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정원의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아름다움에 대하여

by Peeping

리뷰를 시작하기 전에, 내가 이 책을 읽고 또 이렇게 리뷰할 수 있음에 너무나 기쁘다. 혹여라도 나의 글을 통해 누군가 목정원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에 관해 함께 사유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책을 읽는 도중, 그녀의 또 다른 저서가 있는지 찾아보았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아쉽게도 단독 저서는 두 권뿐이었다. 그중 하나인 『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것이라고』는 이미 읽은 적이 있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사라짐’이라는 주제를 다룬, 아름다운 책이었다. 나는 그 책을 단숨에 읽고는 곧장 친구에게 선물했다. 혼자 간직하기 아까울 만큼 깊은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다.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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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예술과 사라짐의 미학

책의 소개란에는 “목정원은 서울대 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렌느 2 대학에서 공연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나는 ‘공연예술학’이라는 단어 앞에서 잠시 멈췄다. 공연예술학은 단순히 무대 위 실기만이 아니라, 역사·미학·비평 이론을 아우르며 공연을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읽어내는 학문이었다.

특히 공연은 ‘시간예술’이다. 회화나 건축처럼 공간 속에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발생했다가 소멸한다. 책은 이렇게 말한다.


“연극과 같은 시간예술은 시간에 깃들어 발생했다가, 그 흐름과 더불어 종결된다.”


나는 건축을 전공했다. 건축은 대체로 ‘사라짐’을 허용하지 않는다. 사회적 저항이나 파괴를 통해 무너지는 경우는 있어도, 의도적으로 사라지도록 설계된 건축물은 드물다. 그런 점에서 목정원이 말하는 사라짐의 미학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사라짐을 결핍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조건으로 보는 태도 말이다.


장 끌로드 아저씨

책 속에서 나는 장 끌로드라는 한 노인의 사례를 인상 깊게 읽었다. 그는 가장 싼 티켓을 여러 장 예매해 길을 지나는 사람이나 우연히 마주친 이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리고 함께 극장에 들어가 같은 공연을 관람한다. 이 행위는 단순한 호의 이상의 것이다. 장 끌로드는 공연을 개인적 즐거움의 소유물이 아니라 타인과 공유될 때 비로소 완성되는 사건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나눔은 단순히 타인에게 티켓을 주는 선행이 아니다. 공연을 매개로 인간관계의 새로운 형식을 창출하는 것이다. 로비에서의 짧은 대화, 쉬는 시간의 나른한 공기, 공연이 끝난 후 함께 흩어지는 발걸음은 일상의 우연한 만남과는 다르다. 그것은 공연이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맺어진 느슨한 연대, 곧 공연적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러한 장 끌로드의 사례는 ‘아름다움’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우리는 흔히 아름다움을 작품 자체의 속성에서 찾지만, 목정원이 말하는 또 하나의 아름다움은 타인과 함께하는 순간적 경험 속에서 발생한다. 장 끌로드는 바로 그 점을 체현하는 인물이다. 그의 행위는 공연을 단순히 예술적 사건으로 한정하지 않고, 사회적·윤리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그는 타인에게 공연을 선물함으로써, 공연을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 그 나눔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기쁨을 창출한다.


장 끌로드의 삶은 내가 참으로 동경해 온 삶인 듯하다. 목정원도 그에 대해 '무언가를 오래 좋아해 온 사람이 지닌 자신만의 역사화의 섬세한 애정의 방식, 그것만큼 내게 부러움과 경외를 일으키는 것은 없다'라고 설명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먼 훗날 소소한 책방을 열어 작은 공동체를 만드는 상상을 다시금 해본다.


믿음과 허구, 그리고 인간

또한,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논의는 "우리는 왜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죽음과 고통을 바라보면서도 왜 달려들어 돕지 않는가"이다. 목정원은 그 이유를 ‘믿은 체 하기’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관객은 무대 위 상황을 진실처럼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허구라는 사실을 동시에 자각한다. 이 모순적인 태도야말로 공연 몰입을 가능하게 한다. 만약 관객이 허구임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면 무대와 현실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해 혼란에 빠질 것이고, 반대로 허구라는 사실만을 철저히 의식한다면 공연은 더 이상 감정적 울림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결국 관객은 ‘믿지 않으면서 믿는 태도’ 속에서 공연을 즐기고, 그 허구 안에 몰입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단순히 속아서가 아니라 믿고 싶어서 공연에 몰입한다는 사실이다. 허구는 현실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마음속 깊이 믿고 싶어 하는 세계를 보여주는 장치다. 목정원은 예술의 임무가 바로 여기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예술은 우리에게 “우리는 무엇을 믿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며, 그 믿음을 잠시라도 현실처럼 체험하게 한다. 그러므로 무대 위의 허구는 환상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욕망과 신념을 드러내는 장이다.


