정에서 가정의 보호를 충분히 받으며 성장한 소년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자신이 속한 '밝은 세계'와 그 바깥의 유혹과 어두움이 있는 '어두운 세계' 사이에서 마음속 깊은 이중성을 느끼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싱클레어는 크로머라는 또래 아이에게 사과 도둑질을 했다는 거짓말을 하게 되고 이는 곧 크로머의 협박으로 이어진다. 싱클레어는 돈을 갚기 위해 도둑질을 저지르는 등 어두운 세계의 굴레에 빠져 고통과 두려움을 겪게 된다.


크로머의 협박에서 그를 도와준 인물이 데미안이다. 그는 싱클레어가 다니는 학교에 전학 온 소년으로, 전통적인 성경의 해석을 뒤집는 독특한 시각을 가졌으며, 그는 싱클레어의 세계관을 뒤흔들게 된다. 데미안은 크로머의 괴롭힘으로부터 싱클레어를 구해줌과 동시에 싱클레어의 감정을 자극하게 된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전학을 가게 되어 데미안과 떨어지고, 그는 기숙학교에서 또다시 불안과 외로움 속에서 방황하게 된다. 무기력과 반항의 감정이 교차하며, 벡과 같은 또래로부터 술과 방황 같은 성인의 어두운 경험을 맛보게 되고, 정신적으로 더욱 혼란해진다.


이때 그는 우연히 어떤 이상적인 여성에게 마음이 끌린다. 이 인물은 실제 인물이 아닌 그림 속 인물이었지만, 그의 정신세계에서는 성스러운 존재로 떠오르고, 그림을 그리는 창작 행위를 통해 내면의 감정과 욕망을 구체화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자신의 집 문 위에 새겨진 “매의 문장”을 모티프로 삼아, ‘알을 깨고 나오는 새’를 그린 그림을 데미안에게 우편으로 보낸다.


며칠 후, 싱클레어는 자신의 책장에서 하나의 메모를 발견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탄생하려는 자는 먼저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어찌 보면 『데미안』에서 가장 중요한 이 문장을 통해 싱클레어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을 넘어서는 새로운 단일한 신적인 존재에 눈을 뜨게 된다.


여기가 보통 알려진 『데미안』의 줄거리라면, 내게 있어 더욱 중요한 부분은 다음에 나온다. 그것은 피스토리우스와의 만남이다. 정말 개인적인 생각으로 싱클레어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데미안이자, 피스토리우스라고 생각한다.


싱클레어는 어느 날 밤, 교회 밖에서 들려오는 오르간 음악 소리에 이끌려 매일 그곳으로 가게 된다. 음악에 깊이 매료되어 용기를 내 교회 내부로 들어간 뒤, 오르간 연주자인 피스토리우스를 만나게 된다. 처음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를 거부하지만 그가 아브락사스를 알고 있다는 점에 흥미를 느껴 만남을 지속한다.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에게 명상법을 가르치고, 꿈을 해석해 주며 내면의 세계를 탐구하도록 돕는다. 그는 “인간의 무의식에는 모든 가능성과 잠재력이 담겨 있다”라고 설명하며, 선과 악을 동시에 포용하는 신 아브락사스의 의미를 강조한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 싱클레어는 자기 안의 모순과 잠재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된다.


피스토리우스와 싱클레어의 만남 이후, 그와 함께 불 앞에 엎드린 후 그를 이해하고 성찰하는 과정이 내게는 압권이었다. 조금 긴 내용이지만 적어보겠다.


누구나 자신만의 본분을 타고 태어난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선택하거나, 수정하거나, 마음대로 관장할 수는 없다는 깨달음이다. 새로운 신들을 원하는 것도 틀렸고, 이 세계에 뭔가를 선사하겠다는 바람도 얼토당토않다! 각성한 인간에게는 단지 하나의, 유일한 의무가 있을 뿐이다. 자신을 찾기, 자신 안에서 확고해지기, 어디로 향할지는 알 수 없더라도, 오직 자신의 길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가기. 이 깨달음은 나를 깊이 흔들었다.
...
모든 이에게 부여된 진정한 소명은 오직 한 가지, 자신에게의 도달이었다.
...
나는 자연이 던져놓은 존재였다. 어쩌면 새로운 것으로 탄생할 수도 있고, 어쩌면 무로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불확실함 속으로 내던져진 존재. 그 던져짐이 끝까지 구현되게 하고 그 의지를 내 안에서 느끼며 마침내 나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기. 그것만은 내가 할 일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데미안』 _ p.169-70


