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ggy in Singapore
나의 선택에 응원해준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그의 배웅을 받으며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멋진 경험하고 언제든지 돌아오라는 아빠와 철부지 둘째 딸에 대한 기대보단 걱정이 잔뜩 앞선 엄마를 다시 떠올려보니 마음이 참 든든하다.
그렇게 6시간의 밤 비행을 마치고 창이공항에 착륙했다.
공항에서 짐을 찾아 GRAB 택시 승강장으로 향하는데 싱가포르의 적당한 습도와 특유의 냄새가 나를 설레게 했다. 어마 무시한 짐을 친절히 실어주었던 기사님의 싱글리쉬 발음도 귀엽게만 들렸고, 캄캄하지만 화려한 싱가포르의 밤을 드라이브하며 선물 받은 듯한 기분을 잔뜩 느꼈다.
급히 예약했던 라벤더의 한 호스텔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아침, MRT를 타고 오피스가 있는 맥퍼슨으로 향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하우싱 fee를 따로 받지 않고 그냥 회사에서 제공되는 집에서 지내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그땐 몰랐지만 싱가포르에 있는 콘도마다 드넓은 수영장이 있어 굉장히 매력적이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회사 내부를 둘러보며 주재원들과 현지 직원들에게 간략한 자기소개와 인사를 하고 부장님과 과장님과 함께 promenade 근처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첫 직장상사인 부장님은 꽤나 친근한 성격의 평범한 아저씨 같았고 잘 챙겨주시는 듯 보였다. 과장님의 첫인상은 내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프로 직장인의 appearance였고 나도 저런 모습을 배우고 싶다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그리 살갑게 대해 주진 않았다. 그래서 괜히 '저 사람은 내가 아직 어린 나이에 이렇게 당찬 모습으로 일을 잘 해낼 수 있을지 몰라서 저러는 거겠지. 열심히 한 번 해보자. 아 근데 저 사람 뭘까 정말 재수 없다'라고 혼자 생각했다.
그래도 딱따구리 같은 과장님 덕분에 내 안에 잠재돼있던 책임감과 잘하고자 하는 의욕이 활활 타올랐다.
오후에는 건강검진을 받으러 회사에서 지정한 병원으로 찾아 헤매다가 난데없이 해가 쨍쨍한 날씨에 갑자기 굵다란 빗줄기가 우두둑 쏟아져내렸다.
아 여기가 싱가포르구나..
게다가 밖은 분명 고온다습한 열대지방임이 틀림없지만 모든 건물 안은 냉방병을 앓을 정도로 추운 나라이다.
Obviously 이때부터 수집된 나의 보부상 가방들. 내 가방 속에는 항상 작은 우산과 도톰한 카디건은 필수였다. 지금도 내가 무척 사랑하는 제인 버킨의 basket bag처럼.
내가 방향치라고 처음 느낀 순간이 바로 병원을 눈앞에 두고도 두 바퀴나 돌며 찾아 헤매던 그날이었다.
건강검진 검사가 끝나갈 무렵 마지막에 피 뽑는 게 무서워서 간호사에게 부탁을 했다.
간절한 표정으로 "나는 겁쟁이니까 제발 살살 놔줘" 했더니 세상 친절한 표정으로 "걱정 마, 너도 모르게 거의 끝났어"라며 길고 굵은 아픔을 남겨준 간호사.. 여하튼 건강검진도 무사히 클리어!
집을 구하기 전까지 2주 정도 임시로 지낼 예정인 동네 라벤더를 산책하다 한 카페에 들어갔다.
싱가포르에 와서 처음 마시는 커피 냄새에 흥분 상태로 직원이 추천해준 라벤더 라테를 마셨는데 기대와 다르게 밍밍하고 씁쓸한 맛이었다. 얼음을 요청해서 어찌어찌 마셨던 싱가포르에서의 첫 커피.
그러고 보니 첫 도전 첫 직장 첫 일상 첫 커피 모든 것에 처음 의미를 부여하는 걸 좋아하네 나.