이는 공연예술이 단순한 오락이나 미적 체험을 넘어서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방식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은 끊임없이 허구를 필요로 한다. 신화, 종교, 이야기, 예술이 모두 허구의 형식으로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통해 삶을 견디고 세계를 이해한다. 결국 허구를 믿은 체하는 행위는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것이며, 공연은 이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장르다. 목정원은 이 점에서 공연예술이란 단순히 눈앞에서 펼쳐지는 사건이 아니라, 믿음과 욕망의 메커니즘을 실험하는 장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춤추는 관객이다

목정원은 관객을 하나의 ‘춤추는 존재’로 나아가길 바라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보다는 초라하게 여기기가 훨씬 더 쉽다. 우리 존재가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닌 단지 그 행위에 몰두해야 한다. 몸과 함께 정답기 위해 춤을 춰야 한다. 서로 다른 춤을 추되, 항복하는 마음으로, 존재 자체의 떨림을 공유하면서.


배우와 관객이 함께 춤추는 Pre-show


마치며,

이 책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나는 가능한 한 조용한 공간에서, 때로는 소리 내어 읽기도 했으며, 읽은 문장을 반추해야만 했다. 아마도 그것은 목정원의 문장이 공연처럼 한순간 사라지지만 동시에 잔향으로 남는 글쓰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건축을 공부했고, 건축은 기본적으로 ‘지속’을 전제로 한다. 한 번 세워진 건축물은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동안 존재하며 사람들의 삶을 품는다. 건축은 시간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 흔적을 축적해 나가는 예술이다. 따라서 건축은 사회와 권력의 기억을 보존하거나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반면 공연은 그 순간을 지나면 남는 것이 없다. 기록으로 남길 수는 있지만, 그것은 공연 그 자체가 아니라 그림자에 불과하다. 목정원이 강조하듯, 공연은 발생과 동시에 사라지며, 사라짐 속에서만 그 의미가 온전히 드러난다. 나는 건축학도로서 늘 영속성과 기념성을 고민했지만, 목정원의 글을 통해 사라짐을 긍정하는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두 예술의 차이는 나에게 새로운 통찰을 주었다. 영원히 남으려는 건축도 언젠가는 파괴되고 소멸한다. 반대로 단 한 번의 순간에 불과한 공연도, 관객의 기억 속에서 오래 살아남는다. 건축과 공연은 서로 반대편에 서 있는 것 같지만, 결국 존재와 소멸의 긴장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는 점에서 맞닿아 있었다.


끝으로, 나와 공연예술학의 작은 접점을 말하고 싶다. 나의 석사 논문은 어빙 고프만의 관점(드라마투르기)을 도시 공간에 확장하는 연구였다. 고프만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무대 위의 연극에 비유했다. 개인은 일상에서 ‘배우’처럼 역할을 수행하고, 사회는 ‘무대’가 된다. 『자아연출의 사회학』과 『상호작용 의례』에서 그는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지켜주기 위해 의례적 상호작용을 수행한다고 설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목정원이 말하는 공연예술학과 사라짐의 미학은 고프만의 사회학적 무대론과 맞닿아 있다.


우리 모두는 공연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사라짐을 살아내는 존재라는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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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고통은 몸에 각인되므로 쫓으려 해도 영원히 돌연한 소스라침으로 우리를 깨우는 반면, 아름답고 행복한 것들은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끝내 잊히고 만다. 나는 삶으로부터 그것을 배웠고 그리하여 되도록 많은 것을 기록하는 사람이 되었다. 특별히 공연을 보고 돌아온 밤이면, 덧붙여 그 공연이 아름다웠던 날이면 좋음을 붙들고 아직은 생생한 기억을 풀어 내가 본 것들을 남겨두려 했다. 시간이 흐른 뒤 그 수첩을 뒤적이며 종종 과거의 내게 감사해하고, 미래의 나를 위해 오늘도 현재의 기록을 멈추지 않는다. p.84



영속을 전제로 건축이 이루어진다고 기술했지만, 예외적으로 사라짐 자체를 의도한 기념비도 있다. 요한 게르츠와 에시드 샬레브 게르츠 부부가 만든 땅 속으로 가라앉는 기념비이다. 반파시즘 기념물의 일종이며,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참고하자.


https://jochengerz.eu/works/monument-against-fascism


https://blog.naver.com/bbigsso/221281204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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