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덮고 나가라
원래 사강의 책들을 리뷰하려고 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마음의 심연, 한 달 후 일 년 후, 엎드리는 개 등 올해만 해도 즐겁게 읽은 책들이 많다.
해독일기까지 합하여 리뷰를 진행하고파 일주일을 미뤘는 데 전부 읽지 못했다.
그래서 이전에 읽었던 윌리엄 해즐릿의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를 가볍게 리뷰할까 한다.
책을 접하게 된 계기
천재의 힘을 알고 싶다면 셰익스피어를 읽으면 된다.
학식의 하찮음을 알려면 셰익스피어 주석가들을 연구하면 된다.
이 촌철살인의 문구를 우연히 접한 것이 시작이었다. 학문이 때로는 타인의 언어를 빌려 사고하는 습관만 강화하고, 결국 사유의 근육을 약화시킨다는 지적은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그 문구를 쓴 사람이 궁금했고, 그렇게 윌리엄 해즐릿의 책을 집어 들었다. 이 책은 상냥하지 않다. 대신 사회와 인간을 정확히 진단한다.
그의 생애
1778년 켄트 주 메이드스톤에서 급진적 유니테리언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해즐릿은, 젊은 날엔 화가가 되고 싶어 초상화에 매달렸지만 결국 문장으로 세계를 해부하는 길을 택했다. 그는 〈모닝 크로니클〉의 의회 출입 기자이자 연극·미술·문학 비평가로 활동했고, 《셰익스피어 극의 등장인물론》(1817), 《영국의 시인들에 관하여》(1818), 《정치 에세이》(1819), 《테이블 톡》(1821–22), 《시대정신》(1825), 《더 플레인 스피커》(1826) 등으로 영어권 비평과 저널리즘의 원형을 만들었다.
그의 급진적 공화주의와 언어의 칼날은 토리 진영의 공격을 불렀다. 특히 Blackwood’s Magazine과 Quarterly Review의 인신공격성 논평은 악명 높았고, 해즐릿은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해 합의로 종결했지만 상처와 타격은 남았다. 이 “코니 학파” 몰이는 그의 생전 명성을 잠식했으나, 사후 100주년(1930)에 버지니아 울프가 장문의 평문으로 해즐릿을 재조명하면서 복권의 결정적 전환점이 마련됐다. 울프는 이 글을 위해 9개월간 해즐릿을 전면 재독했다고 적는다.
책의 내용
이번 선집은 울프의 「해즐릿론」으로 시작해 여섯 편의 에세이를 담고 있다.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질투에 관하여」
「죽음의 공포에 관하여」
「학자들의 무지에 관하여」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에 관하여」
「맨주먹 권투」
모든 이야기를 소개하기보다는 제목이 되는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와 위의 셰익스피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학자들의 무지에 관하여를 소개하겠다.
1)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이 글은 1826년경의 가장 ‘해즐릿다운’ 자기 고백적 분석으로 읽힌다. 그는 인간이 불행과 추문으로 모여드는 본능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많은 것에 싫증 내지만, 타인을 조롱하는 일에는 질리지 않는다.” 해즐릿에게서 혐오는 단순한 도덕적 악이 아니라 행동을 촉발하는 에너지이며, 그 에너지의 사회적 회로가 잘못 연결될 때 군중의 폭력, 도덕적 위선, ‘정의의 사칭’이 발생한다. 오늘의 SNS 분노경제와 여론 재판을 떠올리며 읽으면 소름이 돋는다.
특히 거미에 대한 관찰을 확장하여 인간의 본성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재미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깊이 들여다볼수록 반감들로 이루어져 있다. 혐오할 게 없으면 생각과 행동의 원천마저 잃어버린다. 순수와 사랑은 금방 싫증이 나고 무관심으로 변모하지만 혐오만은 그렇지 않다. 화재현장을 보면 불을 꺼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불이 꺼지면 재미가 없다. 감정은 이해보다는 열정과 한편이다. 사람들은 박해하기를 좋아해서 마녀가 필요했다. 종교에 대한 박해도 마찬가지다. 혐오의 즐거움은 종교의 심장을 먹어 들어가 원한과 광신으로 가득 채운다. 너무나 어두워서 미간이 찌푸려지지만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여기서의 핵심은, 해즐릿이 혐오를 “금지”가 아니라 “자각과 전환의 대상”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그는 혐오의 지속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에너지를 예술·사유·행동의 생산적 회로로 돌려야 한다고 시사한다.
2) 학자들의 무지에 관하여
촌철살인은 멈추지 않는다.
본 단원을 여는 문장을 소개한다.
...읽고 쓰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보다 차라리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는 게 낫다. 책을 들고 어슬렁거리며 다니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에서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일 능력도 없고 그럴 성향도 아니다. 그런 사람은 지력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거나 집에 두고 다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생각의 맥락을 쫓지 못한다. 글을 통해 기계적으로 떠오르는 것 외에는 어떠한 관찰도 못한다. 생각하는 피곤한 일은 피한다. 습관이 안 돼 있어서 생각을 하려고 해도 견뎌내지를 못한다. 그는 머릿속 빈 곳에 채워지고 끊임없이 서로를 삭제하는 낱말들과 설익은 비유가 지겹게 끝없이 펼쳐지는 책에 만족하며 가만히 앉아있다... 습관성 음주가 위 기능을 손상시키듯이, 이질적 출처에 생각을 의존하는 습관은 생각의 내재적 힘을 약화시킨다. 사고력은 오래 계속 쓰지 않으면 또는 관습이나 권위에 속박되면, 무기력하고 열의가 사라져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일에 부적합해진다. 따라서 학식 있는 사람의 게으름과 무지가 무기력과 권태를 생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 않은가!
이 부분을 읽고 정말 많은 생각에 잠겼다.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다 보니 출처에 집착하게 된 부분도 있지만, 이야기를 할 때도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는 경우도 많이 생기면서 나의 이야기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해즐릿은 이렇듯 학식이 현실의 체온과 단절될 때 무기력과 권태를 낳는다고 지적한다. 요긴한 독법은 단 하나, 책을 덮고 밖으로 나가라는 것이다.
평가 및 감상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는 ‘착한 위로’와는 정반대에 있다. 위로 대신 정확한 진단을, 친절 대신 정직한 마찰을 제공한다. 문장은 놀랄 만큼 생생하며, 오래된 먼지를 털듯 사고의 표면을 일으킨다. 번역이 다소 덜컹거릴 때도 있으나 원문의 리듬과 직설이 워낙 강력해 핵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울프와 해즐릿의 왕복 구조 덕분에, 고전이 현재형의 언어로 다가온다.
추천 독자들
날카로운 통찰을 원하고, 불편함을 감수할 준비가 된 독자
글을 쓰는 사람들 모두, 특히 논문을 쓰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