KakaoTalk_20250901_233053547_02.jpg


실존주의 철학이 떠오르는 문장이다. 옛날에는 데미안이 언제 나와서 어떤 멋있는 말을 할까 기대하며 책을 읽었다면, 이번에 다시 읽을 때는 싱클레어의 자조적인 성찰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예전에는 그의 성찰이 너무 비슷하고 길게만 느껴졌지만, 이제는 하나의 방향성을 가지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모습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마치 어린 왕자처럼 나이가 들어 다시 읽었을 때 전혀 다른 책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혹은 싱클레어의 성찰이 내게 직접 건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싱클레어의 이러한 자조적인 생각은 곧 헤르만 헤세 자신의 자조적 물음이자, 그 나름의 답변이 아닐까 한다.


헤세의 삶에도 싱클레어와 같은 깊은 방황과 심리적 위기가 있었다. 그는 청소년 시절 루터교 신학교인 마울브론 수련원을 도망쳤고, 심각한 우울감과 자살 충동에 휘말려 실제로 자살을 시도하고 정신병원에 수용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심리적 안정을 찾기 위해 칼 융의 제자인 랑 박사를 찾아가 심리분석을 받으며 정신적 위기를 극복했다. 이러한 경험들은 『데미안』 속에서 내면의 혼돈과 치유라는 주제로 반영되었으며, 작품 속 데미안이라는 인물이 주는 도움은 결국 헤세 자신의 치유 과정을 문학적으로 투사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데미안이 없어도 싱클레어는 자조적인 성찰에 의해 결국 스스로 자아 각성의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꼬마 싱클레어 잘 들어! 나는 곧 떠나야 해. 넌 아마도 언젠가 나를 다시 한번 필요로 하게 될 거야. 크로머든 뭐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말이지. 그때 네가 나를 부르면, 난 이제 더 이상 말을 타거나 기차를 타고 막 달려오진 않을 거야. 그때 넌 너 자신 안으로 귀를 기울여야 해. 그러면 네 안에서 나를 발견하게 될 거다. 알겠지?


데미안이 마지막으로 전한 말이다. 어린왕자가 자신의 행성으로 떠나는 모습이 떠오르는 말이다. 이 문장은 특히 헤세가 데미안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전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청소년 필독서인 이유가 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은 각자 필연적이다. 왜인지, 싱클레어의 깊은 고뇌는 정말 사소한 문제에서 발화되었다. 단지 거짓말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신을 악이라고 여겼다. 책을 읽으며 비약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지만 나도 그런 경험이 많음을 안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 우리가 행하는 행위 등은 선과 악을 분리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모순』,『침묵』과의 공통점

최근에 리뷰했던『모순』과 『침묵』처럼, 이 작품 역시 “자신 안의 목소리를 잘 들어라”는 메시지로 읽을 수 있겠다. 『모순』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선택하는 용기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침묵』이 꺾이지 않는 신념과 믿음의 의미를 강조한다면, 『데미안』은 자기 탐색과 자기 단련의 과정을 통해 성장의 길을 제시한다.


세 작품은 모두 다른 배경과 주제를 다루지만, 결국 공통적으로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응시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모순과 고통을 넘어서는 단단한 자기 자신으로 서게 되는 것이다.


KakaoTalk_20250901_233053547_01.jpg 내 존재가 그 소망으로 가득 찼을 때


ps. 참. 다음 연재는 박연준 작가의 『모월모일』이었다.

하지만 순서를 조금 바꾸고자 한다. 닳아버릴 때까지 읽고 싶은 책이 있는가 하면 정말 아껴가면서 읽고 싶은 책이 있다. 목정원의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는 후자에 속한다. 아쉽게도 이 책을 다 읽었다. 그리고 이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얼른 리뷰를 적고 싶어졌다.

KakaoTalk_20250901_233053547_03.jpg


keyword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